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三派水의 발원지 속리산 天王峰

2014. 10. 20. 08:59나를 찾아 걷는 길/세속을 여읜 산, 속리산을 오르다

세속을 여읜 산, 속리산을 오르다

 (3) 三派水의 발원지 속리산 天王峰

  

깎아지른 병풍석이 둘러선 상환암(上歡庵)

 

어젯밤은 이따금 불 켜진창문에 벌레들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비로산장 앞을 흐르는

금강골 계류의 물소리 마저  잠을 자는 듯 들리지 않는 호젓한 밤이었다.

깊은 산중이라  새벽도 늦게 찾아온다.

어슴프레 밝아지는 방문을 열고 나서니 눕지 않고 밤을 지새운 가문비나무가 초롱초롱 해맑다.

간단히 조반을 해결하고 새벽 산길 위에 선다.

 

태실이 바라다 보이는 계곡 다리를 건너 상환암을 향한다.

우람한 붉은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용비늘 같은 껍질을 어루만지며 하늘로 까맣게 자란 소나무를 올려다 본다.

 

그대는 거문고 안고 큰 소나무를 의지하나니

큰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요

나는 길게 노래하며 푸른 물가에 앉나니

푸른 물은 맑고 빈 마음이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내가 그대로다

< 淸虛歌 -  청허 휴정 >

  

은폭동이 있을법한 무성한 나뭇잎으로 덮인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을 내려다본다.

상환암 동남쪽에  있다는  은폭동(隱瀑洞) 폭포는 깊은 굴속에서 폭포가 떨어지기 때문에 물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린다고 한다.

이를 두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시를  읊었다.

 

물이란 넘실넘실 흐르는 건데

너는 어이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세상 사람들이 더러운 발 씻을까 두려워

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네

 

두 갈래로 갈라져 자란 노거수 느티나무가 보인다.

이끼 낀 거대한 바위,  울울한 나무숲이 만드는 어두음, 아름드리나무들이  속리산 깊은 산 맛(深山味)이다.

거대한 바위 아래 돌계단을 돌아드니 밝은 빛이 퍼지며 학소대 기봉(奇峰)과 상환암이 보인다.

천년 학이 깃들어 둥지를 틀었다는 학소대(鶴巢臺)에 자리 잡은 상환암에는 깎아지른 병풍석이 둘러서 있다. 

묵상하며 서 있는 절 마당 삼층석탑 앞에 서서 저 멀리 망망히 굽이쳐 흐르는 산 능선을 바라본다.

암자에는 빛바랜  '圓通寶殿' 편액이 걸려 있고, 퇴경 권상로가 쓴 '上歡庵' 편액도 나란히 걸려 있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산신각이 걸려 있다. 

 

상환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으며, 1950년 6.25의 병화로 정말 소실된 것을 法雲 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공양왕 3년(1391년)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1464년 세조가 이곳에 거동하여 선왕의 유덕을 추모하는 즐거움이 비할 데 없다면서 원래의 암자 이름인 길상암(吉祥庵)을 상환암(上歡庵)이라 했다

전해온다. 절벽을 깎아 만든 돌계단을 오르니 하얗게 핀 구절초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벼랑 위에 걸려 있는 산신각을 올려다본다.

산신각에 올라 내려다보니 병풍석 아래로  상환암이 걸려 있다.

병풍을 친 듯 기암이 둘러 서고  조망도 시원한 상환암은 천년 학이 깃들어 둥지를 틀만한 명지(名地)이다.

상환암 뒤의 중창비를 바라보며 천왕봉 등로를 걸어 오른다.

