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가사문학의 산실 남면을 걷다

2009. 12. 27. 13:35도보여행기/원림과 정자문화의 담양을 찾다

(3) 가사문학의 산실 담양군 남면을 걷다

  2009.12.23. (수)  맑음

 

 

 

 

 

배낭을 꾸려 숙소를 나서니 시간은 07: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오늘도 나는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을 버리고, 마을길을 선택한다.

도보여행자의 특권이기도 하고 또한 마땅히 선택하여야 할 길이기도 하다.

오강리 강촌마을 길로 접어들어 소로의 마을길을 걸어간다.

 

                     

 

 

며칠전 많이 내린 눈과 강추위로 인하여 얼어서 녹아내린 배추밭이 보인다.

'안복자한과' 집 담을 끼고 마을길로 걸어간다.

막다른 골목길 느낌이 든다. 

하얀 개들이 이리저리 다닌다. 

낯선 객이 왔는데도 짖지를 않는다. 유순하고 착해 보인다.

할머니들이 대문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산덕리 가는 길을 물으니 손끝으로 가리키며 계속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고 한다.

 

                        

 

 

소로의 마을길을 한참 걸어 나가니 과연 마을이 끝나고 들길이 나타난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들에는 하얀 잔설이 깔려 있다.

싸늘한 아침 기온이라 그런지  청량한 아침 기운을 느끼는 들길이다.

안개내음 산내음을 맡으며 들길을 걷는다.

'산내음 촌닭 식당'앞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명옥헌원림 이정표가 나온다.

후산회관앞에 도착한다.

회관 앞에 조그만 저수지가 있는데 수령이 268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고, 저수지 둘레에도 느티나무가  서 있다.

            

수령이 268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

 

 

 

 

저수지를 지나 조금 마을길을 걸어가니, 후산리 은행나무와 명옥헌원림가는길 이정표가 서 있다.

 

                       

후산리 은행나무

 

 

 

 

鳴玉軒苑林에 가기 위해 한참을 걸어 오른다.

   

鳴玉軒苑林

 

 

 

         

 

         

 

 

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  

명승 제58호로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오희도의 넷째아들 오이정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글을 읽고 많은 저술을 남긴 별장터다. 우암 송시열은 그의 제자 오기석을 아끼는 마음에 명옥헌이라 이름 짓고 계곡 바위에 새겼다. 이후 오기석의 손자 오대경(1689-1761)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앞뒤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는 적송과 백일홍을 심었다.

 

8월에 연못 주위와 연못속 섬에 있는 백일홍나무에 꽃이 피면 참으로 아름다울 것 같다.

들길을 다시 걷는다.

창평현령비총각을 지나 걸어 가니 증암천을 만나고 다리를 건너니 887번 도로와 만난다.

이제부터는 달리는 차에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며 걷는다.

 

우측 광주댐을 지나 왼편 학구당을 지나 경사진 고개를 넘어서니 '가사문학의 산실 남면'이라는 경계석이 보인다.

나는 이제 '가사문학의 길'을 걷고 있다.

 

"담양군 남면 일대 특히 광주호 상류 부근은 무등산과 가장 가깝고 별뫼(星山)라는 아담한 산을 뒤로 끼고 있으면서 특별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별뫼 일대는 중앙정계로부터 낙향하거나 절연한 유학자들이 은거하는 생활공간이었다. 특이한 정자와 원림들이 조영되었으니 이른바 별서(別墅)이다. 별서란 살고 있는 살림 집 외에 경치 좋은 터를 골라 따로 마련한 일종의 별장으로 보통의 경우 자신의 시골집 인근에 원림을 조성하고 정자 

건물을 세우는 형식을 취한다. 가운데 방에는 온돌을 설치하여 기숙과 휴양을 같이 하는 일상의 생활터가 되게 하였다. 별서 지역을 대표하는 원림으로 소쇄원과 식영정과 환벽당을 꼽는다. 이 세원림은 자미탄(환벽당과 식영정을 잇는 구름다리 아래 양 길섶에 심어 놓은 배롱나무가 있는 내라고 붙인 이름)을 중심으로 2km 이내에 위치하며, 환벽당과 식영정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다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다.  이 세원림은 같은 시기인 15세기 중반에 경영되어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예술적 향기가 높은 문학작품들의 산실이 되었다.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문학그룹은 '星山歌壇'이라 지칭하고 이 지역을 '歌辭文學圈'이라 이름 붙였다."

