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동 천등산 봉정사. 개목사를 찾다

2010. 11. 16. 19:03나를 찾아 걷는 길/퇴계의 발자취를 찾아 걷다

(2) 안동 천등산 봉정사. 개목사를 찾다    

봉정사 버스종점에 내리니 오후의 햇살이 천등산 기슭을 길게 비추고 있다.

 

 

봉정사 버스종점에 내리니 오후의 햇살이 천등산 기슭을 길게 비추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경사진 오르막 길을 올라가다 일주문 못 미쳐 왼편으로 널따란 반석 위로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 너머로 정자가 있다.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현종 6년(1665)에 사림(士林)들이 건립한 누각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落水臺'였으나, 육사형의 시에 나오는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비천수명옥)라는 시귀에 따라 '鳴玉臺'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

 

15세 어린시절 퇴계 이황은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에 묵으며 공부를 하면서 자주 이곳 명옥대에 가서 쉬었다고 한다. 
퇴계는 풍광이 수려한 명옥대를 잊지 않고  50년 뒤인 1566(병인)년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다음 해인 1567(정묘)년 여름에 퇴계의 門人 6인이 함께 이곳에 와서 놀면서 숲을 헤치고 대를 쌓고 시를 지어 퇴계의 뜻을 추모하면서 

폭포 옆 바위에 ‘鳴玉臺’라는 세 글자와 그 내력(內譯)을 새겼다.
그 후 현종(顯宗) 1664(갑진)년에는 후학들이 선생의 자취가 서린 이곳을 기리기 위해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창암정사(蒼巖精舍)를 

창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번의 개축(改築)이 있었다.  

 

"『명옥대사적』에 실린「봉고사우문(奉告士友文)」에 의하면 1664년에 일용재(一慵齋) 김시침(金時忱)․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낙고(洛皐) 이이송(李爾松) 공을 비롯한 사문(斯文) 장로(長老) 십여 분이 의논하여 약간의 재물(財物)을 내고 원근의 도움을 받아 정자를 

3년 후 1667(정미)년에 건립하니 퇴계선생이 대(臺)의 이름을 고치고 시(詩)를 지은 지 꼭 1백 년 만이었다. "

 

 

명옥대

 

 

푸른 이끼가 낀 바위라는 이름의 蒼巖精舍 현판  鳴玉臺 현판도 보인다

 

 

 

명옥대에서 바라 본 바위에서 떨어지는 낙수

 

 

 

퇴계 門人 6인이 모여 바위에 새긴 '鳴玉臺' 각자

 

 

천등산 봉정사 일주문 옆 산자락에는 국화꽃 노란 물결로 물들어 있다.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일대는 전국 최대의 국화재배단지다.

'花原'이라는 옛 지명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토질(마사토)과 일교차 일조량등이 국화가 자생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다.

국화차는 건강장수차로 알려져 있다.

 

 

 

 

 

 

국화꽃물결을 따라 한 바퀴 돌며 국화꽃 향기를 맡는다.

천등산 봉정사 일주문

이제 봉정사 경내로 들어선다.

울울한 참나무 숲에는 단풍이 물들어 있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은 더욱 깊은 가을의 색깔을 보여준다.

 

 

국화향기(菊花香氣) - 서정주

 

국화 향기 속에는 고향이 깔리네.
아내여 노자 없어 우린 못 가고
아들하고 딸한테 미뤄 당부한
고향의 옛 산천이  깔려 보이네.

 

국화 향기 속에는 열 두 발 상무.
한국의 멋쟁이 농부라야만
국으로 쑥으로 공짜로라도
하늘에 그만큼한 짱구머리 춤일세.

 

국화 향기 속에는 미어진 창호지.
그 사이 스며드는 서리 찬 바람.
약도 없이 앓으시는 우리 어머님
약 없이도 나을 거라 누워 계시네.

 

 천등산 봉정사(天燈山 鳳停寺)!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남쪽 기슭에 자리 한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이곳에 내려앉아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극락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창건한 후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하여 왔다고 한다. 본사에 10동, 동.서 2개의 암자에 9동 등 총 건평 500여 평이나 되는 안동에서 제일 큰 고찰이다.

 

사찰 경내에는 1972년 해체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확인된 극락전(국보제15호),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웅전(국보 제311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등의 건물들이 있는데, 고려시대의 건물과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들이 나란히 있어 우리나라 건축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외에도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건립한 삼층석탑이 있고 만세루,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영산암, 지조암이 있다.

 

천등산 봉정사 일주문

 

 

 

 

참나무 소나무가 서 있는 언덕 위 축대 뒤로 만세루가 보인다.

