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을 찾아서

2013. 12. 1. 12:21문화유적 답사기/사찰을 찾아서

 

(1)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磨崖二佛立像을 찾아서

 

구파발역 2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한 참을 기다려 703번 버스에 오른다.

벽제관을 지나 광탄으로 향하다 혜음령 고개를 넘어서니 용미리 작은 등성이에 희끗한 석불입상이 바라보인다.

용암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절 뒤 언덕에 보물 제93호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석불입상' 또는 '쌍미륵'으로도 불린다)을 품고 있는 용암사(龍岩寺)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위치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용미리 쌍미륵의 조성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고려시대)를 창건 연대로 잡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선종(宣宗:재위 1083~1094)이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중, 하루는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기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그곳에 실제로 큰 바위가 있어 서둘러 불상을 만들게 하였다.

그때 꿈에 보았던 두 도승이 다시 나타나 왼쪽 바위는 미륵불로, 오른쪽 바위는 미륵보살상으로 조성할 것을 지시하며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하며 기도하면, 아이를 바라는 사람은 득남을 하고 병이 있는 사람은 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불상이 완성되고 절을 짓고 나자 원신궁주에게 태기가 있어 한산 후 물(漢山侯 勿)을 낳았다고 한다. 
 

일주문과 사적비, 단아한 대웅보전과 뜰 앞의 석등과 석탑, 아름다운 처마선과 소박한 단청을 한 우아한 퇴설당, 봉덕사 종을 본 떠 만든 범종, 미륵전, 삼성각과 그 옆의 동자상과 7층석탑이 있다.

 

미륵전 옆에 서서 용암사 전경을 바라보니 요란스럽지 않은 전통사찰의 그윽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지난밤의  눈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누런 참나무 잎들이 바람에 부석거린다. 

 

절 뒤 돌 계단을 따라 오르니  소나무 사이로 거대하게 우뚝 솟은 하얀  쌍미륵 석불이 보인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공양을 바치고, 득남을 원하는 부녀자들의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쌍미륵

둥근 갓을 쓴 미륵불은 가슴 앞에서 양손으로 연꽃을 쥐고 있다.

사각형 갓을 쓴 미륵보살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미륵불이 쥐고 있던 가지 끝의 연꽃이 깨어져 없어진 것이 못내 아쉽다.

 

마애불로서 '쌍미륵'이라고 하는 11세기 고려시대 작품

전체 높이가 불두까지 합쳐 19.85m의 거대한 석불이다.

바위 사이에 세로로 생긴 자연적인 틈을 이용해 두 개의 불상으로 나누어 새겼다.

천연 암벽을 이용해 불신을 만들고 그 위에 목·머리·갓을 따로 만들어 올린 특이한 형태이다.

 

뒤편 장지산 기슭을 올라 미륵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바라보니 용미리 전경이 한눈에 바라 보인다.

북한산과 고령산을 잇는 삼각점인 장지산의 기슭

 

천년 세월 동안 이 쌍미륵은 이곳에 우뚝 서서

서울 서북부 일대의 광야를 굽어보고 있다.

 

제비꽃 
        
목 필 균   

 

피었던 꽃도 질 11월
용미리 쌍미륵불 발아래
피어오른 분홍 제비꽃

 

찬바람에도 꼿꼿한 작은 꽃잎은
천년 정진 보살의 자태로
오가는 불자들 마음에
꽃등 밝힌다

 

장지산 용암사 일주문

 

 

  

미륵전 옆에서서 용암사 전경을 바라보니 요란스럽지 않은 전통사찰의 그윽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대웅보전

 

 

  

아름다운 처마선과 소박한 단청을 한 우아한 퇴설당

 

 

  

봉덕사종을 본떠 제작한 범종(높이 187cm, 鐘口115cm)

 

 

  

미륵전.삼성각 옆의 동자상과 칠층석탑

 

 

구전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 어머니가 용암사 쌍미륵 석불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한다.

이 대통령이 재임 시 1954년 용암사를 참배한 후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7층석탑을 세웠다 한다.

원래에는, 동자상은 쌍미륵불 좌측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7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인하여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한 뒤 재야 관련단체들의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심하여 1987년 철거되어 요사채 우측에 옮겼다가,  

2009년 현 미륵전. 삼성각 옆으로  재차 이전하였다.

  

미륵전.삼성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보물  제93호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 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 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 문화재청 >

 

 

미륵불; 원립불圓笠佛, 미륵보살- 방립불方笠佛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공양을 바치고, 득남을 원하는 부녀자들의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석불상 좌측면에 석불조성에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 文跡과 미륵불상 법의 자락에 있는 조선 세조대왕의 명복을 비는 願文이라고 전하는 文跡과, 미륵보살상 법의 자락에 있는 정희왕후&nbsp;윤 씨의&nbsp;명복을 빌었다고 전하는 文跡들은 모두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북한산과 고령산을 잇는 삼각점인 장지산 기슭 1000년 세월 동안 이 쌍미륵은 이곳에 우뚝 서서서울 서북부 일대의 광야를 굽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