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위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福泉, 福泉庵

2014. 10. 8. 08:05나를 찾아 걷는 길/세속을 여읜 산, 속리산을 오르다

세속을 여읜 산, 속리산을 오르다

 (2)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福泉,  福泉庵

 

복천암 가는 길에서 왼편으로 비켜난 산기슭에 비구니 선방 탈골암(脫骨庵)이 있다.

일주문 기둥에 "入此門來 莫存知解,   이 문을 들어서는 이는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가 알에서 나와 사람의 몸을 얻었으나, 용모가 닭의 모습을 벗지 못하여 한탄하던 중

속리산의 이곳 약수를  마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해서 탈골이라 했다 전해진다.

또, 탈골암은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되어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중건하였는데,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룬 곳이라 해서 탈골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탈골암 입구

 

탈골암 일주문

 

 

 

                                                                                 약사전 꽃살문이 아름답다               

 

옛 탈골암지에 있던 연화대석

 

   

대휴선원

 

 복천암 가는 길가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기암괴석이 솟은 계류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덩치 큰 바위 아래 푸른 잎새 나무가 어려 있는 물웅덩이, 목욕소를 지난다.

세심정을 지나 복천암을 오르기 위해서는 "이뭣고 다리 (是甚)'를 건너야 한다.

선가의 견문각지(見聞覺知) 시심마(是甚麼)에서 유래된 것으로, 참 나를  깨닫게 하는 근본적인 물음으로서 지금 인식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의 질문을 가진 다리이다.

'이뭣고'는 수행자들이 참구 할 때 보편적으로 삼는 화두로 알려져 있다.

된비알을 올라서서 담을 돌아드니 활짝 핀 코스모스가 바람에 너울거린다.

담장너머로 '湖西第一禪院' 편액이 걸린 복천암이 보인다.

 

목욕소

 

 

 

              세심정의 물방앗간 절구터 :  13-14세기에만 들어진 물방앗간 절구로  이 일대에 절터가 형성되어 많은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뭣고(是甚 麼)' 다리

 

 

 

                                                                  담장너머로 '湖西第一禪院' 편액이 걸린 당우가 보인다.

 

활짝 핀 코스모스가 바람에 너울 거린다.

 

                                                                                 

복천암 입구에는  "묵묵히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 되세요. 수행정진하는 도량입니다"라는 팻말이 서 있다.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절 마당에는 디딤돌이 곡선으로 아름답게 놓여 있다.

마당 한 켠에는 주목과 세조가 이곳에 머무를 때 어기(御旗)를 꽂았던 석물이 있다.

격자형 아름다운 문창살을 단 복천선원이 석양빛에 빛나고 있다.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 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진정선사(眞定禪師)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고려 공민왕이 이곳에 머물면서 극락전에 무량수(無量)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고,

세종조 신미(信眉)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범어(梵語) 도량이며,세종은 신미대사의 한글창제의 보답으로 아미타삼존불을 시주하였다.

 

조선시대 신미, 수미, 학열 스님이 거쳐 가면서 선지와 불법을 드높였으며, 1882년에는 경허 스님이 머물기도 했다.

근대에 선풍을 휘날린 효봉,동산,금오,청담,성철,고봉,흥근,관응,영월,월인, 탄성 대덕 등 명안종장들이 이곳을 거처 가며 명성을 더해

 '湖西第一禪院'이라는 현판이 붙었다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말 3대 선방의 하나로 유명하였다.

 

수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극락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현 불우조(佛宇條)에 따르면 "복천사 동쪽에 샘이 있는데 돌 틈사이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재위에 쓸 물을 많이 제공하므로

복천이라고 불러 복천이라는 사명(寺名)이 유래되었다."라고 하였다.

극락전 옆 큰 바위 아래 바위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복천(福泉)이라 한다.

옛 福泉자리에 물이 고이도록 돌확을 만들어 놓았는데 솥뚜껑을 여니 맑은 물이 흘러넘친다.

바위틈에서 솟은 샘물은 숫기 와로 덮은 물길을 통해 이 돌확을 채우고 넘치는 물은 다시 대롱을 통해 수곽(水廓)에 모이게 만들어 놓았다.

조선조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이행(李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물로, 충주의 달천수(達川水)를 제일로 삼고, 금강산에서 나오는 한강의

우중수(牛重水)를 두 번째로,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를 세 번째로 꼽았다고 한다.

속리산 삼타수는 속리산 천왕봉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낙동강, 남쪽으로 금강, 서쪽으로 남한강을 이룬다 하여 삼파수(三派水)라고도 한다.

 

수각에서 흐르는 복천의 삼타수를 받아 마시니 심신이 쇄락해진다.

고즈넉한 복천선원의 문창살이 석양으로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담장 옆에 묵묵히 서 있는 주목을 바라본다.

처음 들어섰을 때 느꼈던 협소함은 사라지고 그윽한 도량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극락보전 옆의 암벽에는 '崔松雪堂' 명문(銘文)이 있다.

