(1) 부안고을의 관문 동진강 하구 옛 나루터를 찾다

2010. 1. 16. 16:46도보여행기/부안 변산반도를 걷다

부안 변산반도를 걷다 

(1) 부안고을의 관문 동진강 하구 옛 나루터를 찾다

 

                                          

 

 

2010.  1. 11.   월요  흐림

 

06:50분 센트럴 호남고속터미널에서 부안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늘 여행을 떠날 때면 설렘이 있어 좋다.

미지의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 있기에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자욱한 안갯속에 흰 눈이 산야에 점점 더 많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확히 3시간 걸려 부안터미널에 도착한다.

 

부안읍 군청 옆에 있는 서문안 당산을 답사하기 위해 눈 쌓인 길을 걸어간다.

길 옆에 세워진 목판에 '待春賦' 시가  보인다.

 

                         

'봄을 기다리는 시'다

 

 

대춘부(待 春 賦)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그 다음은 쌓인 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봄을 기다리는 시'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길을 걸어가면서,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대춘부'를 읊조리니, 땅속에서 태동하는 봄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 시는 부안이 낳은 시인 신석정의 시 '대춘부'이다.

보이지 않았던 그다음 구절을 찾아 이어 본다.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부안군청 옆 '서문 안 당산'에 도착한다.

 "堂山이란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여 살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일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당산신의 신체를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래 묵은 나무가 신체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솟대, 돌기둥, 장승, 마을 뒤의 숲이 신체가 되기도 하며, 흔하게는 이 모든 요소들이 두세 가지씩 복합되어 있다. 삼한시대 마한의 소도와 천신제가 오늘날 호남지방의 당산과 당산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당산은 그 마을의 안태길복과 재액병마를 맡은 신이 사는 곳이며, 당산신을 잘 받드느냐 못 받드느냐에 따라 그 마을 사람들의 길흉화복이 달라진다고 믿어지는 만큼, 마을 사람들의 공동신앙적 구심이 되어 왔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의 무사함이나 질병치유, 아들 낳기 등 개인적 소망을 비는 곳이기도 하였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扶安 西門 안 堂山

 

"이 두 쌍의 솟대당산과 석장승은 부안읍성의 서문안을 수호하던 것으로 조선 숙종 15년(1689)에 세웠다.  원래 서문으로 통하는 길 양 옆에 있었으며, 1980년 이곳으로 옮겼다. 할아버지 당산은 높다란 돌기둥(3.78m)이 서고  그 위에 오리가 서쪽을 향하여 앉은 모습이다. 받침돌의 '알받이 구멍'은 당산제를 지낼 때 쌀을 담는 곳이다. 할머니 당산의 현재 높이는 2.08m이며, 본래는 할아버지 당산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중동이 부러져서 입석처럼 보인다. 없어진 오리대신 윗부분에 오리 모양이 음각되어 있다. 솟대 당산 옆 인자한 얼굴의 석장승 중 '상원주장군'이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 장군'으로 불리는 할아버지 장승이며, '하원당장군'이 '당산할머니'로 불리는 할머니 장승이다. 이곳의 당산제는 매년 정월 초 하룻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지낸다. 

이 때는 부안 동문안과 남문의 당산을 모시는데, 이는 서문안 당산이 주신이기 때문이다.'

 

군청뒤 서림공원 성황산을 넘어 동문안을 가기로 노정을 정하고 눈이 쌓여 미끄러운 언덕길을 걸어 오른다.

성황산은 부안읍을 감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성황산 성황사를 지나 팔각정에 오른다.

사방이 툭 터여 전망하기엔 좋은 곳이다.

그러나 현재의 날씨는 잔뜩 흐리고 눈발도 간간이 날려 시야가 좋지 않다.

눈 쌓인 임도를 걸어내려간다.

 

다음 답사지 仙隱里 신석정 고택을 찾는다.

현재 한창 신축 중인 신석정문학관 왼쪽 옆 골목길로 들어서면 초가집  신석정 고택이 보인다.