  

용비늘 껍질을 한 붉은 소나무

 

 

이끼 낀 거대한 바위

 

두 갈래로 자라난 노 거수 느티나무

 

거대한 암벽 아래의 돌계단

 

학소대 기봉( 鶴巢臺 寄峰)

 

상환암과 삼층석탑--절벽 에 삼신각이 보인다

 

 

 

 

 

  

상환암 삼층석탑

 

원통보전 뒤의 병풍석

 

원통보전의 아미타 삼존불

 

바위를 깎아 만든 산신각오르는 길

 

 

암벽의 각자(刻字 )

 

산 신각 아래에 피어 있는 흰 구절초

 

절벽에 걸려있는 산신각

 

벼랑 위의 산신각(山神閣)

 

산신각 옆에서 바라본 전경

 

산신각에서 바라본 상환암

 

상환암 중창비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니 아침 햇살을 받은 소나무 군락이 붉게 빛나고 있다.

상환석문이 나타난다.

석문을 통과하니 나무 숲 사이로 아침 햇살이 퍼지며 길 위에 나무 그림자를 드리운다.

石門에는 아침 햇살이 그린 그림자가 어려 있다.

영롱한 햇살이 나무 사이로 퍼지고 있다.

나도 한 그루 나무 되어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는다.

  

어둠을 뚫고

열리는 오로라

천만 비둘기 떼

금박 된 날개에

실어다 뿌리는

 

아침햇살


복면했던 산이

제모습으로 돌아가

먹물을 뒤집어썼던 숲이

햇살 끼얹어 목욕하고

속살을 드러낸다.


햇살마다 독아닌

하늘나라 각성제를 묻혀

최면을 풀고

세상은 하루치의 개벽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과



그 눈부심으로 맞는

열리는 아침의

개벽.

 < 아침햇살 - 류정숙 >

  

아침 햇살을 받은 소나무 군락
상환석문

 

상환 石門에 비친 아침 햇살이 그린 그림자가 신비롭다

 

 

나무 사이로 영롱한 햇살이 빛나고 있다.

 

 

목재 창고로부터 유래한 상고암(上庫庵)

상고암 가는 산길에는 우뚝우뚝 굵은 소나무가 자주 나타난다.

갈림길에서 상고암 이정표 따라  왼편 길로 접어들어 무성한 산죽을 헤치며 걷는다.

 

용바위와 거북바위너머로 팔각 9층석탑과 상고암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큰 잣나무 아래의 돌확에는 홈통을 따라 흘러든 샘물이 넘치고 있다.

극락전 오른쪽 바위틈에서 솟아난 상고암의 석간수다.

우리나라 물의 으뜸인 팔공덕수(八功德水)라 부르는 샘물이다.

 

징정(澄淨), 청랭(淸冷), 감미(甘味), 경연(輕軟), 윤택(潤澤), 안화(安和), 제기 갈(除饑渴), 장양제근(長養諸根)의여덟 가지 공덕이 있다고 하는 

팔공덕수(八功德水) 극락에 있는 못에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또 수미산을 에워싸고 있는 일곱 바다에도 이 물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이 물을 마시면 목이 부드러워지고 먹은 뒤에는 배 속이 편안하다고 한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보면, 여말선초의 문신 이행은 달밤에 술통을 실은 소를 타고 산수를 노닐어 '기우자(騎牛子)'라는 호를 얻은 사람으로, 물맛을

기가 막히게 분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충주의 달천수(達川水)를 제일로 삼고, 금강산에서 나오는 한강의 우중수(牛重水)를 두 번째로,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 三派水)를 세 번째로 꼽았다 전해진다.

달천수 역시 속리산 삼파수의 한 가닥이니 우리나라 물맛의 제일은 속리산 삼타수라 할 것이다.

상고암의 석간수가  달래강(달천)의 발원지이니 우리나라 좋은 물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세조가 신병 치료차 복천암에 머물 때 식수는 물론 약을 다릴 때는 반드시 상고암의 물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돌확을 넘치는  맑고 찬 팔공덕수를 떠서 마시니 기갈이 해소되며 심신이 쇄락해진다.

수통에 팔공덕수를 가득 채운다.

 

상고암 툇마루에 빨간 마가목 열매가  늘려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에 들어 참배한다.

극락전 옆에는  꽃이 진 자리에 둥근 열매를 달고 있는 개구릿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둥근 열매에 붙은 벌이 열심히 꿀을 빨고 있다.

