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이 머무는 절, 法住寺

2014. 10. 2. 10:33나를 찾아 걷는 길/세속을 여읜 산, 속리산을 오르다

세속을 여읜 산, 속리산을 오르다

  2014. 9.18-19 

 

여행은 나른한 일상에서 우리들을 탈출시켜 주고 번잡한 마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력소를 얻게 하여 준다.

속리산 높은 암자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끝내는 배낭을 지고 속리산행 버스에 오르게 한다.

뇌리를 스치는 상념을 떨치며 달리는 버스 차창너머로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본다.

언제나 길위에 서면 조태일 시인의 '國土序詩'가 생각나 읊조리곤 한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속리산은 오래전부터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컬었다"고 되어 있고, '증보문헌 비고'에는 "속리산은 산세가 웅대하고 꼭대기는 모두 돌봉우리가 하늘에 나란히

솟아서 옥부용玉芙蓉을 바라보는 것 같아 세속에서는 소금강이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8개의 봉峰과,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  8개의 대臺와,

내석문 외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상환석문 추래석문 등 8개의 석문石門이 있다.

 

8峰 8臺 8石門의 속리산은 수 많은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헌강왕 12년 고운 최치원이 속리산 묘덕암에 와서 남긴 유명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려 하고

산은 세속를 떠나지 않았는데 세속은 산을 떠나려 한다

 

(1) 법이 머무는 절,  法住寺

 

< 동국여지승람 >과 < 조선불교통사 > 등에는 법주사 설립에 대한 설화적 기원을 적고 있다. 법주사는 1500여 년 전 신라 진흥왕 4년(553년)  의신義信이라 불리는 스님이 천축국(인도)에서 구법(求法)을 마치고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귀국하여, 절터를 찾아 이리저리 헤메이던 중 노새가 발걸음을 멈추고 울부짖어 경전을 내려 절을 세웠다고 한다. 노새의 등에 싣고 다니던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이유로 이곳 절 이름을 法住寺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법주사가 또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법주사및 진표율사에 관련된 2개의 기록이 <삼국유사> 卷四   <진표전간眞表傳簡> 및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적혀 있다.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야산촌 대정리 사람으로, 12세에 부친의 허락을 받고 금산사 순제법사에게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이후 변산에 있는 부사의 방(不思議房)에 스스로 거처를 정한 율사는 3년 여에 걸친 수행 끝에 어느 날 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친견하게 되었다. 이에 지장보살은 율사에게 가사.발우와 함께 계본을 주었고, 미륵보살은 나무 간자 두 개를 주며 "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인데 이것은 始覺.本覺의 이각二覺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수 받은 율사는 하산하여 현재의 금산사를 창건하였으며, 신라 혜공왕 2년(766)에 금산사 금당에 미륵장륙상을 주조하여 안치하였다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을 향하여 가던 중 소달구지(牛車)를 탄 사람을 만났다. 수레를 끌던 소들이 율사의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묻기를, "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또 스님은 어디서 오십니까?" 이에 율사는, "나는 금산사의 진표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부사의 방에 들어가 미륵 지장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두 간자를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지만 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므로 무릎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다 듣고 말하기를, "축생도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저는 사람으로서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 "즉시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두발을 잘랐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주었다. 그들은 가다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그곳에 표해 두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발연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고 7년 간 머물렀다. 이후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속리산이라 하였다. 그 후 율사는 발연사에서 나와 다시 부사의 방에 이르렀다. 이때 영심대덕이 융종대덕 등과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와서 계법을 구한다. 진표율사는 영심(永深) 대덕 등에게 지장보살로부터 전해받은 가사. 발우 '공양차제비법' 한 권과 '점찰선악비경' 두 권과 간자 189개, 그리고 제9 간자와 제8 간자를 주면서, '제9간자는 法이요, 제8 간자는 새로 훈성한 불종자이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가 난 곳이 있을 것이니 그곳에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널리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제도하고 후세에 유포하라." 하였다.하였다. 영심 등은 가르침을 받들어 속리산에 이르러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길상사라는 절을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말티재를 넘어 법주사로 가고 싶지만 시외버스는 서원리로 우회하여 삼가터널을 지난다.