 

                               

 

 

                               

 

 

                               

 

 

문안에 들어서면,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신석정 고택 (辛錫正 古宅)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이 집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큰 맥을 이은 신석정이 살던 곳이다.  1930년대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이끌던 신석정은 부안 동중리에서 태어나1954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청구원(靑丘園)으로 불리는 이 집의 정원은 측백나무로 울타리가 둘려있고 그 안에 은랭나무, 벽오동, 목련, 산수유, 철쭉, 신우대, 등나무 등이 심겨 있다. 신석정의 목가적인 전원시집인 '촛불' , '슬픈 목가' 등은 이곳에서 쓰인 것들이다.

  

"신석정(1907-1974)의 본명은 錫正이고, 아호는 夕汀이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강원에서 수학했다.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화,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8 ·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역시 8 ·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 그 뒤 계속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댓바람 소리》 등의 시집을 간행했다.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동문안을 향하여 걸어간다.

한국전력 건물 앞을 지나 조금 걸어가니 얕은 언덕 기슭 길가에 신석정의 시가 쓰인 목판이 도열해 세워져 있다. 

             

 

       

 

 

 

댓바람 소리  / 신석정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蕭蕭한
창을 흔들더니

 

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새벽을 알리는
좁은 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거릴지언정
 "어찌 帝王의 門에 듦을 부러워하랴."

 

댓바람 타고
들려오는
먼 거문고 소리...

 

 <촛불> 시집에 있는 시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으십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 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양들이 낡은 녹색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우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이 나려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먼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들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 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동문안 당산에 도착한다.

 

 

 

 

 

 

 

 

"扶安 東門 안 堂山의  석장승과 솟대 당산은 조선 숙종 15년(16890에 부안 읍성 동문안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이 지역에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당산하나씨' '짐대하나씨'라고 부르는 솟대 당산에는 머리를 바닷 쪽을 향하고 있는 오리가 앉아 있다.  이는 이 마을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한 쌍의 석장승 가운데 '하원당장군'이 여신상이고, '상원주장군'이 남신상이다. '상원주장군'은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도 하는데 벙거지를 쓴 모습이 제주도 돌하르방과 흡사하다. 이들 석장승은 1977년 이곳 도로를 2차선으로 확. 포장하면서 도로 양쪽에 옮겨 세웠으며, 

2004년 국도 23호선의 부안 진입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세웠다."

 

다음 답사지는 부안 삼절 중의 하나인 이매창을 찾아 매창공원을 향한다.

군청을 지나 남으로 걸어간다.
 

 

 

 

소금샘이 있는 부안읍 서외리 서외 6구 마을을 지난다.

비석에는 소금샘의 유래가 적혀 있다.

"소금샘은 백여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으면서 풍부한 수량으로 김장철이나 가뭄 때는 이웃마을 사람까지도 사용해 왔으며 배고픈 시절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학생들과 나그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갈증을 풀었던 많은 사람들이 잊지 못할 마음의 샘으로 칠석날이나 유두날이면 우물을 청소하고 마을의 상징으로 애틋하게 보존해 오는 소금샘이다. 향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커지면서 옹달샘처럼 맑은 물이 솟아나는 이곳에 공동 우물을 만들게 되었는데 지나가던 소금장수가 맨 처음 마신 뒤로는 물맛이 건건한 맛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전설까지 간직한 이 소금샘은 마음의 젖줄로 우리 마을의 편안을 점지해 줄 것이다."        1999년 12월 소금새 보존회

 

 

한 참을 걷고 또 걸어 아파트를 바라보며 걸어 들어가니 눈 쌓인 부안읍 봉덕리 매창뜸 매창공원에 도착한다

시비가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하나하나 매창의 시를 감상하며 공원을 돈다.

매창뜸/ 가람 이병기,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허균,   매창묘를 찾아서/ 정비석의 시비도 보인다.

 

                         

'名媛 李梅窓之墓'라는 묘비가 서 있는 매창묘다.

