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2019. 3. 2. 11:07시 모음/시

 

선암사 백매

 

 

매화 예찬

만해 한 용 운(1879-1944)

 

매화를 반가이 만나려거든,

그대여, 눈 쌓인 강촌(江村)으로 오게

저렇게 얼음 같은 뼈대이거니,

전생(前生)에는 백옥(白玉)의 넋이었던가.

 

낮에 보면 낮대로 기이한 모습,

밤이라 그 마음이야 어두워지랴.

긴 바람 피리 타고 멀리 번지고

따스한 날 선방(禪房)으로 스미는 향기!

 

매화로 하여 봄인데도 시구에는 냉기 어리고,

따스한 술잔 들며 긴긴 밤 새우는 것.

하이얀 꽃잎 언제나 달빛을 띠고,

붉은 그것 아침 햇살 바라보는 듯

 

그윽한 선비 있어 사랑하노니,

날씨가 차갑다 문을 닫으랴.

강남의 어지러운 다소의 일은

아예, 매화에겐 말하지 말라,

 

세상에 지기(知己)가 어디 흔한가.

매화를 상대하여 이 밤 취하리.

 

 

통도사 영각 홍매

 

 

매화

서 정 주(1915-2000)

 

매화에 봄 사랑이 알큰하게 펴난다

알큰한 그 숨결로 남은 눈을 녹이며

더 더는 못 견디어 하늘에 뺨을 부빈다

시악씨야 하늘도 님도 네가 더 그립단다

매화보다 더 알큰히 한 번 나와 보아라

매화 향기에서는 가신 님 그린 내음새

매화 향기에서는 오는 님 그린 내음새

갔다가 오시는 님 더욱 그린 내음새

시악씨야 하늘도 님도 네가 더 그립단다

매화보다 더 알큰히 한 번 나와 보아라

 

 

송광사 백매

 

 

매화송(梅花訟)

조 지 훈(1920-1968)

 

매화꽃 다 진 밤에 호젓이 달이 밝다

구부러진 가지 하나 영창에 비취나니

아리따운 사람을 멀리 보내고

빈 방에 내 홀로 눈을 감아라

비단 옷 감기듯이 사늘한 바람결에

떠도는 맑은 향기 암암한 옛 양자라

아리따운 사람이 다시 오는 듯

보내고 그리는 정도 싫지 않다 하여라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 와룡매

 

 

매화꽃 피는 저녁

유 응 교

 

차게 내려 앉은 회색빛 하늘아래

잔설이 머뭇거린 시린 가지마다

벙긋이 여미는 꽃잎 향기가 그윽하네

 

매향이 번져오는 조용한 뜨락에서

찾아오는 벗이 없어 외로운 저녁나절

술잔을 사이에 두고 오는 봄을 재촉하네

 

우아한 풍치와 기품 있는 그 절개를

선비들이 한결같이 본받기를 바라더니

문방사우 묵향 속에서 또다시 피어나네

 

 

통도사 영산전 홍매

 

 

매화 앞에서

이 해 인(1946-)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하던
희디흰 봄햇살도
꽃잎 속에 접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선암사 백매

 

 

조선 매화

송 수 권(1940-2016)

 

예닐곱 그루 매화 등걸이

참 서늘도 하다

서늘한 매화꽃 듬성듬성 피어

달빛 흩는데 그 그늘 속

무우전(無憂殿) 푸른 전각 한 채도

잠들어 서늘하다

'시 모음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귀나무 열매  (0) 2019.03.18
산수유  (0) 2019.03.18
녹차, 청류다원(淸流茶院)  (0) 2019.02.26
오대산 전나무  (0) 2019.02.12
설날 아침에  (0) 2019.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