정이품송을 보고 법주사로 가기 위해 상판정류소에서 하차한다.

 

정이품송(正二品松)

수려했던 소나무는 1993년 강풍과 2004년 3월 5일 백 년 만에 내린 폭설로 가지가 부러져 균형이 깨어졌다.

한쪽만의 수려함

또 한쪽의 비움이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소나무 아래로 막돌을 땅에 묻어 옛길임을 표시하고  그 안에 '속리산 옛길'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정이품송(正二品松 )

 

 

 

 

                                                                                            '속리산 옛길' 표지석

 

 

 

 

 

 

 

1980년대 정이품송

 

차로를 버리고 상판리 연꽃단지 길을 걷는다

누렇게 퇴색된 연잎 위로 솟아난 연꽃이 피었던 긴 꽃자루에는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연밥이 달려 있다.

연밥 위에 앉았던 잠자리가 날아간다.

결실의 계절 가을은 이미 와 있는 모양이다.

은석공원 끝머리에 다다르니 세조世祖가 복천암에서 악질을 고친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세웠다는 기둥 돌 구석救石이 서 있어 흘러간

옛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세조世祖는 속리산 복천암에서 악질을 고치고 그 은덕에 보답코져 승려에 이르기를 복천암 앞에 있는 기둥 모양의 돌을 끌고 보은 쪽으로 향하여

가다가 힘이 빠져 멈추는 곳을 경계로 산천전답(山川田畓)을 모두 절 소유로 인정하겠다 하였다.

승려들이 크게 기뻐하고 기둥 돌에 밧줄을 메어 끌고 가다 상판리 새목이 쯤에서 기진맥진 더 이상 끌고 가지 못하자 세조는 그 자리를 경계선으로

寺田文을 작성해 주고 그 자리에 恩救石을 세웠다 한다.

지금도 이 은구석을 경계로 법주사 소유의 땅으로 되어 있다.

누렇게 퇴색된 연잎 위로 솟아난 연꽃이 피었던 긴 꽃자루에는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연밥이 달려 있다.

 

세조가 세웠다는 은구석( 恩救石)

 

                                                                                  

약 2km를 걷고나니 속리산 조각공원이다.

'여름철 장맛비를 맞으며 걸어야 제맛이 난다'라고 시인 고은이 말한 오리숲길은 참나무 소나무 전나무가 주종을 이룬 울울한 숲길이다.

그렇다. 

하늘을 가린 푸른 잎새 사이로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이 숲길을 걷는다면 한결 운치를 더할 것 같다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그렇게도 익숙하건만……
늙은 떡깔나무는 외면한 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듯하고
길은 부유(腐乳) 냄새가
이제까지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구나.

이상하다.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어가면
내 발등은 먼저 간 자취로 떨리는구나.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외딴 곽새가 V자(字) 가지에서 날라 가 버릴 뿐이다.

어느 날 일몰(日沒)이 늦었다. 나의 산길에는
그때까지 아침 이슬이 마르지 않고 있다.
자꾸 둘레를 돌아다보면서
이윽고 부락암호(部落暗號)로 불러 보았다.
저 앞에서 누가 반말로 대꾸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 줄 어떻게 알겠느냐.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이 산길은 간조(干潮) 바다까지 보다 멀고
먼 예리고 고개까지도 닿아 있다.
비록 다른 길이 있을지라도
나는 이 산길을 버릴 수 없구나.
왜냐하면, 여기서 누구인가 낯선 면모(面貌)를 만날 테니까……

산길  -  고은  >

 

숲길 복판에 '湖西第一伽籃'   '俗離山大法住寺'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우뚝 서 있다.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속리실기비각(俗離實記碑閣)과 법주사를 중창한 벽암대사비가 보인다.

 

 

 

속리산 법주사 일 주문

 

湖西第一伽籃 ' '俗離山大法住寺 편액'
뒤돌아 본 일주문

 

 

 

                속리실기비각 (俗離實記碑閣)                   

이 비는 1966년(헌종 7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등이 있다.