 

식영정(息影亭) 앞에 도착한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담양 식영정(息影亭) 일원       명승 제57호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김성원은 이 정자 옆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석천은 이곳에서 '식영정 20 영'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이들 네 명을 '식영정사선'이라 불렀다. 이런 이유로 식영정을 '사선정'이라 달리 부르기도 했다. 정철은 이곳 승경을 무대로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시가를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건물의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식영정은 197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관광객 일원과 함께 계단길을 오른다.

노송이 반겨준다.

 

 

 

성산별곡 시비 뒤는 울울한 송림이다. 그 뒤가  별뫼(星山)이다.

식영정 현판이 달린 뜰앞에 서면 왼쪽 멀리 무등산이 보이고,  정면 둘러 쳐진 적송사이로 광주호가 바라보인다.

 

 

식영정

 

 

"임억령의 자는 대춘(大椿), 호는 석천(石川)이다.
임억령은 정자 이름을 짓는데도 시인다운 남다름이 있었다. 

息影亭이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서, 그가 쓴 「식영정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莊子에 나온,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나서, "그림자는 언제나 본형을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연법칙의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처지에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슬퍼하고 성내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꼭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바람 타고 조화옹과 함께 어울리어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다. 
그러니 식영정이라 이름짓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라고 말했다.
임억령은 성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주제로 식영정 이십영(息影亭二十詠)과 서하당 팔영(八詠)을 비롯하여 수백 수의 시를 지었다.

식영정 이십영에 대해서는 송순은 화답시를 지었으며 고경명, 김성원, 정철은 차운시를 남겼다.
송강(松江)은 이것을 밑바탕으로 하여 전원 가사의 으뜸이 되는 '성산별곡'을 창작하여 송강가사의 산실 노릇을 하였다. 

이외에도 식영정을 출입했던 인물들을 보면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옹 양산보, 옥봉 백광훈, 
송익필 등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식영정 앞의 이소나무는 한 마리의 용이 꿈틀대며 하늘을 날아오르는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이곳 식영정에서 보는 자미탄 해넘이 광경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광주댐 건설로 광주호가 생겨 자미탄의 옛 모습은 거의 살아졌으나, 노을 붉은빛이 광주호에 반영되면 식영정 앞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해넘이 광경도 훌륭하다고 한다.

 

 

최근에 복원한 김인후가 식영정과 함께 지었다는 서하당이다.
연못터에1972년에 복원한 부용당이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을 옮겨 본다.

 

 성산별곡(星山別曲)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청문의 옛일이 지금도 있다 하겠구나.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청문의 옛일이 지금도 있다 하겠구나.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 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 삼고 잠 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사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조물주가 일을 즐겨 옥으로 꽃을 만들어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려 얼고 외나무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 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바로 옆의 가사문학관을 관람한다.

 

"가사(歌辭)는 시조(時調)와 더불어 한국 고시가의 대표적 장르이다. 그 형식은 1 음보 4 음량에 1행 4 음보라는 기본 율격을 지닌 유장(悠長)한 운문체로서 노래·읊조림·율독의 형태로 향유되었다. 발생 시기는 대체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지었다는 서왕가(西往歌)와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은 그 발생기를 가늠하는 초기의 작품으로 주목된다. 조선 중기 이후 가사는 사대부층에 의해 폭넓게 향유되면서 사대부 시가문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강호 자연생활에서 몸에 밴 물아일체적(物我一體的) 삶을 비롯하여 명승지의 유람·유배의 체험·유교적 이념의 구현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송순(宋純)과 정철(鄭澈)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면앙정가(仰亭歌)와 성산별곡(星山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을 통해 사대부가사의 절정을 이룬 작가들이다. 조선 후기 사회를 지나면서 가사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에는 사대부 위주였던 향유 계층이 서민과 여성 등으로 확대되면서 서민가사와 여성가사가 새롭게 성행하였으며, 작품의 내용도 전쟁·기행·역사·산업·애정·현실 비판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또 개화기에는 종교가사·개화가사 및 의병가사 등이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가사는 점차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차차 창가 또는 현대시로 옮겨지는 길을 걷게 되었다. "

 

소쇄원 가는 길에 음식점을 겸한 민박집이 보인다.

