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퇴계종택에서 광석나루터까지

2010. 11. 22. 15:35나를 찾아 걷는 길/퇴계의 발자취를 찾아 걷다

(3) 퇴계종택에서 광석나루터까지

      2010.11.11  맑은 후 흐림

 

游春詠野塘    -  李滉

露草夭夭繞水涯      물가엔 이슬 맺힌 풀 싱그럽고

小塘淸活淨無沙      작은 연못은 맑고도 깨끗해 모래 하나 없어라.

雲飛鳥過元相管      구름 날고 새 지남은 어쩔 수 없다지만

只怕時時燕蹴波      다만 때때로 제비가 물결을 차는 것이 두려워라

  

어둑컴컴한 새벽 5:30분 숙소를 나서 안동역과 안동버스터미널 사이에 있는 교보생명 앞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제법 한기가 느껴진다.

05:50분 발 청량산행 67번 좌석버스에 탑승한다.

두사람이 타고 가다 한사람은 중간에 내리고,  "여기가 온혜리입니다" 하는 기사님의 소리에 퍼뜩 놀라 하차하니 으슴프레한 새벽이다.

시간은 06:25분을 가르키고 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퇴계태실' 답사는 돌아오는 길에 하기로 하고, 06:40분에 퇴계종택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여 기다린 후, 

버스에 탑승한 후 퇴계종택 입구에서 하차한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걸어간다.

퇴계종택 솟을 대문을 들어선다.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의 종택으로 원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29년 선생의 사촌 하정공이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었다.

종택의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집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으로, 대문과 정자 그리고 사당 등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높은 석축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 기둥을 섞어서 지었다. 사대부 집의 공간영역을 갖추고 있으며 솟을대문과 정자 등 품위와 규모를 갖춘 종가로 전통 생활 도구도 비교적 날 남아 있다.

 퇴계기념공원 가는 길에 퇴계가 지은 '자명(自銘)' 비가 보인다.

이 '자명'은 퇴계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매화를 심다(種梅)', '대나무를 심다(種竹)' 시비를 지나고, 군자당을 지나 신축중인 선비문화체험 교육원을 지나 도산서원을 가기 위해 작은 야산 오솔길을 걸어 오른다.

퇴계가 도산서원 다니던 길

낙엽되어 떨어진 앙상한 나무가지 끝에 빨갛게 물든 나뭇잎 몇 장이 깊은 가을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

구불구불 낙엽쌓인 길을 걸으며 깊은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얕은 야산을 넘어 내려가니 도산서원이다.

 

 

 

  

 

 

'추로지향'(鄒魯之鄕)' 비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예로부터 예안과 안동을 추로지향이라 일컬은 것은 멀리 중국의 공자와 맹자가 살고 있던 추(鄒)와 노(魯) 두 나라에 비한 것이며 

이 말은 성인이 살고 있던 고장이란 뜻이다.

"鄒魯之鄕" 전서는 공자 77대 종손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 원장 재임시에 쓴 것이라 한다.

  

천광운영대

 

 

천광운영대에서 바라보니 낙동강 건너에 시사단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 

퇴계선생은 서원 경내를 중심으로 양편 산기슭이 절벽을 이룬 동쪽을 천연대(天淵臺) 서쪽을 운영대(雲影臺)라 불렀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글에서 따 온것이고, 운영대는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돌고 돈다.天光雲影共徘徊 라는 주자의 관서유감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도산서당 일대를 엄숙한 수도의 장으로 꾸며 천리의 묘용을 깊이 사색하고 자연의 심오한 참뜻을 깨우치기 위해 조성한 자연체험장이다.

 

 

천광운영대에서 바라보이는 시사단

 

 

  

천연대

 

 

 

시사단(試士壇)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정조(재위 1776∼1800)는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조판서 이만수에게 도산별과를 새로 만들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거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영의정 채제공의 글로 비문을 새기고 시사단을 세웠다. 그 뒤 순조 24년(1824)에 고쳐 세우고, 1974년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에서 지상 10m의 축대를 쌓아 그 위로 비각과 비를 옮겨지었다.