팔공덕수가 솟아나는 바위 무리 아래로 구절초가 환하게 피어 있다.

빨간 열매를 단 마가목을 바라보며 계단을 밟고 오르니 영산전이다.

 

상고암을 행주형(行舟形)의 빼어난 자리라 한다.

비로봉 꼭대기에 솟은 하얀 바윗돌을 돛대 삼아 산세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진리의 바다를 향해 돌진하는 배의 모습에 해당된다고 한다.

영산전 앞에 서서 바라보니  겹겹의 산 능선이 마치 망망한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인다.

극락전 반야용선을 타고 저 피안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는 듯하다.

 

언덕 오솔길을 걸어 내리니 산신각이다.

산신각을 지나 언덕을 100여 미터 오르니 바위 위에 설치한 널찍한 전망대가 나온다.

속리산 묘봉 능선과 백두대간 능선의 암봉들인 문장대 신선대 청법대 입석대 비로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인다.

굽이쳐 흐르는 산세가 망망히 펼쳐져 보인다.

이곳 상고암에서는  속리산 푸른 연꽃 봉우리 능선과  끝없이 펼쳐지는 산능선의 물결을 조망할 수 있다.

 

고암(上庫庵)은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통일신라시대 성덕왕 19년(720년)에 창건되었다.

처음은 법주사를 짓기 위한 목재를 저장하여 두던 창고로 이용되다가 뒤에 암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원래는 上庫, 中庫,,中庫 下庫 세 곳을 지었는데, 이중 中庫, 下庫는下庫 없어지고 上庫만 남아 뒤에 上庫庵으로 거듭난 것이다.

1876년(고종 13)에 인명대사(仁明大師)가 중창하였고 1897년 보봉(普峰) 스님이 중수하였다.

광복 후 1963년 법혜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고 이후 극락전과 영산전, 산신각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고암 가는 길의 붉은 소나무

 

둥근 바위가 머리를 내민 기묘한 바위

 

 

용바위, 거북바위 너머로 팔각 9층석탑과 상고암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잣나무

 

팔공덕수(八功德水) - 돌확에는 홈통을 따라 흘러든 석간수가 넘치고 있다.

 

 

팔각 9층석탑과 극락전

 

팔각9층석탑

 

 

상고암 편액이 걸린 요사채

 

 

마 가목 열매

 

 

개구릿대 열매에 붙은 벌이 열심히 꿀을 빨고 있다.

 

바위 벽에 새겨진 팔공덕수 글자 가 보인다

 

고본

 

영산전

 

영산전 앞에 서서 바라보니; 겹겹의 산 능선이 망망한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인다.

 

 

山神閣  - 구절초가 피어 있다

 

전망대 오르는 언덕에 피어 있는 구절초

 

상고암 전망대에서 바라본  입석대( 立石臺)

 

신선대와 경업대

 

문장대

 

 

 

                                   겹겹의 산 능선이 망망함 바다의 출렁이는 파도 같다

  

상고암 인근에는 천년 동안 커다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천년송(千年松)이 있다.

뿌리 위에서 일곱 개의 줄기가 뻗어 자랐는데 각기 용틀임을 하는 용의 모습이라  칠룡송(七龍松)이라 부른다.

              

칠룡송(七龍松 )

 

 

  

 

  

 

 

칠룡송

 

칠룡송

 

 

팻말을 따라 바위 아래 천연동굴에 세워진 굴법당에 들린다.

굴법당 정식명칭인 약사전 앞에는 작은 빗돌 두 개가 서 있는데 '心眞如門' '心生滅門'心生滅門'이라 새겨져 있다.

"마음이 곧 진여의 문이요, 마음이 곧 생멸의 문이다"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고 무언의 설법을 하고 있다.

 

굴법당 - 약사전

 

 

 

한 달음에 천왕봉에 오른다.