또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 바위의 내력을 쓰고 있는데,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쳐 이상이 여긴 태종이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동국 명산에 큰 거북이의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당나라 재물이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이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태종은 사람을 파견하여 속리산 수정봉에 있는 돌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고 하는 내용이다.

                                                                       

벽암대사(碧巖大師) 비 : 선승(禪僧)이자 승병장(僧兵將)인 조선시대 중기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커다란 바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수정교를 건너 금강문을 들어서니 법주사 평지가람이 멋지게 펼쳐지고 있다.

사천왕문 앞에는 전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멀리 연꽃 봉우리 바위 능선이 법주사를 위요하고 있다.

법주사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 주듯 경내에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더듬게 한다.

철확,석련지, 팔상전, 우뚝한 청동미륵대불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왼편 산기슭에는 추래암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제일 큰 바위 벽에 '墜來巖' 각자가 선명히 보인다.

원래 수정봉에 있었는데 신선의 노여움을 사 아래로 밀어뜨려 굴러 떨어졌다 하여 추래암(墜來巖)이다.

 

추래암 암벽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으로 불린다.

이 마애불은 미륵불로 의자에 걸터앉듯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은 모습이다.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잘록한 허리와 전륜법인(轉輪法印)을 한 두 손 모양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미륵불 좌쪽 하단에는 음각화가 있는데, 짐을 실은 말과 사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 등의 조각이 있는데 오랜 세월 풍우에 씻기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 전체의 장면은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스님과 진표율사와 관련된 설화를 묘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와 잇대어진 바위 위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두 바위가 만난 아래쪽에는 수행장소로 보이는 커다란 석실이 있다.

바위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바위틈에서 감로수가 흘러나와 돌확으로 떨어진다.

 

능인전 마당에 들어서니 추래암 위에 쌓아 놓은 삼층석탑이 보인다.

능인전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과 16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비로자나불 뒤로 뚫린 네모진 창너머로 세존사리탑이 보인다.

팔각 원당형 세존사리탑 옆에 세워져 있는 세존사리비문에 의하면,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키 위해 법주사를 찾았으며, 양산 통도사로 사신을 보내 그곳 적멸보궁에

모셔져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1과를 이곳에 옮겨 모시게 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金剛門-안에는 밀적금강. 나라연금강 역사와 보현보살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四天王門 앞에는 전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철당간(鐵幢幹)                    

 

석연지(石蓮池 )

 

수정교 아래를 흐르는 계류 - 이 징검다리를 건너 오르면 추래암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추래암(墜來巖 )

 

 

 

                                                                                                     墜來巖 각자

 

추래암에 새겨진 각자

 

 

마애 지장보살상과 마애여래의상

 

추래암 암벽에 새겨진 불상 -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잘록한 허리와 전륜법인(轉輪法印)을 한 두 손 모양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마애여래의상 좌쪽 하단에는 짐을 실은 말과 사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 등의 조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추래암의 감로수

 

추래암 옆의 부도- 금오선사 등의 부도가 있다

 

 

 

                                                                                            능인전 (陵仁殿)          

능인전의 비로자나불 - 뒤 창으로 세존사리탑이 보인다

 

팔각 원당형 세존사리탑

 

추래암 위에 있는 삼층석탑

 

                                                                                

능인전 문을 나서 앞을 바라보니 청동미륵대불 팔상전 원통보전 대웅보전 등 법주사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속리산 푸른 연꽃 봉우리 바위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미륵도량인 법주사에는 본래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었다.

이 법당은 뒤쪽에 산호 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어서 산호 전으로 불렸다.

정유재란 때 사라졌던 것을 1990년에 청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조성하였다.

청동미륵대불은 기단까지 포함하여 높이가 33m이고 기단 아래 지하에 조성된 내 법당 용화전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이 모셔져 있다.