 

 

 

이매창(1573-1610)

"조선 시대 대표적 여류시인 중에 규수시인으로 허란설헌을 꼽는다면, 기녀시인으로는 황진이와 매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매창은 1573년(선조 6) 당시 부안 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생(癸生, 桂生) 또는 계랑(癸 )이라 하였으며, 호는 매창(梅窓)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李貴) 같은 고관이라든가,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같은 시인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그의 대표적인 시는 「梨花雨」로,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1610년(광해 2) 여름 38세의 나이로 죽자 거문고와 함께 부안의 봉덕리(매창뜸)에 묻혔다. 평생 수 백편의 시를 남겼으나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외어 전하던 58편을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으로 '매창집'을 엮어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이매창과 부안-이화우 흩날릴 제 '매창뜸'에 서서'의 글을 옮겨 본다


"들으시라. 이 땅의 풍광과 예술을 사랑하는 알 수 없는 그대여. 부안에 가거든, 격포의 일몰과 내소사 월명암의 달빛만 보고 오지 말기를. 부탁하노니, 찾는 이 하나 없고 울어줄 이 하나 없는 두 여인의 무덤에 꽃 한 송이씩 바쳐 주기를. 푸르른 나이에 외롭게 떠난 시인 이매창과 명창 이중선(1901?∼1932)의 묘소는 서로 지척이니 한번 들러 혼백이나마 위로해 주기를. 세월은 험해도 소쩍새는 울더라고, 이승의 시절 안부나마 전해 주기를….

백산. 초록 풀과 뒤섞여 갈아놓은 일망무제의 붉은 황토밭. 차마 가슴 두근댐 없이 이 벌판을 건널 수 있다더냐. 지금도 들 리는 듯하다. 흰 옷 입고 저 긴 '징계 매우게 이 애미뜰(김제만경 외애 미들)'가로질러 북상해 갔을 동학혁명군의 함성이. 흔히들 '남도한'으로 전라남도 정서를 들지만, 부안 가는 길의 '고부', '이평', '백산'벌을 물들인 동학의 피와 한은 동진강 푸른 물로도 씻길 수 없는 것이었다. 한때 매창의 연인이었던 허균이 부안의 우동리에 은거하며 체제에 항거하는 '홍길동'을 쓴 것도 우연 은 아니었을 터. 유난히 경승지 많아 '생거부안'이라 했지만 이 미완의 혁명지에는 역사의 서린 한 또한 많았다.

이매창.  조선조 최고의 여성 시문학을 일궈냈던 천재적 예술가였건만, 궁벽한 변산반도에서 서른일곱 나이로 죽어갔던 그녀도 가슴에 한을 품고 갔을 터이다. 여자에 관한 한 칠흑같이 어둡던 봉건의 시대에, 더구나 그녀는 사내들이 지분냄새 더듬으려 들었던 기생의 몸. 그 나이 스물에 매창은 한 남자를 사랑했다. 촌은 유희경(1545∼ 1637). 도골선풍의 그와 시로 화답하던 밤, 그녀는 머리 풀고 큰절을 올린다. "명마는 '백락' 만나기 전에는 굴복할 줄 모른다 합니다.". 그러나 그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임진란의 전쟁터로 떠나 버린다. 그를 보내던 날 배꽃이 눈처럼 비처럼 흩날렸다.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다.

 

허망한 기다림 속으로 다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시대의 반항아 교산 허균(1569∼1618). 매창이 그리울 때면 천리길 멀다 않고 말 달려왔던 그는 시대와 불화했던 개혁주의자. 훗날을 기약하고 부안 땅을 떠났던 그 비운의 천재는 역모의 상소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 끝에 참형되고 만다. 매창이 사랑했던 남자들은…, 그렇게들 갔다. 비련의 시인 매창은 거의 사백여 년 동안이나 공동묘지였다는 부안읍 남쪽 외곽 '봉두메'의 '매창뜸'에 잠들어 있었다. 

근래 천 여 기의 무주묘들을 이장하느라고 갈아엎어놓은 흙무덤마다 번호 적어 꽂아둔 팻말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절절히 말해준다. 357, 358, 359….

