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2024. 11. 24. 17:24사진/야생화

갈대

박 두 진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智慧)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沈默)하고

언어(言語)는 이슬방울,

사상(思想)은 계절풍(季節風),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永遠) -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鮮血)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絶叫)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沈默)하면

갈대는 

고독(孤獨).

강변 찬바람을 받으며 투구를 쓴 병사들처럼  줄지어 서 있다.

 

수필(隨筆) 

마른 갈대

김 순 경

 

고개 숙인 마른 갈대가 강가에 서 있다. 아직도 강변 찬바람을 받으며 투구를 쓴 병사들처럼  줄지어 강어귀를 지키고 있다. 한겨울 바닷바람에 명태처럼 바짝 말랐지만 물기 하나 없는 빈 껍데기 이삭과 누런 줄기는 자리를 뜰 줄 모른다.

갈대는 대나무가 아니다.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대나무처럼 굵거나 크지도 않고, 질기거나 강한 성질도 없으며, 마디에서 뻗어 나가 균형을 잡아주는 잔가지도 없다. 그렇다고 대나무처럼 대궁이가 썩지 않고 오랫동안 버티는 것도 아니다. 봄이면 잡풀처럼 수북이 올라왔다 가을이면 수명을 다하는 여러해살이풀에 불과하다.

갈대는 어떤 척박한 땅도 쉽게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지만, 염치없이 아무 곳에나 발을 뻗지는 않는다. 누구도 찾지 않는 바닷물과 강물이 폭탄주처럼 섞이는 황량한 그곳을 새로운 풍경으로 만드는 주인공이 된다. 한번 정착하면 쉽게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여기도 내 땅이었다고  말하는 몰락한 부자들처럼 논밭으로 변한 지 오래된 매립지 수로에서도 고개를 치켜든다. 그물망처럼 단단한 억센 뿌리는 펌프처럼 물을 빨아올리고 넓은 잎은 햇볕을 받아 끊임없이 자양분을 만든다. 늦은 봄, 넓은 들판의 벼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갈대는 물가를  다 점령하고 녹색 파도가 되어 작은 바람에도 일렁거린다, 

 

석양 빛을 받으며 가는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는 갈대

 

 

갈대가 없으면 텃새가 어찌 집을 짓고 철새가 찾아오겠는가. 박새 직박구리 같은 텃새는 집 없는 떠돌이가 되어 고달픈 삶을 살았을 것이고, 그 먼 곳에서 V자를 그리며 기러기 떼도 날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때 찾아와도 넓은 잎은 비가 새지 않는 지붕이 되어 주고 줄기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안식처가 된다. 갈대 뿌리가 부지런히 개흙 밭을 만들어 작은 곤충들을 불러 모으면, 말똥게나 홍게, 짱뚱어 같은 바다 식구들이 집을 짓고 정착을 한다. 갈대는 바닷가 개펄을 숨 쉬게 하고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일 년 내내 연출한다.

갈대가 없는 바닷가의 풍경을 상상해 보라. 삭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생명체가 없는 그곳은 뜨거운 바닷바람과 끝없는 파도에 침식당했을 것이다. 텃새의 속삭임도 철새의 군무도 없는 황량한 모래톱이 핏빛 석양을 외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결 위에서 부서지는 거품 같은 갈꽃들이 눈부시게 햇살을 잘게 부수지도 않고, 늦가을 수평선을 넘어가는 석양도 흩날리는 갈꽃을 바라보며 아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갈대는 아무리 흔들려도 자리를 지킨다. 강바람이든 바닷바람이든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춘다. 굳이 어디서 부는 바람이고 왜 부는지 따지지도 않는다. 강한 바람이 불면 영원히 일어설 수 없을 것처럼 쓰러졌다가도 잠잠해지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어떠한 시류에도 뿌리째 편승하지 않고 소박한 자신만의 삶을 꿋꿋하게 꾸려간다.

 

갈대는 아무리 흔들려도 자리를 지킨다.

.....

.....

.....

마른 갈대가 솟대처럼 물가에 서 있다. 한겨울의 모진 추위와 세찬 바람이 다 지나가고 봄이 저무는 지금까지도 누런 삼베옷을 입은 늙은 맏상제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른 갈대도 청춘은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짙은 녹색 잎을 흔들며 새들을 불러 모았고 어떤 풀보다 열심히 자랐다. 억센 소나기나 세찬 태풍에도 꺾이지 않았다. 숨 쉴틈도 없이 바닷물이 밀려오고 강물에 휩쓸려도 비질하듯 햇살이 내려오면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흙탕물에 잠기고 바닷물을 덮어써도 갈대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갈꽃은 피자마자 고개부터 숙인다. 갈색 이삭은 겨울 털갈이 하는 들짐승의 털처럼 더부룩하지만 눈부시도록 작은 꽃씨는 가을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다. 늦가을 오후 햇살에 열기구처럼 천천히 날아가는 꽃씨를 보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이별의 정이 느껴진다.

 

꽃은 갈꽃, 혹은 노화(蘆花)라고 한다. 인도의 어느 깡마른 수행자처럼 오늘도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

 

 

흔들리고 떠나가는 것이 반드시 슬픈 것은 아니다. 어는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거나 젖지 않고 피는 꽃은 어디에도 없다. 갈대는 여는 식물과 마찬가지로 흔들리며 꽃이 피고 씨앗이 되어 어느 날 떠나간다. 어떤 시인은 갈대가 조용히 울고 있다고 한다.

나는 매일 갈대를 보지만 얼마나 더 생각하고 바라봐야 산다는 것이 조용히 속으로 우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을지. 인간을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와 비교한 철학자도 있다.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갈대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았으면 꽃을 피우지도 씨를 날려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갈대는 인도의 어느 깡마른 수행자처럼 오늘도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

 

바람이 불면 이삭이 늘어져 몸을 낮추어 나부끼며 석양 빛을 받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흔들리지 않았으면 꽃을 피우지도 씨를 날려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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