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봉화 청량산을 오르다

2010. 11. 24. 02:27나를 찾아 걷는 길/퇴계의 발자취를 찾아 걷다

(4) 봉화 청량산을 오르다

     2010.11.12.   맑음

 

 

淸凉山歌 시비

 

淸凉山歌    -   李滉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따라 가지 말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淸凉山 (870m)

봉화 청량산은 영암 월출산, 청송 주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중의 하나이며,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택리지」에서 보면 백두대간의 8대 명산 외에 대간을 벗어난 4대 명산 중 하나로 평가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 명산이다. 청량산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와 남쪽으로는 안동시 도산면‧예산면과 접하고 있는 해발 870m의도립공원이다. 청량산의 원래 이름은 수산(水山)이었으나 청량사 주위가 특히 절승이어서 청량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낙타 타 자를 써서 타자산(駝子山)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산 봉우리들이 낙타의 혹과 흡사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곳의 석질은 진안 마이산과 같은 수성암이어서 화강암 봉우리처럼 날카롭지가 않고 부드럽게 봉긋봉긋 솟아 있어 포근하고 미려하다.

 

청량산은 12峯, 12臺, 8窟,4井가진 바위 산이다.

해발 800m 내외에 12개 암봉 (六六峰) 은 장인봉, 선학봉, 자란 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탁립봉, 금탑봉, 축융봉이고, 12대는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며, 8 굴은 김생굴,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 굴, 감생굴이며, 4정은 총명수, 청량약수, 감로수, 김생폭인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옛날 이 산에는 50개소에 달하는 사찰과 암자들이 있었고  수도승 일천 여 명이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현존하는 사찰로는 청량산 중심에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 대사가 창건한  청량사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금탑봉 아래에 683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응진전이 있다. 또한 '동방의 주자' 퇴계 이황이 머물면서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도산십이곡을 쓴 청량정사가 있다.

퇴계 이황은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현재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청량산은 퇴계뿐만 아니라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 등의  명사가 찾아와 수도했던 산이며, 자연경관과 더불어 그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숱하게 남아 전설처럼 전해온다. 청량산 남쪽 축융봉에는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몽진 시 머무르며 축조하였다는 산성 흔적과 마을 주민들이 공민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 남아 있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뿌리고 있다.

간밤에 천둥과 번개 바람 불고 비가 내린 요란스러운 밤이었나 보다.

낙엽이 비에 젖어 처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으슴프레한 새벽 06:40분 숙소를 나서니 비는 그쳤으나 운무가 약간 끼어 있다.

옛날에는 광석나루터에서 배로 건너야 했던 길을 금일에는 청량교로 편히 건넌다.

새벽안갯속의 단풍빛은 나름의 운치가 있다.

청량폭포를 지나고 이끼 낀 계곡을 따라 1시간여 걸어 오늘의 산행 출발점 입석에 도착한다.

 

                                   

청량폭포
입석

나무계단 길을 오른다.

산길을 한참을 걸어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금탑봉 중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응진전이 보인다. 

 

돌 축대위에 세워놓은 기왓장에 '수행 중'이라 쓰여 있는 無爲堂엔 스님의 자취는 보이지 않고,  조금 더 가니 금탑봉 중간 절벽 

동풍석 아래에 있는 응진전에서도 스님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옷 속을 파고 들며  강하게 불던 바람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응진전 마당에 들어서니 신기하게도 바람 한점 없이 아늑하고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하다. 

법당 앞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광석나루에서 걸어왔던 길이 아스라이 조망되고 봉긋봉긋한 청량산 봉우리들이 조망된다.

 

 

절벽아래의 응진전
응진전 : 응진전 뒤 절벽위에 동풍석(動風石)이 있다

 

동풍석 설화

어느스님이 좋은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자리를 찾았다. 다만 바위 하나를 치워야 했다. 

그래서 힘센 스님이 절벽

아래로 그 바위를 밀어 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보니 떨어진 바위가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절을 짓지 않았다.