소쇄원 입구에 도착한다.

소쇄원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명승 제40호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 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瀟灑翁)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霽月堂(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光風閣(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소쇄원매표소를 지난다.

瀟灑園! 맑고 깨끗한 정원!

소쇄원 오르는 길의 울울한 대숲이 먼저 마음을 맑고 시원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

    

 

 

 

 

계곡을 따라 걸으니 연못이 두 개가 보이고,  대봉대가 나타난다.

 

 

 

대봉대(待鳳臺)는 시원한 벽오동나무의 그늘에 앉아 봉황새(귀한 손님)를 기다리는 집이다.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동대桐臺‘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대봉대

대 앞에는 대나무 열매가 많고
대 뒤에는 오동나무 그늘 지우네.
천년 동안 대는 홀로 있는데
어느 때나 봉황은 내려올는지.

 

 

 

대봉대 옆 작은 연못에 물을 대는 나무 홈대가 보인다.

 

 

 

 

 흙담장에는 오곡문, 애향단이라고 쓴 목판 석판이 정답게 주고받는 말처럼 담벼락에 박혀있다.

 

 

 

계류를 건너니 두 계단으로 된 매단 위 흙담장에 '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문패역할을 하고 있다.

 '소쇄공 양산보의 초라한 집'이라고

    

 

오곡문 밖에는 오암(鰲巖)과 오암정(鰲巖井)이 있고 계류의 물이 유입되는 곳이다.

 

 

 

 

오곡문을 지나온 계곡물은 다섯 번 굽이쳐 오곡류를 이루고, 조담에 잠시 머문 다음 폭포로 떨어진다. 일부의 계곡물은 나무 홈대를 지나

연못으로 모이고, 넘친 물은 수차를 돌리며 계곡으로 떨어진다.

나의 눈에는 이 바위도 흡사 자라형상을 하고 있다.

 

 

 

그 옆 계류를 따라 내려서면 손님들이 묵어 갔던 사랑방 광풍각이 있다.

광풍각(光風閣)은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이다.

제월당이 주인을 위한 집이라면 광풍각은 손님을 위한 사랑방 구실을 하던 집이었다.

상량문에 의하면 이 광풍각은 1597년에 불에 타버린 것을 1614년 4월에 중수하였다고 기록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고 중앙 1칸은 온돌방으로 뒷면에 아궁이가 있다. 문은 들어 열개문으로 되어있다.

광풍각에서 계단을 올라서 작은 문을 들어서면 소쇄원의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제월당으로 이어진다.

霽月堂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다.

 

 

이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사적 제304호로 지정된 제월당에는 김인후의 '소쇄 48 영시' 현판이걸려있다.

 

                        

 

사적 제304호로 지정된 제월당에는 김인후의  '소쇄 48 영시

김인후(金麟厚,1510-1560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인촌 김성수의 선조가 된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 편〉 등이 있다. 김인후가 죽고 나서 수년 뒤 이웃에 사는 오세억이란 사람이 죽었다가 하루 만에 살아났는데, 죽어서 자미궁(紫微宮)이란 곳에 갔더니 자미선으로 있는 김인후가 명부를 보며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정조는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였다.

 

 

 

 河西 金麟厚의 소쇄원 48詠

 

제1영 작은 정자의 난간에 의지해 小亭憑欄11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는 물소리 들려라
瀟灑園中景
渾成瀟灑亭
擡眸輪颯爽
側耳廳瓏玲

 

제2영 시냇가의 글방에서 枕溪文房11
창 밝으니 방안의 첨축들 한결 깨끗하고
맑은 수석엔 책들이 비춰 보이네
정신들여 생각하고 마음대로 기거하니
오묘한 계합 천지 조화의 작용이라네
窓明籤軸淨
水石暎圖書
精思隨偃仰
竗契入鳶魚

 

제3영 높직한 바위에 펼쳐 흐르는 물 危巖展流11
흐르는 물은 바위를 씻어 내리고
하나의 돌이 개울에 가득하네.
가운데는 잘 다듬어졌으니
경사진 절벽은 하늘의 작품이로다.
溪流漱石來
一石通全壑
匹練展中間
傾崖天所削