조선 고종 때 영친왕의 유모인 최송설당은 시문에 능하였다.

복천암을 방문한 뒤 유려한 필체로 쓴 '속리산' 시를 남겼는데 선원에 걸려 있다.

 

俗離山

山名嶺右俗離稱

難於蜀道登

絶壁堆成千修玉

寄峰削出萬層氷

襟懷易爽憑仙駕

劫界全空照佛燈

自笑身絲穀累

一生塵臼贖難能

更申春日 崔松雪堂 過此

 

속리산

산이름은 영의 우에 속리산이라 칭하고

험난의 어려움은 촉도에 오름과 같도다.

절벽은 수없이 닦은 옥을 이루었고

기이한 봉우리는 만 층 빙을 깎아 만들었네.

마음을 바꾸니 신선이 멍에를 한 것 같고

세속을 모두 비우니 부처님의 등불이 비치도다

우습구나 입는 것과 먹는 것에 얽힌 이 몸이

일생 동안 묻은 때를 지우기가 쉽고도 어렵구나

 

복천의 삼타수(三陀水)를 수통 하나 가득 채우고,  절 입구 계단을 내려서서 왼쪽 신미대사 부도탑을 향해 오솔길을 오른다.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복천암 전경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복천암 입구

 

 

                                                                                    복천암 절 마당에 있는 곡선의 디딤돌

복천선원(福泉禪院)

 

 

 

                                                                    격자무늬 창살이 아름다운  '福泉禪院'

 

 

 

                                                                   주목(朱木)과 세조가 이곳에 머물 때 어기(御旗)를 꽂았던 석물

 

무량수 ( 無量 壽 )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어필이다.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복천(福泉) 바위틈에서 솟은 샘물은 숫기 와로 덮은 물길을 통해 이 돌확을 채우고 넘치는 물은 다시 대롱을 통해 수    곽에 모이게 만들었다.

                                                            

 

극락전 옆의 암벽 이 암벽 아래에 복천이 있다

 

암벽 에는'崔松雪堂'명문(銘文)이;있다

 

 

극락전(極樂殿 )-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신미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모 이경령의 이름으로 불사한 수곽(水廓))

 

 

 

                                                                  수곽 외벽에는  "大覺華 李慶齡 施主   1974年 2月 "이라 새겨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12.31일 새해 인사를 위해 옥천에 사는 장모 이경령 여사를 만나고 난 뒤, 예전 복천암에 조선의 왕들이 많이 찾았다는 육영수 여사의 말을 듣고 복천암을 찾았다. 당시 박대통령은 "우리 어머니가 독실한 불자인데 어머니(장모)를 위해 불사를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고 다섯 개의 석동(石燈)과 수곽(水廓)을 불사(佛事)했다.

 

복천암 전경

 

                                                                                                     

바위 사면을 깎아 만든 돌계단을 올라 돌아가니 울울한 붉은 소나무가 둘러싸인 곳에 신마대사와 학조대사의 부도탑이 나란히 서 있다.

붉은 소나무 사이로 속리산 연꽃 봉우리 바위가 보인다.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

신미화상은 태종 3년에 영동 영산 김 씨 가문에서 부 김훈과 모 영흥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0세 미만에 유서를 다 통달하고 출가하여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으며, 범서로 된 원전까지 모두 정독하여 삼대어에 능하였다. 집현전에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 공로로 시호를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佑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였고 문종이 즉위 후 시호를 내렸다.신미 혜각존자는 성종 11년에 77세로 입적하고 부도는 성종 11년 (1480) 8월에 건립하였다.

 

학조화상(學祖和尙)

학조화상은 안동 김 씨 집에서 태어났으며, 영천 황악산 직지사에 인연이 되어 있다가 속리산 복천사에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학열 스님과 수양대군, 안평대군을 각 암자로 뫼시고 다니면서 적극 도와 만 3년 만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학조스님의 부도는 1514년 5월에 건립하였다.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와 세종대왕, 세조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월성선사의 필사본 '福泉禪院 年歷' 일부를 옮겨본다.

 

信眉(秀岩)禪師는 속리산 복천선원에 주석하고 계시던 중 세종대왕 25년 최초로 한글 창제할 시 초빙을 받아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등 많은 학자들과

같이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한글 창제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신미선사는 도력과 학문이 뛰어나고 불유선 삼교에 능통하고 범서까지 능하시어