현재 응진전 뒤 높은 절벽 위에 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세게 밀어도 건들거리지만, 한 사람이 밀어도 건들거리고 

바람이 불어도 건들거릴 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動風石이라 부른다.

 

                                                                 

응진전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금탑봉 중간 절벽 동풍석 아래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석가삼존불과 16 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16나한과 더불어 고려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요사채 옆의 절벽 사이에는 감로수가 흘러나오고 법당 앞에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주세붕은 자신의 자를 따서 경유대(景遊臺)라 이름하였다.

 

경유대에서의 조망

응진전 돌담을 끼고 돌아가니 총명수, 그리고 어풍대다 

 

총명수(聰明數)

 

 

총명수(聰明數)

금탑봉 중층에는 신라 말 대문장가 최치원에 관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잇다.

치원암.총 명수.풍혈대 등이 있는데, 그 중 총명수는 최치원이 마신 뒤 더욱 총명해졌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천길 절벽이 상하로 우뚝 솟은 곳에서 물이 일정하게 솟아나는데, 가뭄이나 장마에 상관없이 그 물의 양이 일정하다고 한다.

이 물을 마시면 지혜와 총명이 충만해진다고 하여 예로부터 과거준비를 하던 선비들은 물론,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총명수 바로 옆은 최치원의 이름을 딴 치원암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오염이 되어 마실 수 없다.

 

 

 

금탑봉 중층에 있는 어풍대(御風대)는 내 청량과 외청량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청량지'의 기록에 따르면. 열어구(列御寇 : 고대 중국의 인물)가 바람을 타고 보름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어풍대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중층에는 어풍대아 함께 이원대. 풍혈대. 요초대. 경유대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들 대에서는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연꽃 같은 봉우리와 연꽃 꽃술에 자리한 듯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어풍대에서 조금 더 가서 노송 뒤로 보이는 청량사의 전경 또한 일품이다.

 

어풍대에서 조금 더 가서 노송 뒤로 보이는 청량사의 전경

 

금탑봉을 돌아 산길을 오르니 경일봉과 김생굴 가는 양갈래 길이 나온다.

원래는 김생굴 들렸다 경일봉을 오르는 산행을 계획하였으나, 경일봉 오르는 길은 '입산금지'라고 커다란 현수막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자소봉으로 바로 가기로 한다.

 

김생굴(김生窟)

경일봉 중층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 김생(771-?)이 글씨를 연마하던 장소인데, 상하가 절벽으로 되어있고 

그 중앙으로 수십 명을 수용할 만한 반월형의 자연암굴로 형성되어 있다.

김생은 이 굴 앞에 암자를 짓고 10여 년간 글씨 공부를 하여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김생필법'을 확립하였다.

그는 당시 왕희지체, 구양순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서법을 구사함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서풍을 이끌어 

냈으며, 이로 인해 해동서학의 종조로 여겨져 한국서예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굴 앞으로는 김생암 터가 남아 있으며, 굴 옆으로는 천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김생폭포가 위치하고 있다.

 

김생과 청량봉녀 설화가 전해진다.

김생이 경일봉 아래 바위굴에서 글씨공부에 전념한 지 9년 만에 명필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고 하산하려 하였다. 

그때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글씨 솜씨를 겨루어보자고 제의하였다. 

그 처녀는 바로 청량봉녀였다.

김생은 처녀의 제의를 수락하여 굴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윽고 불을 켠 뒤 비교해 보니 처녀가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하였는데, 김생의 글씨는 그만큼 고르지 못하였다. 

이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이 1년을 더 연마하여 10년을 채운 뒤 명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고 한다.

  

갈수기인지라 김생폭포의 장관을 볼 수가 없어 유감이다.

여름 장마철에 오면 김생폭포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생폭포 굴 앞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회색 암벽을 배경하고 있어 녹색의 나뭇잎이 너무도 싱그러워 보인다.