120년 수령의 휘어진 소나무를 지나니 돌계단 위로 '천등산 봉정사' 현판이 걸린 고색창연한 만세루가 우뚝 서 있다.

 

 

 

 

'  천등산 봉정사' 현판이 걸린 만세루

 

 

 

 

 

 

 

높은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만세루 밑으로 난 문에 당도한다.

고색이 느껴지는 기둥과 구부러진 문턱 돌계단 너머로 대웅전 편액과 격자무늬살 문이 보인다.

천 년 고찰의 향기가 피어나고 있다.

마음도 몸도 진한 향기에 젖어 고개 숙여 계단을 오른다.

 

봉정사(鳳停寺) 만세루(萬歲樓)                            

변 준 석

 

안동 봉정사에는 만세루만 있더라.

대웅전도 극락전도 없고,

만세루만 있더라.

일주문을 지나 언덕배기 올라서면 첫눈에 들어오는 만세루.

단청 하나 없어도 첫눈에 반하는 만세루.

돌계단을 걸어올라 만세루 아래를 지날 때,

사람들아 마땅히 머리 숙여라.

마음 숙여라.

고개 뻣뻣이 들고 들어오다가는,

마음 뻣뻣이 들고 들어오다가는,

천장에 이마 부딪히리라.

마음 부딪히리라.

문지방에 발 걸려 마음 걸려 꽈당 탕 넘어지리라.

 

대웅전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그림자가 드리운 대웅전은 단아한 고찰의 향기를 풍긴다.

대웅전의 격자무늬살 문이 기품 있어 보인다.

대웅전에 들어 부처님께 삼배한다. 

보개형 닫집 천판에는 두 마리의 운룡이 그려져 있다.

법당 가운데 양 기둥에는 기둥을 감고 오르는 용문양이 그려져 법당을 장엄하고 있다.

불단을 장엄한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연당초 문양은 고격스럽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국보 제311호)

 

"중심 법당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에는 단청이 잘 남아 있어 이 시대 문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건실하고 힘찬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어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봉정사의 정전(正殿)으로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건물(建物)로 추정된다. 주칸(柱間)의 창문(窓門)이나 벽체 등 일부가 초창후(初創後) 변경되었으나 골격은 전형적인 다포양식(多包樣式)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공포(공包)의 힘있고 가식없는 수법(手法)은 초기의 다포양식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건물 내부(內部)에서 가구형식(架構形式)이나 세부기법에서도 외부와 같이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公法)이 초기의 다포양식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단청(丹靑)은 창건(創建)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적(高麗的) 요소(要素)를 지니고 있어 건물(建物)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繪畵資料)로 주목되고 있다."    (문화재청)
대웅전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보개형 닫집과  천판에 그려진 용

 

 

법당 기둥에 그려진 용문양

 

 

 

불단의 연당초 문양

 

  

2층 누각형태의 이 건물은 원래 덕휘루(德輝樓)로 불렸으나 언제부터 만세루(萬歲樓)로 바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대웅전은 화엄강당과 무량해회(無量海會)를 양옆에 만세루를 앞에 거느리고 있다. 만세루에는 법고와 목어가 걸려 있다. 봉정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다. 툭 터인 전망이 보이지는 않는다.만세루에는 만추의 저녁 햇살이 빛나고 있다. 법고가 장엄하게 서 있다. 머지않아 저녁 예불 때 법고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만세루에서 법고 치는 스님의 모습이 보고 싶다.

 대웅전 계단을 내려 화엄강당을 돌아가니  아담한 마당 삼층석탑 뒤로 극락전이 보인다. 정면 가운데 칸에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통풍과 채광을 위한 창문을 내었는데 이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은 고검당과 화엄강당을 양 옆으로 거느리고 있다.극락전 옆에는 '안정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 제15호)

 

이 건물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1972년에 실시한 보수공사 때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 후 첫 수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며, 그 뒤 조선 인조 3년(1625)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다. 원래는 대장전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의 고격(古格)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돌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했으며, 전면과 후면 중앙칸에 판문을 달았고 양쪽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다. 불당의 중앙 뒤쪽에 2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극락전

 

 

시계 방향으로 고검당  극락전  화엄강당

 

 

극락전  옆모습과  '안정사 석조여래좌상'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극락전과 건립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봉정사 고검당 (보물 제449호)

이 건물은 극락전 앞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복원 전에는 북쪽 지붕 모양도 달랐고 방 앞쪽에 쪽마루가 있었으며 칸마다 외짝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구조가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받고 있는 문화재이다.