미륵(彌勒)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미륵이란 산스크리트(梵語)의 Maitreya, 팔리어 Metteya의 음역으로, 자 씨(慈氏) 또는 자존(慈尊)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애초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로 그의 이름은 아일다(阿逸多)이며, 인도 바라나시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부처님 재세 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미래세에 부처를 이루리라'는 수기를 받고, 그로부터 12년 후에 입멸하여 현재 도솔천에

머물며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신 분으로서, 다음 세상에 부처를 이룰 분이라는 뜻에서 '미륵보살', 또는 '미륵불'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56억 7천만 년 후 그 당시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출현, 용화수 아래에서 부처를 이루어 이전 석가모니 부처님

께서 제도하지 못한 많은 중생들을 3번의 설법을 통해 제도할 것으로 되어 있는 바, 그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부르게 된다.

그러나 용화삼회의 설법은 너무도 먼 미래세의 일이어서 일반 중생들은 그 기회를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인간새의 수명이 다한 후 도솔천에 올라가(上生) 미륵보살과 함께 56억 7천만 년을 지낸 후, 미륵보살께서 세상에 내려올 때

그를 따라 지상에 내려와 3번의 설법 중 처음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 이것은 '미륵 상생신앙'의 골자이다.

도솔천의 왕생과는 상관없이 미래세계의 용화삼회의 설법에 참여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신앙을 '미륵 하생신앙'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미륵 상생신앙에서는 우리가 현실세계 속에서 닦아야 할 열 가지 덕목, 십선계(十善戒)를 수행해야 할 것을 권하고 있으며,

그 열가지 선업을 닦음으로써 이후 용화세계에 이르러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도솔천에 왕생하지는 못한다 해도 미륵보살께 공경. 예배를 올리는 이가 있다면, 이후 세계에 미륵불을 만나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설하는 바 이것을 '미륵 하생신앙'이라 부른다.

 

팔상전 5층 네 곳 추녀 끝에 매달린 20개의 풍경이 바람이 불적마다 일제히 흔들리며 쟁그렁 쟁그렁 법열의 노래를 부른다. 

아!  황홀하다.

이곳이 바로 불국토인가.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상전(捌相殿)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탑(木塔)이다.

또한 그 안에 불사리를 봉안한 전각으로도 사용되어 탑전(塔殿)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특유의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553년 진흥왕 당시 창건주 의신이 건립하였으며, 776년 신라 혜공왕 2년 병진이 중창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시 불탔던 것을

1605년부터 1626년까지 22년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원래의 양식과 거의 동일하게 중건되었다.

월대와 계단은  불전을 초창한 통일신라 때의 것이라고 한다. 

1층은 사방 5칸이며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양끝이 반 칸씩 줄어서 5층은 사방 한 칸이 된다.

지붕은 사모 지붕이며 위에 올려진 상륜부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완벽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팔상전 해체 중수 공사 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팔상전 내부에 드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가 네 벽에 모셔져 있다.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 

한 면에 두 폭씩 걸려 있는 팔상도를 탑돌이 하며 합장한다.

팔상도 전면 각각에는 불단을 만들어 불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불상 앞면에는 500 나한상이 모셔져 있는데 팔상도와 어울려 아름답기만 하다.

4층까지 까마득히 올라간 네 개의 하늘기둥(四天柱)을 올려다보니 얽히고설킨 구조물이 신비롭게 보인다. 

채색이 벗겨져 희미하지만 네 개의 하늘기둥은 용 문양으로 장엄되어 있다

500 나한상과 팔상도와 하늘기둥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오래 머물고 있으니 마음이 고요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대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화사석을 떠 받치고 있는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몸통의 갈기털과 하대석을 딛고 선 뒷발의 근육이 잘 묘사되어 있다.

화사석 둘레에 사천왕상을 생동감 있게 조각해 놓은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이 아름답다.

石燈은 法燈으로 불려, 그 자체가 부처님 말씀을 상징하고 있다.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기 때문이다.

 

보리수 두 그루 사이로 보이는 중층의 대웅보전은 위엄 있는 우람한 자태를 하고 있다.

1624년 조선 인조 2년에 벽암스님이 중창한 중층 건물인 이 대웅보전은 우리나라 사찰의 다층 건물 중 화엄사의 각황전, 무량사의 극락전과 더불어

3대 불전의 하나이다.