해발 1,058m의 속리산 최고봉

바위 무리 위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天王峰' 표지석이 우뚝 서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천황봉(天皇峰)으로 바뀐 것을 원래의 천왕봉(天王峰) 우리 산 이름을 되찾았다.

 

천왕봉에 떨어진 빗물이 백두대간. 한남금북정맥을 기준으로 동쪽은 낙동강, 남쪽은 금강, 서쪽은 남한강으로 흘러 삼파수(三派水)라 부른다..

天王峰은 三派水의 발원지이고 漢南錦北正脈이 이곳에서 分岐된다.

천왕봉 바위 무리 위에 서서 사위에 끝없이 펼쳐진 산세의 물결을 바라본다.

                                                                                                    

천왕봉 표지석

 

 

천왕봉 표석

 

 

 

 

 

 

 

 

 

 

 

 

 

 

 

  

천왕봉을 뒤로하고 화북의 장각폭포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헬기장을 지난다.

빨간 회나무 열매가 숲 속을 환히 밝히고 있다.

상고석문을 지난다.

덩치 큰 바위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고, 기이한 형상의 바위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회나무 열매

 

 

상고 석문

 

 

기이한 형상의 바위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 신비를 더한다.

 

 오던 길을 뒤돌아 보니 능선 끝에 삼각형의 천왕봉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겹겹의 산능선이 굽이치며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다.

이끼 낀 암벽에는 담백한 하얀 꽃바위떡풀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문득, 나뭇잎 사이로 미끈한 흰 바위가 보인다.

상고암에서 보았던 입석대가 나무 숲 위로 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어루만지고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벼랑이라  접근할 방법이 없다.

수많은 기암과 기봉, 끝없이 펼쳐진 산세를 바라보며  마루길을 걷다 보니 경업대 이정표가  나타난다.

 

  

비로봉의 기봉

 

 

 

능선 끝에 삼각형의 천왕봉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기암

 

대(大)자 모양의 바위떡풀

 

 

기봉으로 이루어진 비로봉

 

 

 

 

나뭇잎 사이로  머리 부분만 불쑥 내밀고 있는 입석대(立石臺 )

 

 

산죽

 

 

아름다운 바위 봉

 

 

 

 

  

경업대와 관음암을 들려 다시 이곳으로 올라 문장대로 가리라 작정하고 경업대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 길이다. 쇠줄을 잡고 암벽길을 내려서니 덩치  큰 바위들이 솟아 있다.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니 하얀 암벽이 푸른 하늘에 닿아 있다.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경업대 안내판이 서 있다.

조선 인조(1594∼1646)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독보대사(獨步大師)를 모시고 무술연마를 한 수련도장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경업대로 불렀다.

이 경업대로부터 5 보지점 뜀금바위를 뛰어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해발 1,016m 산정에 있는 입석대는 장군이 7년 수도 끝에 누워 있던 바위를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또 다른 전설은,  신라 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왕녀 덕만(德蔓)과 왕자 법승(法昇)을 데리고 와서 피난할 때 세워 놓고 매일 아침

입석대에서 부왕(父王)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하였다고 한다.

 

경업대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입석대를 중심으로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서 있다. 

돌들이 빚어낸 속리산의 빼어난 경승(景勝)이다.

 

 

 

 

 

신선대가 보인다

 

 

경업대(慶業臺 )

 

 

경업대너머로 바라보이는 입석대

 

 

경업대에서 바라보이는 돌들이 빚어낸 속리산의 빼어난 경승(景勝)

 

입석대( 立石臺 )

 

 

 

 

다시 가파를 계단을 내려서서 걷다 보니관음암 0.2km 이정표가 서 있다

연등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 있는데 "觀世音菩薩'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로 삼층석탑이 보인다.

속리산 8 석문 중의 하나인 금강석문(金鋼石門)이다.

바위문을 열며 들어가는 듯  바위틈 사이로 걸어 들어가니 기묘한 느낌이 난다.