 

제4영 산을 등지고 있는 거북바위 負山鼇巖11
등뒤엔 겹겹의 청산이요,
머리를 돌리면 푸른 옥류(玉流)라
긴긴 세월 편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대와 각이 영주산 보다 낫구나.
背負靑山重
頭回碧玉流
長年安不抃
臺閣勝瀛州

 

제5영 위험한 돌길을 더위 잡아 오르며 石逕攀危11
시냇물 돌을 씻어 흘러내리고
한 줄기 바위 온통 골짜기에 깔렸는데
한 필의 비단인가, 날리는 폭포 그 가운데 펼쳤어라
멋있게 기울어진 낭떠러지 하느님이 만든 거라네

 

제6영 작은 연못에 고기떼 놀고 小塘魚泳11
네모진 연못은 한 이랑도 되지 못되나
맑은 물받이 하기엔 넉넉하구나
주인의 그림자에 고기떼 헤엄쳐 노니
낚싯줄 내던질 마음 전혀 없어라
方塘未一畝
聊足貯淸猗
魚戱主人影
無心垂釣絲

 

제7영 나무 홈통을 뚫고 흐르는 물 刳木通流11
샘 줄기의 물 홈통을 뚫고 굽이쳐 흘러
높낮은 대숲 아래 못에 내리네
세차게 쏟아져 물방아에 흩어지고
물 속의 인갑들은 잘아서 들쭉날쭉 해

 

제8영 물보라 일으키는 물방아 舂雲水碓11
온종일 줄줄 흐르는 물의 힘으로
찧고 찧어서 절로 공을 이루네
직녀성이 짜놓은 베틀의 비단
조용히 방아소리를 따르네.
永日潺湲力
舂來自見功
天孫機上錦
舒卷擣聲中

 

제9영 통나무대로 걸쳐 놓은 높직한 다리 透竹危橋11
골짜기에 걸쳐서 죽림으로 뚫렸는데
높기도 하여 하늘에 둥둥 떠있는 듯
숲 속의 연못 원래 빼어난 승경이지만
다리가 놓이니 속세와는 더욱 멀어졌네
架壑穿脩竹
臨危似欲浮
林塘元自勝
得此更淸幽

 

제10영 대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千竿風響11
하늘 가 저 멀리 이미 사라졌다가
다시 고요한 곳으로 불어오는 바람
바람과 대 본래 정이 없다지만
밤낮으로 울려 대는 대피리 소리
已向空邊滅
還從靜處呼
無情風與竹
日夕奏笙篁

 

제11영 못 가 언덕에서 더위를 식히며 池臺納凉11
남쪽 고을은 무더위가 심하다지만
이 곳만은 유달리 서늘한 가을
바람은 언덕 가의 대숲에 일고
연못 물 바위 위에 흩어져 흐르네
南州炎熱苦
獨此占凉秋
風動臺邊竹
池分石上流

 

제12영 매대에서의 달맞이 梅臺邀月11
나무숲 쳐내니 매대는 확 트여서
달 떠오는 때에 더욱 알맞아
구름도 다 걷혀감이 가장 사랑스러운데
차가운 밤이라 아름다운 매화 곱게 비추네
林斷臺仍豁
偏宜月上時
最憐雲散盡
寒夜暎氷姿

 

제13영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보며 廣石臥月11
나와 누우니 푸른 하늘에 밝은 달이라
넓은 바위는 바로 좋은 자리가 됐네
주위의 숲에는 그림자 운치 있게 흩어져
깊은 밤인데도 잠 이룰 수 없어라
露臥靑天月
端將石作筵
長林散靑影
深夜未能眠

 

제14영 담장 밑구멍을 뚫고 흐르는 물 垣竅透流11
한 걸음 한 걸음 물을 보고 지나며
글을 읊으니 생각은 더욱 그윽해
사람들은 진원을 찾아 거슬러 가지도 않고
부질없이 담 구멍에 흐르는 물만을 보네
步步看波去
行吟思轉幽
眞源人未沂
空見透墻流

 