3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댓돌을 한 단 돌리고 그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중앙 계단 좌우의 소맷돌은 둥글둥글한 모양을 하였고, 가운데는 넓적한 돌 석장을 붙여 계단을 좌우로 나누었다.

소맷돌 위쪽에는 돌원숭이가 한 마리씩 앉아 있다. 

연잎과 연꽃이 새겨져 있는 소맷돌은 오랜 세월이 배어 있는 멋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보전 주련을 본다.

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體同

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海渺難窮

威光遍照十方中

 月印千江一體同

四智圓明諸聖士

賁臨法會利群生

부처님 몸 시방세계 두루 계시며

삼세의 여래가 모두가 한 몸일세

광대한 서원은 구름같이 다함없고 

넓고 넓은 깨달음 아득하여 끝없네

부처님의 위광이 시방세계에 가득 차고

천 갈래 강에 비친 달은 천 개로 보여도 근본은 하나

4지에 통달한 많은 성인들

두루 법회에 임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네

 

法身 報身 化身 삼신불(三身佛)을 모신 대웅보전에 들어 참배하고 일어서니 커다란 금빛 불상이 눈앞에 다가선다.

국내 불상 중 좌상으로는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을 , 좌측의 노사나불(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인을, 우측의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다. 

 

대웅보전 기도접수를 하는 지적으로 보이는 보살께 연꽃 문양이 조각된 계단이 있는 곳을 물으니  기쁘게 직접 안내해 주신다.

연꽃 문양을 물은 사람은 처음이라면서....

사진을 찍으려 하니 잠시 기다리고 하더니, 빗자루를 가져와 깨끗이 쓸어 주시니 모래에 덮여 희미했던 연꽃 문양이 선명히 드러난다.

돌계단에 연꽃이 활짝 피어난다.

이어서 팔상전 안에는 팔룡(八龍)이 있다고 하면서 보지 못하였으면 다시 가서 보라고 권한다.

 

법주사의 개산조인 의신 조사로부터 금오스님에 이르기까지 고승대덕 24분의 영정을 모신 진영각(眞影閣)을 참배하고, 희견보살상이라 불리는 석조상을 바라본다. 구원겁(久遠劫)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고 있는 희견보살의 모습을 조성해 놓았다는 이 석조상은,  두툼한 판석 위에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입상(立像)으로 신라 성덕왕 19년(720)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전 법화경에 의하면 희견보살은 원래 일체중생 희견보살이라 불려, 일찍이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공양을 올렸다는 보살로서, 그 몸의 불꽃이 약 1200년이 다하도록 꺼지지 않았다는 내용을 '약왕보살본사품'은 전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희견보살은 단정한 모습과 아울러 왼손에 깃발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어 이와 일치하지 않는 이 석상은 희견보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제자 가섭존자는 미륵불이 하생할 때 가사와 발우를 미륵불에게 전하라는 수기를 석가모니에게서 받았기 때문에 이 보살상은 발우를 받들고 가사를 걸친 채 미륵불을 기다리는 가섭존자의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 탑은 원래 용화전 옆에 세워져 있었고, 통도사 용화전 옆에도 봉발탑(奉鉢塔)이 세워져 있음을 감안할 때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원통보전은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義信組師)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776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碧巖大師)가 복원하였다. 1974년 전체적인 해체 복원작업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기단은 통일신라 때 원통보전 초창시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방형(正方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으로서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다.지붕은 마루가 한 꼭지에 모인 사모지붕으로 처마가 삿갓을 쓴 듯하다. 내부에 모셔져 있는 금빛 관음보살좌상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법주사의 유적과 유물을 둘러보고 범종각 앞에 서서 주련을 본다.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철위지옥의 모든 어둠 다 밝아지소서

삼도와 도산지옥의 고통에서 떠나

일체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여주소서

 

첩첩으로 깊은 청산 미타굴이요

망망한 푸른 바다는 적멸궁일세

물물이 오감에 걸림 없는데

소나무 정자에 학의 머리 붉음 몇번이나 봤는가

 

자기 뱃속을 비워 소리를 내는 범종각의 목어를 바라본다.