 

조선의 명장 임경업 장군이 스승인 독보대사와 같이 7년간 수도하였던 곳이라 하여 경업대토굴(慶業臺土窟)이라 부르는 자연동굴에는

바위틈에서

용의 양쪽 눈에 해당한다 하여 용안수(龍眼水)라고도 부르는 이 샘물은 임경업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將軍水)라 부른다. 

똑똑똑  바위에 맺힌 물방울이 샘물 위로  쉬임 없이 떨어지며 적막한 굴속을 울리고 있다.

 

바위옆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전망이 환히 트이는 곳에 관음암을 중창한 선암의 승탑이 서 있다.

 7층석탑을 올려다보며 돌계단을 오르니 깎아지른 바위 아래로 관음암 법당이 서 있다.

법당에는 관음암, 경업대 편액이 걸려 있다.

'慶業臺' 편액은 충민공 임경업(忠愍公 林慶業)의 12대손이 썼다.
또 법당 위 암벽에도 '慶業臺'라 새겨져 있다.

스님은 보이지 않고 고요한 적막만 흐르고 있다.

절 마당에 서서  망망하게 굽이치는 겹겹의 산능선을 바라본다.

 

구전에 의하면, 관음암은 신라 문무왕 3년(663년)  회월대사(晦月大師)가 60세 때 창건하고 168세 때 입적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장수의 비결을 묻자 "아침에는 새벽공기를 마시고 낮에는 솔잎을 먹으며 저녁에는 관음암의 장군수를 마신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창건 이후 수차례의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연대 등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서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되었다가 1955년 무렵 선암(仙巖)이 법당을 짓고 중창하였으며, 1971년 법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금강석문(金鋼石門 )

 

 

갈 라진 바위 틈새의 금강석문을 지나야 관음암에 들 수 있다.

 

 

 

자연동굴( 임경업토굴) 안에 장군수가 있다.

 

관음암 오르는 돌계단

 

선암선사 승 탑

 

 

7층석탑

 

 

 

충민공 12대 손이 쓴 경업대 편액

 

관음암(觀音庵 )

 

암벽에&있는 '慶業臺' 각자

 

절 마당에 서서 망망히 펼쳐진 굽이치는 겹겹의 산능선을 바라보니 선경에 오른 듯하다.

 

                               

관음암 슬레이트 지붕너머로 보이는 조망

 

 다리가 지쳐 그대로 하산하기로 한다. 

금강산장, 비로산장, 세심정을 지나 법주사 금강문 앞의 수정교(水精橋)에 다다른다.

옛날에는 이 석교 위에 루(樓)를 건립하고 루 아래로 통행하였다고 한다.

이 다리 위에서 조선초기 신여 선사(信如禪師)가 수정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였다.

 

三淸洞有九重遙

一帶溪流八處橋

橋下水明紅妬

滿山楓葉倚松梢

 

삼청동에 가는 길은 아홉 구이

물을 건너는 다리는 여덟 개

단풍이 파란 물을 시기하여

붉은 잎이 소나무 가지 사이에 피었네

  

정각스님의 저서 <가람, 절을  찾아서>  글 일부를 옮기며  법주사와 그 산내 암자의 향기를 그리워한다.

 

절이란 삶의 나그네가 머무는 곳이다. 속진의 번뇌 떨쳐 버리고자 무수한 긴 잠을 새웠던 이들, 그들에게 절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그러나 머무는 자는 영구히 머물지 만은 않는다. 어쩌면 '머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임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머물되 머무름에 안주하지 않는 장소, 머무름의 순간에 조차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자들을 위해 절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삶의 여행자들을 위한 머뭄터.

그러므로 절에는 주인이 없다. 그 안에서는 누구나 한낱 여행자이기에....

그럼에도 잠시 머무는 자는 주인이 된다. 또한 일순간, 아침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를 뒤로 한 채 걸망울 챙겨 맨 안갯속의 그 사람에게는 나그네란 이름이 붙는다. 그러나 나그네는 떠나되, 절(寺)은 그 자리에 남는다.

                         

수정교 아래를 흐르는 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