제15영 살구나무 그늘 아래 굽이도는 물 杏陰曲流11
지척에 물줄기 줄줄 내리는 곳
분명 오곡의 구비 도는 흐름이라
당년 물가에서 말씀하신 공자의 뜻
오늘은 살구나무 가에서 찾는구나
咫尺潺湲池
分明五曲流
當年川上意
今日杏邊求

 

제16영 석가산의 풀과 나무들 假山草樹11
인력을 들이지 않고 만든 산이지만
조물造物이라 도리어 석가산 됐네
형세를 좇아 우거진 숲을 일으켰구나
역시 산야 그대로 이네.
爲山不費人
造物還爲假
隨勢起叢林
依然是山野

 

17영 천연의 소나무와 바윗돌 松石天成11
높은 뫼에서 굴러 내린 조각 바위들
뿌리 얽혀 서있는 두어 자 소나무
오랜 세월에 몸엔 꽃을 가득 피우고
기세 곧아서 하늘 높이 솟아 푸르네
片石來崇岡
結根松數尺
萬年花滿身
勢縮參天碧

 

제18영 바윗돌에 두루 덮인 푸른 이끼 遍石蒼蘚11
바윗돌 오랠수록 구름 안개에 젖어
푸르고 푸르러 이끼 꽃을 이루네
흔히 구학을 즐기는 은자들의 본성은
변화함에는 전연 뜻을 두지 않는다네
石老雲煙濕
蒼蒼蘚作花
一般丘壑性
絶義向繁華

 

제19영 평상바위에 조용히 앉아 榻巖靜坐11
낭떠러지 바위에 오래도록 앉았으면
깨끗하게 쓸어가는 계곡의 시원한 바람
무릎이 상한 데도 두렵지 않아
관물하는 늙은이에겐 가장 알맞네
懸崖虛坐久
淨掃有溪風
不怕穿當膝
便宜觀物翁

제20영 맑은 물가에서 거문고 비껴 안고 玉湫橫琴11
소리내는 거문고 타기 쉽지 않는 건
세상에는 종자기같은 친구 없어서라
맑고 깊은 물에 한 곡조 울리고 나면
마음과 귀만은 서로 안다네
瑤琴不易彈
擧世無種子
一曲響泓澄
相知心與耳

제21영 빙빙도는 물살에 술잔 띄워보내며 洑流傳盃11
물살 치는 돌 웅덩이에 둘러앉으면
소반의 술안주 뜻한 대로 넉넉해
빙빙 도는 물결에 절로 오고가니
띄우는 술잔 한가로이 서로 권하네
列坐石渦邊
盤蔬隨意足
洄波自去來
盞斝閒相屬

 

제23영 긴 섬돌을 거닐며 脩階散步11
차분히도 속세를 벗어난 마음으로
소요하며 섬돌 위를 구애 없이 걷네
노래할 땐 갖가지 생각들 한가해지고
읊고 나면 또 희로 애락의 속정 잊혀지네
澹蕩出塵想
逍遙階上行
吟成閒

 

제24영 홰나무 가 바위에 기대어 졸며 倚睡槐石11
몸소 홰나무 가의 바위를 쓸고서
아무도 없이 홀로 앉아 있을 때에
졸다가 놀래어 일어서는 건
의왕에게 알려질까 두려워서라
自掃槐邊石
無人獨坐時
睡來驚起立
恐被蟻王知

 

제25영 조담에서 미역을 감고 槽潭放浴11
맑은 조담 깊어도 바닥이 보이고
미역을 감고나도 맑기는 여전해
미덥지 않은 건 인간 세상이라
염정을 걷던 발 때도 씻어버리네
潭淸深見底
浴罷碧粼粼
不信人間世
炎程脚沒塵

 

제26영 다리 너머의 두 그루 소나무 斷橋雙松11
콸콸 소리내며 섬돌 따라 흐르는 물
다리 너머에 두 그루 소나무 서 있네
옥이 나는 남전은 오히려 일이 분주해
그 다툼은 조용한 여기에도 미치리라

 

제27영 낭떠러지에 흩어져 자라는 소나무와 국화 散崖松菊11
북쪽의 고개는 층층이 푸르고
동쪽 울타리엔 점점이 누런 황국이라
낭떠러지 장식하여 여기저기 심어 있고
세밑 늦가을 풍상에도 버티고 섰네
北嶺層層碧
東籬點點黃
緣崖雜亂植
歲晩倚風霜