티베트 범서가 모음 자음으로 구성되었음을 착안의론을 전개 18개의 자음자모와 10개의 모음자모를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데 중추적 역할을하여 한글 완성 후 세종 28년 음력 9월 상간(상순) 양력 10월 9일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國字를 영포 하였다. 기후 세종대왕은 극락전 아미타불 관음세지 삼존상을 조성시주 하였다. 문종은 시호를 선교종도 총섭밀전정법 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佑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고 하사하였다. 세조가 즉위 후 전신에 피부병이 발생 백약이 무효임으로 마음이 동요 극복하기 힘들므로 정사도 어렵게 되어 정신적 의지처를 생각 든 중 한글 편찬 시 한글도감을 맡아보면서 여러 학자들 중에 가장 존경하였던 신미사가 머리에 떠올라 찾아보기로 결심하고 天順 8년 음력 2월 28일에 신숙주 이하 많은 수행원과 같이 청주를 걸쳐 지금 대궐터(장재리)에서 1일 유숙하고 馬峙嶺을 넘어 노변 松下를 지나다가 솔가지가 輦에 대임을 세조가 보고 연에 걸린다 하니 연에 대인 가지가 번듯 들었다. 그 광경을 본 세조는 신기하고 희유하여 연을 놓게 하고 그 나무를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복천선원에 당도 스님들의 영접을 받아 법당에 들러 불전삼배하고 3일간 법문을 들으며 기도를 하고 심기에 안위를 얻었으며 귀경 무렵 신미선사는 세조대왕에게 청을 드렸다. 강원도 상원사 위에 부처님 정골 사리를 뫼신 적멸보궁이 있는데 심산유곡하여 법당이 퇴락하였으나 중수가 어려우니 대왕께서 보궁을 중수하여 주시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 하니 세조는 쾌히 승낙차 사에 거주하는 학열스님을 공사감독으로 보내어 중수를 마치고 음력 6월에 낙성을 하게 되어 신미선사 초빙낙성에 참석한 세조는 6월 염천에 종일토록 땀을 흘려 부스럼이 가려워 많은 고통을 받고 야삼경에 이 수위병까지 각자 숙소로 돌아가게 하고 인적이 조용하여지자 문을 열고 개울물을 찾아 나섰다. 현재 관대거리에 이르러 의관을 모두 벗어 주변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목욕을 하는데 난데없이 동자가 통통걸음으로 내려오거늘 세조는 깜짝 놀라 "야 너 어디 가느냐?"하고 물으니 동자는 "예 밑에 마을에 가요"하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동자를 다시 불러내 "등목 좀 해다오" 하자 동자는 "예 그리하지요"하고 작은 두 손으로 몰을 끼얹으며 문지르니 그 차가운 개울물에 시원 상쾌함은 형언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 동자와 농이 벌어졌다. 세조는 동자를 불러 "너 나하고 약속을 한 가지 지켜야 한다.'라고 하자 동자는 "예 약속을 지키지요. 무슨 약속입니까?" 세조는 동자 보호 측면에 "너 마을 가거든 대왕 몸에 손을 대었다고 하지 말라"하니 동자는 "예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하나 대왕께서도 저의 약속 한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세조는 "암 지키지 무슨 약속인고?"하고 물으니 동자는 "이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세요." 하니, 대왕은 깜짝 놀라 문수보살하고 뒤를 돌아보니 因忽不見이었다.대왕은 섭섭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와 단숨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전신에 부스럼이 모두 없어지고 온 방이 부수름 딱지였다. 그리하여 속리산 복천선원에선 마음의 병을 오대산 상원사에선 육신의 병을 모두 나수었다. 대왕은 수행원을 따라온 조각사를 불러 목욕 시에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케 하여 상원사에 모셨으니 지금도 상원사에 전해오고 있다.

 

부도탑으로 가는 길에는 바위 면을 깎아 만든 돌계단이 있다

 

붉은 소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신미대사와 학조대사의 부도탑이 나란히 서 있다.

 

복천암 신미수암화상탑 ( 福泉庵 信眉秀庵和尙塔)

 

복천암 학조등곡 화상탑 ( 福泉庵 學祖燈谷 和尙塔)

 

세심정으로 다시 내려와 금강골 등로를 걷는다.

울울한 숲, 덩치 큰 바위들 사이로 맑은 계류가 흐른다.

주 등산로를 버리고 계류를 건너 비로산장에 든다.

암자 같은 산장이다.

 

누마루 딸린 방에 배낭을 푼다.

외벽에는 '觀水洗心' 액자가 걸려 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觀水洗心"  "맑은 물을 보며 마음을 씻는다'는 구절이다

비로산장 앞 금강골 맑은 계류를 바라보며 마음에 끼인 때를 씻어라 한다.한다.

산장 앞에 서 있는 가문비나무 두 그루는  관수세심하여 저렇듯 하늘을 찌르며 맑게 자라고 있는가.

 

물가에 서 있는 나무는 항상

관수세심하며

자신을 찾고 있는

수행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는

보살

 

믈가에 서 있는 나무는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각자(覺者)

부처

 < 물가에 서 있는 나무 - 김순희 >

 

금강골 계류 옆 에 있는암자 같은 비로산장

 

가문비나무 두 그루는 관수세심하여 저렇듯 하늘을 찌르며 맑게 자라고 있다

 

비로산장

 

 

 

                                                                                  하룻밤 머물렀던 누마루 딸린 방    

 

외벽에 걸려 있는 ' 觀水 洗心'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