비명은 다음과 같다.'도산 물 양양히 흘러 그 위에 단이로다. 단에 계급이 있고 물엔 연원이 있나니 단에 오르고 물에 임함에 류를 따라 뜻을 펴노니 선생의 덕화요 임금님의 은혜로다' 

  

 

 

  

언덕에 올라 단풍나무 사이로 보이는 도산서원의 기와가 아름답다.

 

 

언덕에 올라 단풍나무 사이로 보이는 도산서원의 기와가 아름답다.

 

 

陶山書院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된 것으로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과 제자들이 향사하며 후학을 양성해 온 곳이다.

도산서원을 청량산에 세울까 이곳으로 할까 저울질하다 영지산을 뒤로 하고 동취병, 서취병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 안 강변 절경 

이곳으로 정했다고 한다.

선조가 이름을 내렸고, 편액은 동왕 8년(1575)에 석봉 한호가 어전에서 썼다 한다.

이 서원은 영남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원군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도산서원 앞 마당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거목 왕버들이 있다.

왕버들은 옆으로 누워 땅과 평행하여 길게 가지를 뻗고 있다.

낮은 자세, 겸양의 미를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

역경의 정괘 '정렬한천식'에서 의미를 취하였는데, 우물은 마을이 떠나도 옮겨가지도 못하고, 퍼내어도 줄지 않는다.

이처럼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해야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서원 대문을 들어선다.

머리를 시원하게 하여주는 향기가 미풍에 실려 온다.

오른쪽에 도산서당이 있고, 왼쪽에 농운정사 그리고 그 아래에 별채인 역락서재가 있다. 

이 건물들은 퇴계선생 생존시에 세운 집들이다.

앞쪽으로는 도산서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진도문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가져와 기념식수한 금송(錦松)이 있다.

붉은 속살을 들어 낸 하늘로 쭉 뻗은 미송이다.

  

 

 

몽천은 서원의 생활용수를 공급하던 곳으로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다.

 

 

 

싸리나무를 엮어서 만든 삽짝문 유정문(幽貞門)을 들어선다.

유정문은 '도를 실천하는 길이 탄탄하니 숨은 선비가 곧고 길하리라'는 뜻이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던 방은 '완락재(완락재)'라 하였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다.

퇴계선생은 이 서당에서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흔히 퇴계의 사상을 경(敬)이라 한다. 경이란 사람이 본성에 잠겨 있는 천리가 순조롭게 발현되도록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이리저리 헷갈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퇴계는 일생을 겸양과 성찰로써 경을 실천하였다."

  

 

 

퇴계 선생이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절우사(節友社)는 퇴계 선생이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가꾸던 화단이다.

퇴계 선생의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임종시에 마지막 남긴 말이  '저 매화나무에 물 주어라' 였다.

 

옥당억매(玉堂憶梅)

뜰에 있는 매화나무 한 그루 가지에 눈이 가득한데

바람과 먼지가 호수와 바다를 이루어 꿈마저 어지럽구나

옥당에 앉아 봄 밤의 달을 마주하니

기러기 우는 소리에 생각나는 바가 있도다.

 

재방도산매십절(再訪陶山梅十節)

 한 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퇴계 선생은 산과 강, 그리고 매화나무,소나무,대나무,국화,연꽃을 직접 가꾸며 벗하였다.

자연을 직접 체험하면서 인성과 기상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가꾸는 수행의 길을 스스로 걸었다. 

퇴계는 나무들이 어려움을 참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싹이 자라 성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살아가고 자연이 움직이는 원리를 발견하였다. 

산수를 즐기며 심기를 단련하면서 인성을 함양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수양의 도를 깨우쳐 주었다."

 

 동양에서는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대나무,그리고 매화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그 지조와 절개를 본받고자 하였다.

또한 매란국죽을 가리켜 사군자라 하여 그 고결,전아(典雅),냉초(冷초),견정(堅貞)의 품격을 찬상하였다.

소동파는 '매화는 추워도 빼어나고 대나무는 마르지만 오래산다'라고 하여 매화,대나무,돌을 세가지 유익한 벗(三益之友)로 삼았다. 

그러므로 사군자를 늘 가까이 하였다. 동양인들은 문살조차도 사군자를 조각하여 경각심을 높였다."

 

 

 

 

도산서원 정문인 진도문

'진도약퇴(進道若退)'   도에 나아가서는 물러서면 안된다는 뜻이다

진도문 동서로 두 채의 광명실 건물이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써 현판은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광명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 준다'는 뜻이다.