고검당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8호)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다.『양법당중수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지었을 때 화엄강당도 함께 고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 부재들이 다른 기법과 섞여 절충형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인데 대웅전보다 간결한 형태의 장식성을 사용하였다. 또한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이기 때문에 기둥은 낮지만 공포를 크게 잡아 겉모습의 균형을 살리고 있다. 2칸은 방이고 1칸은 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방 사이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측면 중앙에 사각기둥 1개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으며, 그 사이에 창을 내었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중앙에 사각기둥 1개를 세워 대들보를 떠받치록 하였으며 그 사이에 창을 내었다

 

 

빗살무늬문,  띠살문이 같은 건물에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무량해회 옆을 돌아 뒷문으로 나가 조금 걸으니 높은 돌계단 위로 영산암이 보인다.

석양으로 나무 그림자가 돌계단에 드리우고 나뭇잎은 붉게 물들어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장소이다.

 

 

  

봉정사 영산암(靈山庵)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부속암자로, 응진전. 염화실.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 관심당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료를 볼 때 19세기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이 전체적으로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폐쇄적인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3단의 마당 구성과 우화루의 벽체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 등에서 폐쇄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우화루 송암당의 건물 구조와 삼성각 앞의 조경등에서 매우 뛰어난 공간 처리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영산암 입구에 해당되는 우화루의 현판은 원래극락전 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고 전한다. 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 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우화루 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른다.

 

 

 

                                              

우화루의 벽체를 헐어 송금당과 요사채를 복도로 연결하였다.

 

 

 

송암당

정갈한 고택같이 느껴지는 영산암.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은 곳이다.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천등산 등산로 개목사 가는 이정표를 따라 산길을 오른다.

 

 

약 30여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소나무 숲 사이로 개목사가 보인다

하얗게 핀 억새길을 걸어 개목사에 도착한다

 

 

 

천등산 개목사

 

"개목사는 신라 때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 온다. 

의상이 산 정상 근처의 큰 바위 아래에서 수도를 하는데, 하늘에서 큰 등불이 비춰주어 99일 만에 도를 깨치게 되었다.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99칸 절을 짓고, '하늘이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사라고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정몽주가 이 절에 와서 공부를 했다고 하며, 조선 초에 맹사성이 안동 부사로 와서 중수했다. 1969년 원통전을 수리할 때 발견한 상량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1457년에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맹사성이 "안동지방에 장님이 많으니'開目寺'라고 하면 장님이 안 생길 것'이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안동 개목사 원통전(開目寺 圓通殿) (보물 제242호)

 

원통전(圓通殿)은 조선 세조(世祖) 3년(1457)에 건립되었다 한다. 

측면(側面)에서 볼 때 전면(前面)으로 퇴칸은 달아 맞배지붕의 박공면이 전면으로 길게 나와 있다. 

공포는 전(前), 후(後) 면이 다른 수법(手法)으로 되었는데 전면은 출목(出目) 없이 익공형(翼工形)으로 조각되었고, 

후면은 1출목을 두어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게 하였다. 

내부는 연등천장으로 상부(上部)가 노출(露出)되었으며 초각(草刻)한 파련 대공(波蓮臺工)과 솟을대공을 두어 종도리(宗道里)를 받게 하였다. 

솟을대공 수법 역시 고식(古式)의 하나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건실한 가구(架構) 수법으로 건축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주심포계(柱心包系) 양식(樣式)의 특징을 보여주면서 일부 후세(後世)에 보완(補完)된 흔적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 하나의 

건축양식인 익공계(翼工系)와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통전에 앞에 설치된 툇마루

 

 

산신각

 

 

요사채

 

 

새로 건립한 요사채

원통전 요사채 산신각만 있는 단출한 절이다. 옛날 99칸의 영화로웠던 대사찰 천등사가 현재는 가난해 보이는 단촐한 절로 바뀌어 있다. 천등산 기슭의 넓은 터, 그리고 시원한 앞 전망은 대사찰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지전리 버스 정류장에 최대한 접근하기 위해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길을 부지런히 걸어 내려간다. 안동의 야산을 조망하며 어둑어둑 해지는 길을 30분 정도 걸어 내려가니 마을회관 앞에 버스가 정차해 있다. 여기가 가야마을버스종점이다. 여기까지 버스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고,  버스시간도 몰랐다. 운 좋게 막차 버스에 탑승하여 안동시내 숙소에 든다. 여행자는 종일 이곳저곳을 답사하며 온몸이 지쳐서 숙소에 들어가야 하루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