부안 사당패와 아전들이 외롭게 죽은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이곳에 묻어주고 해마다 풀 뽑고 제사 지내오기 아득한 세월이었다 한다. 생전에 그녀가 자주 놀러 갔다는 개암사에서 아전들은 그녀 사후 58년 만에 바람에 날아다니며 구전되던 시들을 모아 목판본의 책은 로 묶어내었다. 그 시집이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이었다 한다(김지용, 매창문학연구, 1974). '계화' 지나 '곰소나루'쪽 해안도로 따라 개암사로 간다. 전신주는 몇 번씩이나 소실점으로 좁혀지고, 울부짖음처럼 천공을 울리는 해풍에 흙먼지는 회오리를 친다. '들물' 때면 한 차례씩 불어와 갓 피어난 꽃과 나무마저 무참히 꺾어버린다는 그 사나운 소금바람이다. 폐를 앓던 명창 이중선을 갓서른 지난 나이에 데려가버린 것도, 매창의 명을 꺾어버린 것도 저 들물의 소금바람이었을 것이다. 갯벌의 폐선이며 갈대밭, 소금창고와 염전들이 끝나면서 수묵화처럼 호젓한 산길과 저수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억센 우금바위 아래 시간이 퇴적한 듯, 거기 단아하게 개암사는 있었다. 허다한 '거찰', '명찰'들의 울긋불긋 느끼한 느낌 아닌 무채색으로 서 있는 담박한 '고찰'의 분위기는 매창의 시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싸리비 자국 선명한 저 마당으로 매창은 들어서곤 했을까. '응진당' 툇마루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신다. 

섬돌 위 가지런한 고무신과 햇볕에 바싹 마른 흰 운동화. 이곳에서, 속도는 … 악이다. 저녁공양 알리는 동종 소리에 섞이는 청아한 예불. 소리는 적막한 뜨락으로 고인다. "

 

이제 난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 동진강 하구에 있었던 옛 나루터를 찾아 걸어간다.

동진강 나루터는 부안고을의 시작이요, 부안을 드나드는 큰 대문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부안사람들이 서울이나 전주 방면으로 갈 때 걸어갔던 옛길을 따라 걸어간다.

혜성병원 앞, 이 언덕에는 장승이 있었다 하여 장승백이였다.

고마제 저수지를 따라 걸어간다.

 

 

 

밭두렁 논두렁에는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

고마제는 살얼음이 하얗게 뒤덮여 있다.

 

 場基마을 앞이다.

이곳이 예전의 동진장터였다.

조선 후기 부안지역 아전들의 수탈이 도를 넘어 백성들이 참다못해 1892년 5월 8일 동진장터에 모여 최초의 민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이것이 시초가 되어 민중들이 점점 깨치어 동학혁명으로 이어갔다고 한다.

옛 동진원이 있던 청운마을 표석이 보인다.

소로 길을 접어들어 걸어간다.

                 

장등리  넓은 들

 

 

이곳이 장등리다.

장등리는 넓은 들이다.

동진강 하구 옛 나루터에는 동진대교가 놓여있다.

 

 

 

나룻배를 타는 대신 걸어서, 왜가리 조형물이 서 있는 동진대교를 건넌다.

동진강은 南出北流하는 강이며 새만금의 젖줄이다.

동진강에는 고기잡이 어선이 떠 있다.

 

 

 

동진강 휴게소를 들렸다 다시 부안의 관문 역할을 하는 동진대교를 건너 부안고을로 들어선다.

동진강 하구 옛 나루터인 동진대교 밑을 지난다.

예전 이 나루터에는 국밥도 파는 주막이 있었고, 또한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통운 창고도 나루터 옆에 있었다고 한다.

 

 

동진강 갯가에는 갈대숲이 무성하고,  둑길은  흰 눈이 소복하다.

 

 

동진강 I  / 정휘립

 

밤은 종적도 없이

마른 강을 건너갔다.

삭풍이 쇠사슬처럼

철컹이며 감겨 오아

밤새껏 피어오르다

낙엽 지는 봉홧불

횃불도 밀물 타고

함성처럼 모여들었다.

들불이 기다리던

바람 끝내 오지 않고

정적만 웅크려있다가

무서리로 피어났다.

재는 식지 못한 채

불티나마 흩날리는데

타다 만 논배미 위

삭정이 끝에 열리는 땅

아침이 출렁거리며

황톳길을 달려온다.

 

둑길을 따라 동진강을 거슬러 오른다.

바람도 잔잔한 고즈넉한 동진강 노 젓는 소리, 들릴 듯 말 듯

고기잡이 배가 보인다.

강심에 드리운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본다.

 

                      

동진강 지류천인 하장천을 따라 걷는다.

 

 

 

우거진 갈대숲

 

 

우거진 갈대숲이 좋은 하장천 둑길을 걸어 하장마을로 들어선다.

마을길을 걸어 나가니 다시 고마제와 만난다.

부안읍 터미널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5시를 넘어서고 있다.

인근에 숙소를 정하고, 밤사이 많은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