 

 

 

 

 

 

보물 제210호인 전교당은 퇴계 이황을 추모하는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된다.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여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나 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두었다.

대청의 윗부분은 연등천장으로 되어있다. 선조가 이름을 내린 현판의 글씨는 명필인 석봉 한호가 쓴 글씨라고 한다.

전면 좌우에는 도산서원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동재인 박약재와 서재인 홍의재가 있다.

 

  

 

 

장판각은 서원에서 찍어 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선조어필,퇴계선생문집,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상덕사 삼문(三門)

상덕사는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곳이다.

 

 

  

 

 

 

"도산서원은 사적 제 170호 문화재이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출입로는 원래의 모습과 달리 많이 바뀌었다. 

1969년 박정희 전대통령의 중요문화재 보호정책에 따라 정부에서는 도산서원을 보수하여 성역화하였다.

 

퇴계선생이 지은 '도산기'에 따르면 도산서원이 자리한 도산은 영지산의 한 줄기이며 옛날에 옹기굴이 있었기에 도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도산서원 진입로는 예안에서 송티재를 넘어 부내(분천)를 거쳐 애일당을 지나 굽이진 낙동강변에 늘어선 노송을 따라 비포장길을 

가다가 왼쪽편에 있었다.

 

곡구암을 중심으로 동쪽 산록인 천연대와 서쪽 산록인 운영대가 마주한 산길을 따라 서원을 올라 갔었다. 

주변 경치가 자연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웠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에 이르기까지 산수경관에 대해서는 퇴계선생이 지으신 '도산십이곡'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옛부터 송티재 안쪽 상계를 중심으로 사방십리를 계산십리라 불렀다. 

온혜를 비롯하여 웃토계(상계),하계,양평,계남,원촌,단사,천사,의인,섬마(섬촌),부포 등 십여 촌락이 있고 진성 이씨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 7년(1574)에는 사림의 발기로 서당위에도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이듬해 을해년에 낙성하였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퇴계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한 도산서당과 퇴계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숭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은 별개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야산 오솔길을 넘어 퇴계기념공원을 지나 토계리 쉼터에 도착한다.

 

 

  

 

 

계담가는 길의 전원 풍경이 아름답다. 산모룽이를 돌아가면 도산서원이 나올것 같은데 중간에 길이 끊긴 것으로 짐작된다.

도산서원에서 이 길로 나올려 문의하였으나 길이 없다하여 되돌아 나온바 있다.

강변이라 그런지 왕버들이 많이 보인다.

도로를 한참 걸으니 왼편 가파른 산능선 아래로 퇴계 이황의묘소 안내판이 보인다.

 

 

 

'양진암고지' 라고 쓰인 비석이 보인다.

양진암은 퇴계가 46세 때 지었으며 성리학에 전념했던 곳이다.

잘 조성된 가파른 계단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니 퇴계 이황선생의 묘소다. 

상석과 양쪽에 중국 동자머리를 한 석상 한쌍이 마주보고 있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묘비가 서 있다.

"퇴계 이황선생은 1501년(연산군7년) 11월25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태실)에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의 이름은 황,  자는 경호,  호는 퇴계,도옹.퇴도,청량산인 등이며 본관은 진성(진보)이다.

70세 되던 1570년(선조3년) 12월8일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유서에서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몸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본관과 조상의 내력, 입지와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이에 선생의 유언에 따라 조성된 이 묘소는 영남 유림들의 검소하고 소박한 묘 치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 쓴 묘비에는 퇴계 선생이 지은 自銘이 새겨져 있다.

자명(自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면서 부터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면서는 병도 많았네. 중년에 어찌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만년엔 어찌 외람되이 벼슬이 높았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 더 주어졌네. 벼슬길에 나감에 차질이 많으나, 물러나 숨어 살기를 뜻 더욱 굳혀졌네. 나라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진실로 성현 말씀 두렵구나. 산은 우뚝히 높고 또 높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흐른다. 시원스레 나부끼는 본래의 옷차림 모든 비방 씻어 버렸네. 나의 품은 뜻 이로써 막힘에 가슴 속 패물은 누가 완성해 줄까. 내가 옛 사람을 생각하며, 진실로 내 마음에 부합되누나. 어찌 내세를 알겠는가, 지금 세상도 알지 못하거늘.  근심속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네. 저 세상으로 떠나며 이 생을 마감하니, 여기 다시 무엇을 구할소냐."