 

제28영 받침대 위의 매화 石趺孤梅11
매화의 신기함을 바로 말하려거든
모름지기 돌에 꽂힌 뿌리를 보아야 해
맑고 얕은 물까지 겸하고 있어
황혼이면 성긴 그림자들 드리우네
直欲論奇絶
須看揷石根
兼將淸淺水
疎影入黃昏

 

제29영 좁은 길가의 밋밋한 대나무들 夾路脩篁11
눈에 덮인 대 줄기 곧아서 창창하고
구름에 싸인 대 끝 솔솔바람에 간드러지네
지팡이 짚고 나가 묵은 대껍질 벗기고
띠를 풀어서 새 줄기는 동여준다네

 

제30영 바위틈에 흩어져 뻗은 대 뿌리 迸石竹根11
흰 대 뿌리 티끌에 더럽혀질까 하면서도
시시로 돌 위에 뻗어 나오네
어린 대 뿌리 몇 해를 자라났는고
곧은 마음은 오랠수록 더욱 모질다네
霜根牌染塵
石上時時露
幾歲長兒孫
貞心老更苦

 

제31영 낭떠러지에 집 짓고 사는 새 絶崖巢禽11
벼랑 가에서 펄펄 나는 새
때때로 물 속에 내려와 노네
마시고 쪼는 건 제 심성 그대로요
본디 잊었다네, 백구와 저항하기를
翩翩崖際鳥
時下水中遊
飮啄隨心性
相忘抵白鷗

 

제32영 저물어 대밭에 날아드는 새 叢筠暮鳥11
바위 위 여러 무더기의 대나무 숲
상비의 눈물 자국 아직도 남았어라
산새들 그 한을 깨닫지 못하고
땅거미 지면 제 깃 찾아들 줄 아네
石上數叢竹
湘妃餘淚班
山禽不識恨
薄暮自知還

 

제33영 산골 물가에서 졸고 있는 오리 壑渚眠鴨11
하늘이 유인에게 부쳐준 계책은
맑고 시원한 산골짜기 샘물이라네
아래로 흐르는 물 모두 자연 그대로라
나눠 받은 물가에서 오리 한가히 조네
天付幽人計
淸冷一澗泉
下流渾不管
分與鴨閒眠

 

제34영 세차게 흐르는 여울물가의 창포 激湍菖蒲11
듣자니 여울 물가의 창포
아홉 마디마다 향기를 지녔다네
날리는 여울 물 날로 뿜어대니
이 한가지로 염량을 꿰뚫는다오
聞說溪傍草
能含九節香
飛湍日噴薄
一色貫炎凉

 

제35영 빗긴 처마 곁에 핀 사계화 斜簷四季11
정작 꽃 중의 으뜸으로 치는 사계화
사시로 청화함을 갖추어서인가
초가지붕 비스듬해 더욱 운치 있어라
매화와 대나무도 곧 알아준다네
定自花中聖
淸和備四時
茅塹斜更好
梅竹是相知

 

제36영 복숭아 언덕에서 맞는 봄 새벽 斜簷四季11
복숭아 언덕에 봄철이 찾아드니
만발한 꽃들 새벽 안개에 드리워 있네
바윗골 동리 안이라 어렴풋하여
무릉계곡을 건너는 듯하구나
定自花中聖
淸和備四時
茅塹斜更好
梅竹是相知

 

제37영 오동나무 언덕에 드리운 여름 그늘 桐臺夏陰11
묵은 오동 줄기 바위 벼랑까지 이어 있어
우로의 혜택이라 항시 맑게 그늘지네
순임금의 은혜 길이길이 밝혀져서
온화한 남풍 지금까지 불어주네
巖崖承老幹
雨露長淸陰
舜日明千古
南風吟至今

 

제38영 오동나무 녹음 아래 쏟아지는 폭포 梧陰瀉瀑11
무성한 나뭇가지 녹엽의 그늘인데
어젯밤 시냇가엔 비가 내렸네
난무하는 폭포 가지 사이로 쏟아지니
돌아보건대 봉황새 춤추는 게 아닌가
扶疎綠葉陰
昨夜溪邊雨
亂瀑瀉枝間
還疑白鳳舞

 