여전히 팔상전 처마 끝의 풍경은 바람에 흔들리며  쟁그렁 쟁그렁 법열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목어는 뱃속을 비워내야 소리가
맑다 하였는가
그 뱃속 누구에게 내어주고
마른 허기로 둔탁한 구걸인가
풍경이 울 때마다 지느러미 물기 털어내
세월풍 한 소절 따라 부르는 슬픈 울음,
염화시중(拈華示衆),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인자한 미소
빛바랜 단청 곱게 일어서고,
목어 너,
맑은 소리공양으로
온 생이 환해지는 절집

                           < 목어(木魚) -박종영 >

 

 

청동미륵불상 기단에 다시 올라 법주사 전경을 바라본다.

조선 성종 9년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 박효수가 읊은 '偶題 俗離山' 시를 음미하며,

고려 시절(1330년 대) 법주사의 모습을 눈에 그려본다.

 

偶題 俗離山

 

嵯峨四面碧芙蓉

長岬靈源第幾重

文藏臺封千古蘚

于陀窟蔭萬株松

龍歸塔裏留眞骨

臥岩前訪聖縱

永福三韓誰是主

珊瑚殿上紫金容

 

사면에 높이 솟은 푸른 연꽃 봉우리

긴 산봉우리 신령스러운 근원 몇몇 겹인가

문장대 천고의 이끼 그대로 있고

우타굴 그늘진 곳 붉은 소나무 가득하네

용이 탑 속에 돌아가니 진골(사리)이 남아 있고

노새는 바위 앞에 누워 성스런 자취 찾네

삼한을 복되게 하실 분 그 어떤 분인가

산호 전 위에 계신 자금색 부처님이라

 

능인전 앞에서 바라본 법주사 전경

 

청동미륵대불(1)

 

 

 

                              청동미륵대불(2)                                                                 

 

청동미륵대불(3)

 

 

 

                                                                                                청동미륵대불(4)

 

팔상전 (捌相殿)

 

팔상전 네 처마 끝의 풍경 20개가 바람에 불면 일제히 쟁그렁쟁그렁 흔들리며 법열의 노래를 부른 다 .

 

 

팔상전 처마 끝의 풍경

 

   

 

 

팔상전의 월대와 계단은 불전을 초창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청동미륵대불과 팔상전 풍경

 

팔상도( 1)

 

 

 

                                                                                                 팔상도(2)          

 

 

                                                                                                            팔상도(3)

 

 

                                                                                                     팔상도(4)

 

팔상전 네 개의 하늘기둥(四天柱)에는 용 문양이 있다

 

 

원통보전(圓通寶殿)

원통보전 지붕은 마루가 한 꼭지에 모인 사모지붕으로 처마가 삿갓을 쓴 듯하다.

 

 

 

                                      정방형(正方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의 원통보전은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통일신라 때 원통보전 초창시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통보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좌상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쌍사자석등 전경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대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화사석을 떠 받치고 있는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사자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한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몸통의 갈기털과 하대석을 딛고 선 뒷발의 근육이 잘 묘사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리수 두 그루 사이로 보이는 중층의 대웅보전은 위엄 있는 우람한 자태를 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의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지권인(智拳印)을 한 法身佛 비로자나불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한 報身佛인 노사나불(아미타불)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化身佛인 석가모니불

 

연잎과 연꽃이 새겨져 있는 소맷돌은 오랜 세월이 배어 있는 멋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중안 계단 좌우의 소맷돌은 둥글둥글한 모양을 하였고, 가운데는 넓적한 돌 석장을 붙여 계단을 좌우로 나누었다. 소맷돌 위쪽에는 돌원숭이가 한 마리씩 앉아 있다.

 

 

 

                                                                       계단에 피어난 연꽃 (1)                           

 

 

돌계단에 피어난 연꽃(2)

 

   

 

                                                      구원겁(久遠劫)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고 있는 희견보살 석조상 

                      

이 석조상을 발우를 받들고 

가사를 걸친 채 미륵불을 기다리는 가섭존자의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자정국존(1240∼1327)은 국령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자기 뱃속을 비워 소리를 내는 목어(木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