 

 

 

하계마을은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는데 안동댐 건설로 이 마을이 수몰되었는데 이를 안타갑게 생각하여 

이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마을 옛터 언저리에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하계마을로 들어서면 흙으로 지은 담배건조장이 보인다.

이 담배건조장 옆 세멘트 길을 따라 오르면 이육사 시상지 쌍봉.윷판대에 다다른다.

 

  

 

 

묘지 옆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며 하계마을과 너른 들을 조망된다.

 

 

 

 

 

 

 

언덕을 올라 오솔길을 한참 걸어 가니 쌍봉,윷판대다.

 

 

 

쌍봉.윷판대에 서서 앞을 보니 원천리 너른 들과 낙동강 물돌이와 하얀 모래톱이 보인다.

육사가 이곳에서 시상(詩想)했다는 광야를 읊어 본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募)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天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윷판대를 지나 오솔길(광야 오솔길, 또는 광야 시상길)을 계속 걸어가 '윷판대가는 길(광야시상지 1km)' 이정표가 서 있는 곳으로 내려서니,

이육사 문학관 가는 아스팔트 고갯길이다.

 

 

 

이육사 문학관을 향하여 걸어 간다.

길섶에는 쑥부쟁이가 청초히 피어 있다.

마른 잎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분다.

텅텅 빈 들녘을 바라본다.

 

 

 

 

절정 시비 앞 너럭바위에 앉아 책을 들고 만추의 들녘을 바라보는 안경 낀 이육사의 모습이 보인다.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이육사(李陸史, (1904.5.18 - 1944.1.16)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이다.
경북 안동군 도산면 출생  본관은 진성(진보),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문학관 뒤로 복원된 이육사의 생가 '육우당'이 바라보인다.

 

이육사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을 나오면서 이 근처에 음식점이 있느냐고 직원에 물으니 청량산 입구까지 없다고 한다.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한잔 뽑아 마시고 출발한다.

 

 

 

 

단천교에 도착하니 정오를 가르키고 있다.

녀던길(옛길) 안내판이 보인다.

단천교를 건너지 않고 강 옆길을 따르니,  왼편으로 축대위 빗돌에는 '녀던길'이라 써 있다. 

 

 

 

 

낙동강 강변 기슭에는 쑥부쟁이가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맑은 강물과 흰 모래톱을 바라보며 걷는다.

멀리 청량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 멀리서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

고즈넉한 들길에서 들리는 닭울음소리는 울림이 크고 신비롭기만 하다.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

 

 

 

 

 

 

 

백운지 미천장담

청량산을 굽굽이 돌아나온 낙동강이 이곳에서는 고요히  아름답게 흐른다.

멀리 청량산 육육봉이 바라 보인다.

彌川長潭을 보고 퇴계가 가만 있을리 없다.

 

한 참 동안 기억하여 보네, 어릴 때에

여기서 낚시하던 일을

삼십 년 긴 세월 동안에

속세에서 자연을 등지고 살았네

내 돌아와 보니 알아볼 수 있네

옛 시내와 산모습을

시내와 산은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리라

나의 늙은 얼굴을 알아보지는

 

전망대에서의 녀던길은 두 개의 길로 갈린다. 

퇴계가 걸었던 길을 따르기 위해 전망대 아래로 내려가 강변길을 따라 관란헌을 거쳐 농암종택으로 가는 수변길을 택한다.

청량산을 바라보며 억새와 갈대숲을 헤치며 걸어간다. 

산 기슭 밑에 민가 두채가 보인다.

퇴계가 소시적에는 숙부를 따라 청량산에 공부하기 위해 걸었던 길이고,  노년에는 지팡이 끌며 걸었던 미천장담 수변길을 걷는다.

잔잔히 흐르는 물은 맑고 푸르다.

                       

 

 

 

 

공룡발자국 풍혈을 지나니 관란헌이다.