제39영 버드나무 물가에서의 손님 맞이 柳汀迎客11
나그네 찾아와서 사립문 두드리매
몇 마디 소리로 낮잠을 깨었네
관을 쓰고 미처 인사드리지 못했는데
말 매놓고 버드나무 물가에 서 있네
有客來敲竹
數聲驚晝眠
扶冠謝不及
繫馬立汀邊

 

제40영 골짜기 건너편 연꽃 隔澗芙蕖11
조촐하게 섰는 게 훌륭한 화훼花卉로다
한가로운 모습 멀리서 볼 만하고
향긋한 기운 골짝을 건너와 풍기네
방안에 들이니 지란보다 더 좋구나
淨植非凡卉
閒姿可遠觀
香風橫度壑
入室勝芝蘭

 

제41영 연못에 흩어져 있는 순채 싹 散池蓴芽11
장한이 강동으로 귀향한 후로
풍류를 아는 이 그 누구던고
반드시 사랑하는 농어회 같이하지 않더라도
기다란 순채 싹 맛보고자 하네
張翰江東後
風流識者誰
不須和玉膾
要看長氷絲

 

제42영 산골물 가까운에 핀 백일홍 櫬澗紫薇11
세상엔 무성히 자란 꽃이라도
도무지 열흘 가는 향기 없다네
어찌하여 산골 물가의 배롱나무만은
백일 내내 붉은 꽃을 대하게 하는고
世上閒花卉
都無十日香
何如臨澗樹
百夕對紅芳

 

제43영 빗방울 떨어지는 파초잎 滴雨芭蕉11
어지러이 떨어지니 은 화살 던지는 듯
푸른 비단 파초잎 높낮이로 춤을 추네
같지는 않으나 사향의 소리인가
되레 사랑스러워라. 적막함 깨뜨려 주니
錯落投銀箭
低昻舞翠綃
不比思鄕廳
還憐破寂寥

 

제44영 골짜기에 비치는 단풍 映壑丹楓11
가을이 드니 바위 골짜기 서늘하고
단풍은 이미 서리에 놀래 물들었네
아름다운 채색 고요하게 흔들리니
그 그림자 거울에 비친 경치로다
秋來巖壑冷
楓葉早驚霜
寂歷搖霞彩
婆娑照鏡光

 

제45영 평원에 깔려 있는 눈 平園鋪雪11
산에 낀 검은 구름 깨닫지 못하다가
창문 열고 보니 평원엔 눈이 가득
섬돌에도 골고루 흰눈 널리 깔리어
한적한 집안에 부귀 찾아들었네
不覺山雲暗
開窗雪滿園
階平鋪遠白
富貴到閒門

 

제46영 눈에 덮인 붉은 치자 帶雪紅梔11
듣건대 치자꽃 여섯 잎으로 핀다더니
사람들은 그 자욱한 향기 넘친다 하네
붉은 열매 푸른 잎과 서로 어울려
눈서리에도 맑고 곱기만 하여라
曾聞花六出
人道滿林香
絳實交靑葉
淸姸在雪霜

 

제47영 애양단의 겨울 낮맞이 陽壇冬午11
애양단 앞 시냇물 아직 얼어 있지만
애양단 위의 눈은 모두 녹았네
팔 베고 따뜻한 볕 맞이하다 보면
한낮 닭울음소리가 타고 갈 가마에 들려 오네
壇前溪尙凍
壇上雪全消
枕臂延陽景
鷄聲到午橋

 

제48영 긴 담에 써 붙인 소쇄원 제영 長垣題詠11
긴 담은 옆으로 백 자나 되어
하나하나 써 붙여 놓은 새로운 시
마치 병풍 벌려 놓은 듯하구나
비바람만은 함부로 업신여기지 마오
長垣橫百尺
一一寫新詩
有似列屛障
勿爲風雨欺

 

 

소쇄원 답사를 끝낸 후  식사를 위해 '전라도 떡갈비'집에 도착하니 12:40분을 가리키고 있다.

 

                         

 

 

'돼지떡갈비'를 주문하니 밥을 위시해 19개 그릇의 반찬이 나온다.

이제 나는 취가정, 환벽정, 개선사지 석등을 답사하면 이번 도보여행을 끝마치게 된다.

