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산오름 기슭의 신성한 숲 산천단山川壇

2013. 10. 28. 17:05나를 찾아 걷는 길/빛과 바람, 구름,비,안개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

 (1) 소산오름 기슭의 신성한 숲 산천단山川壇

       2013.. 10.22

  

오름 전체가 해송, 삼나무, 편백나무가 어우러진 숲을 이루고 있는 소산오름 북동쪽 기슭에는 신성한 숲이 있다.

사천왕처럼 우뚝우뚝 선 5-600년 곰솔이 지키고 있는 유서 깊은 제단  "산천단(山川壇)"이다.

 

수령 5-6백 년의 곰솔 여덟 그루가  "한라산신제단" 둘레를 빙 둘러싸고 있다.

검은색 껍질의 우뚝우뚝 솟은 장대한 곰솔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제주 산천단 곰솔 군(濟州 山川壇 곰솔 群)

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세기 때문에 "곰솔"이라고 부른다.

소나무의 겨울눈은 붉은색인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이다.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海松)이라고도 부르고,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이라고도 한다.

 

"한라산신제단" 옆으로 옛적의 제단으로 보이는 고색창연한 돌들이 놓여있다.

제단 뒤 주변으로 팽나무, 예덕나무, 멀구슬나무가 서 있다.

제단 옆으로 이약동이 건립한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禪碑"와 깨어진 비석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이 비석에는 “ 이곳은 예로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라고 쓰여 있고,
또 다른 비석에는 “성종 1 년 (1470) 이약동 제주목사가 한라산산신묘를 세웠다. 산정상에서 매번 제사를 지냈는데 , 많은 사람들이 동사했다.

그래서 제주 남쪽 작은 산 아래에 묘당을 건립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라고 쓰여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357-1에 주소지를 둔 산천단山川壇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과 인간의 교섭처로 높은 산을 숭배하였다. 또 그 우두머리는 산신이 되어 나라와 마을의 수호신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산천단은 산악숭배의 믿음에서 출발한 신성한 장소이고, 또한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 있는 천신이 인간세상에 내려올 때는 큰 나무에서 잠시 쉬어 내려온다고 믿어 왔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 곰솔도 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통로에 있는 나무라고 믿어 신성시 여겨 잘 보호하였다. 이곳 산천단은 옛날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1470년(성종 1) 목사 이약동이 세운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를 비롯하여 농사의 재해예방을 기원하는 포신묘(酺神廟)가 있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올리던 터 이기도 했다. 또 이 일대에 소림천(少林泉) 초림과원(少林果園) 소림사(少林寺)와 함께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이름 높은 명소이기도 했다. 제주도에 부임하는 목사(牧使)는 예로부터 2월에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냈다. 날씨가 춥고 길이 험해 그때마다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1470년(성종 1) 목사로 부임한 이약동(李約東)은 그런 사실을 알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산신제를 지내게 하여 제주도민들이 고생하는 폐단을 없앴다. 지금도 산천단에서는  주민들에 의하여 매년 산신제가 봉행되고 있다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호는 춘보(春甫)·노촌(老村)·평정(平靖) 노촌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년)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1470년(성종 1) 10월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이속(吏屬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켰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고 세공을 감면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행하게 하여 제주도민들이 산신제를 지내다가 동사(凍死)하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1474년(성종 5) 경상좌도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어 제주도를 떠날 때 평소 착용하던 의복과 기물을 그대로 두는 것은 물론, 말채찍조차도 관물이라는 이유로 성을 떠나면서 성루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이 일은 후임자들에게 아름다운 경계가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채찍이 없어진 후에는 백성들이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 이를 기리고자 하였다. 그 바위가 바로 괘편암(掛鞭岩)이며, 이 일화는 지금도 제주도민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주도를 떠난 배가 갑자기 풍랑으로 파선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약동은 이것이 하늘을 속인 벌이라 여기고 배 안을 살펴 자신도 모른 채 실려 있는 갑옷을 찾아냈다. 갑옷은 부하들이 전별 선물로 몰래 실은 물건이었다. 이약동은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갑옷을 강물에 던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투갑연(投甲淵)으로 상세한 내용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실려 전한다.

평생에 청백하고 조심하여 자손들을 훈계할 때에는 반드시「금을 돌처럼 여기라.」고 가르쳤다. 이는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서 마음가짐을 바로 하려면 금전등 재물을 멀리 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임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처럼 이약동은 청백리 정신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그의 나이 73세인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으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말년에 고향인 하로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76세에 낙향할 때 비가 새는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고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 그는 유산으로 아들에게 아래 시(詩) 한 수를, 부인에게는 쪽박 하나와 질그릇 하나를 주었다고 한다.

家貧無物得支分/ 惟有簞瓢老瓦盆/ 珠玉滿隨手散/ 不如淸白付兒孫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뿐일세/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사천왕처럼 우뚝한 늠름한 모습의 수령 5-6백 년의 곰솔

 

 

곰솔 옆으로 "山川壇 祭祀 터"라 새긴 비석이 놓여 있다

 

 

 

                                                                        "山川壇 祭祀 터"  비석

 

산천단 전경

 

 

 

옛적의 "한라산신제단"으로 보이는 고색창연한 돌

 

 

 

새로 만든 한라산신제단

 

 

 

산천단 비석

 

 

 

이약동이 건립한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禪碑" 1997년 홍정표가 발굴하여 세운 것이다.

 

 

 

                                                            한라산 신제단과 산천단 비석 들

 

 

 

산천단 둘레를 빙 둘러싸고 있는 수령 5-6백년의 곰솔 여덟 그루 전경

 

 

 

                                                                               수령 6백년의 곰솔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하여 "흑송黑松"이라고도 한다

 

 

  

곰솔

 

 

  

곰솔

 

 

 

 

 

  

제주문화예술인들과 그의 후손이 세운 "목사 이약동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牧使 李約東先生 漢拏山神壇紀蹟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