넘실넘실 넘어 가는 저 이치 어떠한가

이와 같구나 일찍이 성인께서 탄식하셨네

본래부터 도의 본체 이것으로 볼 수 있으니

공부 중간에 끊어지는 일 많지 않게 하려므나

 

 

 

 

 

 

 

 

 

수직 절벽이 학소대

 

 

농암종택 앞 수변에서 본 학소대

 

학소대는 한속담 상류의 수직 절벽을 가르키며 천연기념물인 오학(먹황새)이 서식한다.

 

'의지의나무'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나무

 

 

'의지의나무'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나무

암벽 바위사이에 뿌리를 박은 둥걸을 보면 수 많은 세월을 견디고 이겨 온 의지의 화신처럼 보인다.

 

경암(景巖)

 

 

학소대를 지나고 조금 내려가니 강가에 납작한 돌 서너개가 보인다.  이다

景은 '크다'는 의미로 경암은 '큰바위'란 뜻이다.

퇴계가 청량산 가는 길에 쉬었다 간 곳이라 전해진다.

퇴계는 또 경암을 두고 시를 읊는다.

 

 천 년을 두고 물살을 받으나

어찌 삭아 없어짐이 있겠는가?

물결 가운데 우뚝 우뚝히 서 있으니

그 기세 씩씩함을 다투는 듯

사람들의 발자취란

꼭 물에 뜬 부평초 줄기 같으니

다리를 굳게 세움 누가 능히

이 가운데 있음만 하리오?

 

단풍이 물든 메마른 잎,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가지 사이로 난 농암종택 가는 애일당 아래의 오솔길은 그림같은 길이다.

 

농암종택 가는 애일당 아래의 오솔길

 

 

 

 

 

 

벽력암

 

 

농암종택 앞 강건너 절벽은 벽력암이고 그 아래가 한속담이다.

한속(寒粟)은 추울 때 몸에 돋는 소름을 말하는데 이 못의 물이 너무 서늘하여 이러한 이름이 생긴 것으로 추측되며, 

한속담 뒤 바위에서는 찬 기운이 솟아난다 한다.

벽력암(霹靂巖)은 절벽의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치듯하여 ‘벼락소’라 했다.”는 이야기와,

“강원도의 뗏목들이 여기에오면 벼락치는 소리를 하며 절벽에 부딪치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농암종택 솟을 대문을 들어서 이곳 저곳을 답사한다.

올미재를 넘으려다 가송마을 강변에 있는 월명담을 보기 위해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월명담(月明潭)

 

 

월명담(月明潭)은 달이 밝게 비춰져서 월명담,월명소,월명당이라고 한다.

낙동강 절벽에 부딪쳐서 깊은 소를 이루며, 옛부터 전해 오기를 이곳 깊은 못에 용이 있기 때문에 가뭄이 심하면 고을 수령이 백성들을 

위해 용떡을  만들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한다.

 

 

 

 

유장히 흐르는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멀리 우측 수직절벽 옆으로 고산정이 보이고 맞은편으로 고산이 보인다.

 

 

 

고산정( 孤山亭)

 

 

고산정( 孤山亭)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斷崖)아래에 자리잡은 고산정은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한 성재 금난수가 지었는데 원래 이름은 日東精舍였다. 

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퇴계는 이 정자를 누차 찾아와 시를 읊고 경치를 완상하였다 한다.

 

고산정에서 지은 퇴계의 시 '서고산벽(書孤山壁)'이다

 

日洞主人琴氏子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隔水呼問今在否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耕夫揮手語不聞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愴望雲山獨坐久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고산정 옆의 층암절벽을 학소대라 부른다.

가송리에는 있는 또 다른 학소대는 농암종택 옆에 있다.

쏘두리 마을을 지나 35번 국도로 나선다.

 

 

 

 

 

 

낙동강 따라 걷다보니  '어서오십시요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고장 봉화군입니다' 안내판이 청량산을 배경으로 높이 달려있다.

길섶의 모과나무에는 누렇게 익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광석나루에 다다른다.

강건너 수직절벽에는 인공으로 조성한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06:50분 농암종택에서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 이곳 청량산 입구 광석나루터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약 9시간 정도 걸었다.

아침 점심도 건너 뛰었으니 지치고 배도 고프고 하여 식당에 들어 식사하고 숙소를 정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잔뜩 낀 서산에 해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