창계천을 건너  언덕 위를 오르는 계단을 밞고 취가정에 오른다.

 

                        

 

      

 

 

취가정(醉歌亭)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충장공 김덕령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고종 27년(1889)에 김만식을 비롯한 후손들이 세웠다.

취가정이란 이름은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한 김덕령장군이 술에 휘한 모습으로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즉 김덕령장군이 취했을 때 부른 노래라는 뜻으로 취가정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취가정에서 내려와 따라 담장을 따라 오솔길을 걸어간다.

.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성산별곡 중에서>


환벽당 오르는 작은 대문 앞  쌍송 앞에 정쳘의 '성산별곡 시비'가 서 있다.

시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釣臺

이 낚시터는 옆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조대쌍송(釣臺雙松)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아래 흐르는 창계 물은 소를 이루고 여기서 뱃놀이도

행해졌다고 한다.

 

                        

 

 

조대쌍송(釣臺雙松)과 용소(龍沼) 모습이다.

환벽당에서 잠을 자던 조윤재의 꿈속에 창계천 용소에서 용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잠을 깨어 내려와 보니 소년(정철)이 멱을 감으며 놀고 

있었다는 곳이다. 이러한 만남으로 인해 김윤제는 정혈을 집에 머물게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때까지 학문을 닦게 해 준다.

 

 

 

                        

 

 

널찍한 바위 조대 옆면에 '釣臺'와 '止水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환벽당에 가기 위해 대문을 들어서 계단을 걸어 오른다                 

                        

 

 

 

                        

 

 

환벽당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한다.

환벽당(環碧堂)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환벽당(環碧堂)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   소재지: 북구 충효동

 

조선 명종 때 沙村 金允悌(1501-1572)가 세운 정자이다.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환벽당'이라는 이름은 申潛이 지었다고 한다. 나주목사 등을 지낸 김윤제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곳으로, 정철이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머무르며 공부하였다는 유래를 간직하고 있다.

가까운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한 마을의 세 명승'이라 일컬어진 문학활동의 주요 무대로서, 송순. 김인후. 김성원. 정철. 백광훈 등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정자 아래에는 김윤제와 정철의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전설 서린 조대와 용소가 있다.

 

 환벽당 뒤쪽으로 소나무  대나무가 울울히 푸른 장막을 두르고 있다.

 

                        

 

 

환벽당 앞을 흐르는 창계천에는 예전에는 구름다리가 있었고,  양길섶에 배롱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자미탄은 토사에 많이 메꾸어져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조대쌍송이 멀리 바라보인다.

 

이제 나는 마지막 답사처 '개선사지 석등'을 찾아 나선다.

자미탄을 바라보며 걷는다.

자미화(배롱나무, 백일홍)가 자미탄 길섶에 화려하게 붉은빛을 토해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떠 올리며 걷는다.

자미탄 다리(지금은 충효교)를 건너면 식영정이다.

지금의 충효교 직전에 좌측으로 길을 잡는다.

이 길로 계속 가면 무등산 중턱 기슭을 돌아 광주로 가는 길이다.

광주호 생태공원 입구를 지나고, 수리마을을 지나 조금 가니 '개선사지 석등 1.8km'   이정표가 나온다.

좁은 소로로 진입하여 오르락내리락 우측으로 광주호를 바라보며 20여분 걸으니, 언덕 아래 논밭 속에 홀로 서 있는 석등이 보인다.

 

                        

 

 

 

 

 

       

 

 

                        

 

       

 

 

 

 

개선사지 석등(開仙寺址 石燈) 

보물 제111호로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위치하고 있다.

 

석등은 절 안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뿐 아니라 부처님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하부가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높이 3.5m 8각의 火舍石은 각 면마다 직사각형의 창을 뚫었으며, 각 창의 양편에 해서로 136자의 명문을 적어 놓았다. 1 행서 6행까지는 신라 경문왕과 그 왈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절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명문에 쓰인 龍紀 3년이란 891년(통일신라 진성여왕 3)에 해당하므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등의 규모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려했던 옛 사찰의 모습은 간데없고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 버린 곳에 석등만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망연히 탑을 우러러보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諸法無常!

 

 2박 3일간의 죽향(竹鄕)의 담양,

원림과 정자문화의 담양 도보여행을 끝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