김생폭포 앞 나무에는 목판에 쓴 류희지의 김생굴 시화가 걸려 있다.

 

金生窟-柳熙之

 

金生健筆世爭傳

此地耽眞問幾年

古穴荒凉人不見

至今遺跡尙宛然

 

김생의 웅건한 글씨 대대로 다투어 전해졌으니

묻노니, 여기서 공부한 것이 몇 년인고

옛터 황량하고 사람도 없지만

지금 그 유적은 오히려 완연하네

 

김생굴

 

김생폭포와 이름 모르는 나무의 싱그러운 녹색 나뭇잎

 

김생굴을 지나 자소봉을 향한다.

많은 계단과 철계단을 오르면 자소봉이다.

자소봉 너럭바위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자소봉(紫宵峰) 일명 보살봉 840m

 

탁필봉(卓筆峰)  820m
연적봉(硯滴峰)  846m

 

연적봉 표지석

 

연적봉에서의 전망 또한 대단하다.

연적봉 정상에서 배낭을 풀고 소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 청량산의 기봉(奇峰)들을 완상 한다.

청량산이 우리나라 3대 기악 중의 하나임을 알 것만 같다.

월출산이 다소 험하게 느꼈다면 이곳 청량산은 부드럽고 미려하게 느껴진다.

청량산 전체가 거대한 한송이 연꽃으로 비유된다.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  맨 우측 봉우리가 최고봉 장인봉이다

 

청량산 하늘다리

 

해발 800m 지점의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를 건넌다.

연장 90m, 폭 1.2m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량이다.

 

 

청량산 최고봉 장인봉(870m)이다. 의상봉이라고도 한다.

 

청량산 최고봉 장인봉(870m)이다. 의상봉이라고도 한다.

장인봉 표지석 뒷면에는 주세붕의 '登淸凉頂' 시가 새겨져 있다.

 

 登淸凉頂  - 周世鵬

 我登淸凉頂 兩手擎靑天白日正臨頭 銀漢流耳邊府視大瀛海 有懷何錦錦更思駕黃鶴 遊向三山嶺
 

정상에 올라 - 주세붕

 청량산 꼭대기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이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장인봉 표석 : 청량산 최고봉 장인봉(870m)이다. 의상봉이라고도 한다.

 

장인봉 표지석 뒷면에는 주세붕의 '登淸凉頂' 시가 새겨져 있다 .

 

 

장인봉에서는 나무가 있어 조망처로는 적당치 않으며 조금 더 가면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

 

장인봉을 올랐다 되돌아와 뒷실고개에서 청량사로 하산한다.

  연꽃의 꽃수술에 해당하는 유리보전 앞마당에 서서 사방에 피어 오른 연꽃잎 봉우리를 바라본다.

거대한 연꽃 봉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아늑하고 편안하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온다.

눈을 시리게 하고, 푸르게 한다.

심신을 맑게 씻어 준다.

서쪽으로 옥소봉 문수봉 반야봉 의상봉 연화봉  동쪽으로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보살봉) 금탑봉이 솟았고 남쪽으로 축유봉이 둘러서 있다.

연꽃 봉우리에 둘러싸인 유리보전 심검당 심우당 범종각 등 많은 당우와 삼각우총 소나무와 오 층 석탑이 보인다. 그 뒤로 금탑봉이 화려하다.

삼각우총 소나무아래 의자에 앉아 청량산을 완상 한다.

 

  

유리보전

 

유리보전 주련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 

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 

한 생각에 한없이 긴 세월도 널리 관하니     

오고 감은 물론이고 머무름도 또한 없도다.   

