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4. 13:50ㆍ나를 찾아 걷는 길/퇴계의 발자취를 찾아 걷다
(5) 온혜리 노송정종택 퇴계태실을 찾아서
청량산에서 버스를 타고 온혜리 정류장에 내린다.
퇴계태실을 찾아 걷는 길에는 석양의 햇살이 내리고 있다.
고택 담장 뒤에는 부챗살처럼 자란 향나무가 보인다.
퇴계태실 (노송정종택)
이 건물은 1454년(단종 2)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이 건립한 종택이다. 이계양(1424∼1488)의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자는 달보(達甫) 호는 노송정으로 퇴계의 조부이다. 이계양이 봉화훈도로 있을 때 이 근방에서 굶주림으로 쓰러져 있는 스님을 구해주었는데 , 그 스님이 이 집터를 잡아주면서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히된다'고 해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계양의 두 아들 가운데 맏이인 이식의 일곱째 아들이 바로 이황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인 이 종택은 노송정종택이라고도 하는데 퇴계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퇴계태실이라고도 한다. 대문채, 노송정, 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끝이 사당이고, 그 다음이 노송정이고, 서쪽에 본채가 있다. 口자 건물의 본채에는 앞쪽으로 사랑채가 있다. 안마당은 통상의 경우보다 좁고, 안채로부터 그 한가운데로 방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구조이다. 본채 건물의 고매기에 기와조각으로 만들어 넣은 그림이 아주 매력적이다.
퇴계태실은 口자 형상의 비좁은 안마당 북쪽에서 목젖처럼 남쪽을 향하여 돌출되어 있다. 안방, 또는 안채의 마루와 쪽마루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쪽마루와 연결되지 않은 3면은 좁직한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남쪽 방향의 난간은 좀 넓은 마루를 안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퇴계의 할아버지가 이 방을 들이고 퇴계의 어머니 춘천박 씨와 퇴계의 아버지 이식을 합방시켰으며, 퇴계가 태어난 뒤에도 온돌방에서 몸조리를 하게 하였다고 한다. 퇴계의 할아버지는 태어나는 아이한테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려고 이처럼 특별한 배려를 했으며 그래서 퇴계라는 석학이 자라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림문(聖臨門)
종택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 들어가면, 처음으로 통과하게 되는 문에 걸려 있다.
그 위로는 그 문을 왜 성림문이라고 하는지를 설명하여 놓은 현판이 붙어 있다.
퇴계 이황의 모친인 춘천박씨가 공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 이황을 낳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송정(老松亭)
이계양의 호이면서 이 집의 당호이다. 이계양이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주변에 늙은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노송정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앞에 보이는 바깥마당의 정자 건물에는 노송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동추로(海東鄒魯)
노송정 마루방 안에 서면, 동쪽 벽에 보인다. 노나라의 추 땅은 공자가 태어난 곳이다.
그곳과 온혜를 상호 연결시켜 바라보는 의식을 담고 있는 현판이다.
산남낙민(山南洛閩)
서쪽 벽에 있는 현판이다. 나급은 정호·정이 형제가 살았던 곳이고, 민 땅은 주자의 삶터였다.
정이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흐름이 우리의 조선시대를 장악한 주자학을 생산하여 낸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해동추로’가 뜻하였던 것과 같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
태실 남쪽 처마 밑에 붙어 있다. 살지고 둔중한 느낌이 드는 글씨이다.
온천정사(溫泉精舍)
사랑의 동편에 걸려 있고, 남쪽에 있는 두 개의 현판과 한 사람의 작품이다.
글씨는 획이 가늘고 미끈하다.
<도산서원의 퇴계선생유적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글 참조>
땅거미 지는 온혜리 들에는 무청을 가득가득 담아 놓은 포대가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온혜리 마을 노거수 뒤로 석양이 지고 있다.
퇴계태실 답사를 끝으로 퇴계의 발자취를 찾아 걸은 이번 도보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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