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9. 15:28ㆍ시 모음/시
오월의 숲속에선 저절로 일렁이네
고 재 종
비 오고 활짝 개인 날인데도
오늘은 우체부조차 오지 않는
이 쓸슬한 자리보전
떨치고 뒷산 숲속에 드니
일렁이는 게 생생한 바람인지
제 금보석을 마구 뿌리는 햇살인지
온갖 젖은 초록과 상관하는 것인데
은사시, 자작나무는 차르르 차르르
게느삼, 수수꽃다리는 흐느적 흐느적
왕머루, 청미래덩굴은 치렁치렁
일렁이는 것이 당연할 뿐,
여기서 제 모자란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랑이여, 나 저절로 일렁이네
오월 숲속에선 뻐꾸기 한나절 호곡도
가슴 깊숙이 녹아내릴 뿐
세상은 너무 억울하지도 않네
그렇다네,
세월이 잠깐 비껴난 숲에서
일렁이는 것들이 진저리치다
산꿩의 썽썽한 목청을 틔울 때
사랑이여,
난 이 지상의 외로움
조팝꽃 그 쌀알 수만큼은 녹이겠네
아니아니
또르르륵 또르르륵 굴리는
방울새는 은방울꽃을 흔들고
핑핑핑 크루루 하고 쏘는
흰눈썹황금새는 산괴불주머니를 터뜨린다면
다만 이것들의 신기한 재주에 놀라
흐린 눈 동그랗게만 떠보아도
마음의 환한 자리 하나 어찌 못 얻으랴
그 누구라서 농축된 외로움 없으랴만
저 잎새 하나하나로 좀 녹여본다면
계곡의 물소리로 흘러본다면
어느 시인은 저 찌르레기 소리를
쌀 씻어 안치는 소리라 했지
오늘은 이팝나무꽃에다 솓아붓는군
또 금 주고 사고 싶은 저 금붓꽃의
이파리엔 정녕 어찌 하지 못할 뿐
이 오월 숲의 초록 절정,
이 생생한 일렁임과
아득히 젖어오는 그 무슨 은총과
목숨의 벅찬 숨결 한 자락이
쟁명한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순간을
무척은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없을 때
사랑이여,
나는 내 생의 죄업을
저만치 밀어둘 참이네
그렇다네,
서러울 것 하나 없이
서러움도 가득 일렁이는 오월 숲에서
비껴난 세월을 다시 깨우치는 물소리에
서러움도 그만그만하게 여겨질 때까지
사랑이여,
나 오월 숲에서
천지를 우러러 사랑의 길을 묻네
사랑이라서 무슨 거룩한 게 아닐 테지만
저 일렁이는 것들이 하루 몽땅 저물어
머루빛 속 은하수로 일렁인다면
나 그만큼은 드높아야 하네
드높아서는 세상의 길 잃은
사랑의 길을 한껏 비추며
그대로 한번쯤 지워져도 좋을 일이라면
이 설레는 숲에서 저절로 일렁여도
그 무슨 산통 깨는 일은 아닐테지
저봐,
이젠 어스름 속의 잎새들이
서로의 숨결을 뽑아내 서로를 속삭여주듯
내 아픈 몸의 우선한 것으론
저 무덤 앞의 제비꽃이라도 일별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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