이와 같이 삼세의 일 모두 안다면   

모든 방편 뛰어넘어 심력 갖춘 부처님 이루리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다. 청량산에는 연대사라는 절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했던 곳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약사전이라고도 한다. 늘 바람이 세찬 산골짜기의 한쪽에 나지막하게 지어졌는데, 법당 앞이 절벽이라 마당이 좁은 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 琉璃寶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삼각우총(三角牛塚)

청량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뿔이 셋 달린 소의 무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청량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남민(南敏)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기르던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뿔이 셋 달렸으며, 차차 자라남에 따라서 크기가 낙타만 하고, 힘이 세며 사나워서 부려먹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량사 주지가 남민의 집을 찾아가서 절에 시주하도록 권하여 승낙을 받았다.

 

크고 힘세며 고집이 많은 이 뿔이 셋 달린 소는 절에 온 후 차츰 고분고분해져 연대사(蓮臺寺)와 암자(庵子)의 석축을 쌓는 데 소요되는 

돌을 운반하거나 절에서 소비하는 나무를 운반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준공을 하루 앞둔 어느 날, 뿔이 셋 달린 이 소가 죽었으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절 앞에다 묻고 묘를 만들어 주니 그 자리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묘는 현재 청량사 법당의 축대 아래에 있다.

 

가지가  셋 인三角牛塚  소나무

 

 

범종각 뒤로 연화봉이 보인다

 

범종각 뒤로 금탑봉이 보인다.

 

내려가는 길에는 전통찻집 '오산당'마당에 있는 이젤 캔버스에는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시가 적혀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청량산인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머니 먼 나라의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연기 가늘게 피어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오후의 햇살이 내리는 단풍 든 구불구불한 계곡길을 내려선다.

 

 

단풍 숲에 파묻혀 있는 청량정사와 산꾼의 집을 거쳐 입석으로 내려선 후 광석나루로 향한다.

청량정사   오산당이라고도 부른다

                                                                  

송재 이우(1469∼1517)가 조카인 온계와 퇴계, 조효연 등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그 뒤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머물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황(1501∼1570)은 ‘동방의 주자’라 불릴 만큼 뛰어난 성리학자이며 평생을 검소하게 살다 간 사람이다.

그는 숙부인 이우를 따라 이곳에 와서 학문을 익혔다.

또한 여기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국문 시 가인 ‘도산십이곡’을 지었다고 한다. 

청량정사 담장 옆에는 산꾼의 집이 있다

                              

청량신 입구 시비에 있는 퇴계 이황의 '독서여유산'을 읊조려 본다

 

讀書如遊山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淺深得處摠由渠      얕고 깊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미를 알게 되고

行到源頭始覺初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絶頂高尋免公等      높이 절정을 찾아감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하여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퇴계는 13세 때 숙부인 송재에게 학문을 배우기 집에서 청량산까지 50리 강변길을 오갔으며, 훗날 수 차례 이 길을 오가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며 사랑했다.

48세 때 그는 청량산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등산'이라는 시를 읊었다.

 

登山

尋幽越濬壑    그윽한 곳 찾느라고 깊은 골을 넘어가고

歷險穿重嶺    멧 숲을 거듭 뚫어 험한 데를 지났노라

無論足力煩    다리 힘이 피로함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

且喜心期永    마음 기약 이룩됨을 기뻐하곤 하였노라

此山余高人    이 메의 솟은 양이 높은 사람 흡사하여

獨立懷介耿    한 곳에 홀로 서서 그 생각 간절코녀

  

퇴계는 말년에 청량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산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또 읊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청량산 육육 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청량산 산행의 시작은 입석부터 시작하여 응진전 -김생폭포 김생굴- 경일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자란 봉- 선학봉- 장인봉을 올랐다가

되돌아 나와 뒤실고개에서 청량사로 하산한 뒤, 시간이 되면 청량사- 청량정사 산꾼의 집 -입석으로 다시 나와 축융봉을 올라 청량산 전체를 

조망한다면 훌륭한 산행코스가 될 것 같다

이번 산행에서 입석까지 다시 나왔지만 축융봉 오르는 것은 그만두었다.

시간과 체력은 충분히 남아 있었지만 여백을 남겨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