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동리 삼층석탑과 각화사

2011. 10. 13. 10:02문화유적 답사기/이백(二白)의 남쪽 자락 영주.봉화

(3) 서동리 삼층석탑과 각화사(覺華寺)

  남 화사터의 서동리 삼층석탑을 찾아서

 

하늘이 새파란 날이다.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에 있는 춘양종합고등학교 교정을 찾는다.

이 교정 한 귀퉁이 옛 남화사(覽華寺)터에는  동. 서로 마주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이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675)  원효대사는 이곳의 남화사를 폐하고 여기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각화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면서, 남화사(覽華寺)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覺華寺)라 이름을 지었다.

 

이 삼층석탑은 동탑과 서탑의 쌍탑 형식이다.

이 탑은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 상하 이중 기단위에 삼층의 탑신을 형성하였다.

1962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하였는데 당시 서탑은 사리함을 넣었던 사리공만 남아 있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함께 99개의 작은 토탑이 발견되어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춘양종합고등학교 교정

 

 

 

교정 한 귀퉁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

 

 

봉화 서동리 동ㆍ서 삼층석탑 (奉化 西洞里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52호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 91

 

춘양중학교 안에 동·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으로 쌍탑형식을 띤다. 이 곳은 신라의 옛 사찰인 남화사(南華寺)의 옛터로 알려져 있는데,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원효대사가 여기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이 절은 폐사되었다고 한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 모두 같은 양식이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규모가 줄어들어 뚜렷한 체감률을 보인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서쪽 탑에만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있을 뿐이며, 동쪽 탑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탑이 몹시 기울어져 있어 1962년 10월에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때 서탑에서는 사리함을 넣었던 공간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함께 99개의 작은 토탑(土塔)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비례와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석탑 옆 나무에는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조그마한 불상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다.

원래는 머리가 떨어져 나가 없던 것을 최근 만들이 얹어 놓았다는데 멀리서 보면 수행정진하는 스님의 모습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명상에 잠겨 있는 불상

 

   

太白山 覺華寺를 찾아서

 

각화사(覺華寺)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석현리(石峴里)에 있다. 태백산 줄기에서 뻗어나온 각화산 아래에 자리 잡은 절이다. 발갛게 익은 사과밭을 지나니 산은 점점 더 깊어지고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숲속 길로 들어선다. 신라 문무왕 16년 (676년)  원효대사는 춘양면 서동리에 있던 남화사를 폐하고, 이곳으로 옮기면서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라 이름 지었다. 이 절은, 맑고 청정한 계곡수가 사시사철 경내로 흘러들어 물이 마르지 않는 절이다.근래에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여 지금의 각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선원으로 전국의 수좌들이 모여 공부하는 가행정진 도량으로 이름이 나 있다. 또한 이곳은 조선시대 때 불, 물, 바람 삼재 불입지(三災不入地)로 꼽힌 실지로, 1606년 (선조 39년)에 太白山史庫를 짓고 1913년까지 약 300 년간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해왔다. 각화사는 태백산사고 수호사찰이 된 이후 수도승이 800인에 이르러 조선 3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해방 전·후 불타 없어지고 산사태 등으로 매몰되었던 것을 1988년 발굴하여 '봉화 태백산사고지' 사적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각화사로 들어가는 울창한 숲길

 

 

울창한 숲속에는 바람소리 새소리 들린다.

암자 오르는  오솔길  산기슭에 각화산 귀부와 부도전이 있다.

 

 

 

각화사귀부 (覺華寺龜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 126-1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는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무늬는 6 각형이 전면에 덮여 있고, 그 안마다 ‘王’ 자와 ‘卍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후에 비몸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문화재청)

 

원래 있던 비신은 없어졌으나, 최근에 기적비를 새겨 얹고 비석머리도 새로 만들어 얹었다.

 

   

귀부는 지대석과 같은 돌로 조성되었다.

 

 

 

 

각화사 귀부(龜趺)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같은 돌로 조성하였고 비좌는 약간 파손되었으나 거의 원모습이며 몸체에는 6각형의 귀갑문이 있고, 그 속에 '王'자와' 卍'자를 돋을새김하였다.

  

11 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는 부도전

 

'太白山 覺華寺' 현판을 단 월영루가 새파란 하늘에 까마득히 솟아 있다.

층계를 밟고 올라서니 부서진 이끼 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곳에서 100m 아래의 계곡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옮겨다 세워 놓은 것이라 한다.

 

 

 

월영루(月影樓)

 

 

월영루 옆에 서 있는  삼층석탑

 

                                    

돌계단을 딛고 석축 위로 올라서니 화사한 단청의 대웅전이 오롯이 서 있다.

마당에는 빗자루로 쓴 가지런한 자국이 선명하고, 티끌하나 없는 경내는 靜寂만 감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요사채의 거뭇거뭇하게 색 바랜 기둥과 툇마루, 그리고 나무무늬가 소박하고 검소한 멋을 풍긴다.

대나무 울타리를 두른 청정한 태백선원(太白禪院앞에는 "이곳은 수행정진하는 선원이오니 외부인의 출입을 삼갑니다"라고 쓴 팻말이 서 있다.

 

산세들이 연꽃처럼 둘러싼 포근하고 아늑한 태백산 각화사

눈 푸른 수행납자들의 가행정진(加行精進)으로 청정(淸淨)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대웅전

 

   

빗자루로 쓴 가지런한 자국이 선명한 대웅전 앞 마당

 

 

단청을 하지 않은 요사채의 거뭇거뭇한 색 바랜 기둥과 툇마루,그리고 나무무늬가 소박하고 검소한 멋을 풍긴다

 

 .

대나무 울타리를 두른 입구 앞에는 "이곳은 수행정진하는 선원이오니 외부인의 출입을 금합니다"  팻말이 서 있다.

 

 

 

 

가행정진(加行精進) 도량 각화사  태백선원(太白禪院)

 

  

산령각(山靈閣)

 

  

산령각에서 바라 본 각화사 당우

 

 

사자 석상 머리위의 다람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