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천재를 찾아서

2011. 2. 26. 13:24도보여행기/남명 조식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南冥 曺植의 발자취를 따라 지리산을 오르다.

(1) 山天齋를 찾아서

      2011. 2.12  토요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한 지 3시간 10분 만에 원지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도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행장을 꾸리고 옷깃을 여민 후 덕산을 향하여 걷는다.

 

경남 산청군은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이 있으며, 지리산에서 발원한 엄천강과 덕유산에서 발원한 위천이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에서 합류하여 경호강을 만들어 군의 중앙을 흐른다.

단성면 일대에서 경호강은 남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황매산의 양천강과 지리산의 덕천강이 각각 서류 동류하여 단성면 일대에서 만나 남강으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유역은 평탄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다.

 

 

얼음이 남아 있는 남강

 

                                                           

단성교를 건너 남강 뚝길을 걷는다.

남강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다

산천재 가는 길 주변에 있는 목면시배지, 겁외사(성철대종사 생가)를 들려야 하고,

또한 '산청삼매'를 지나칠 수 없으니, '원정매'가 있는 남사예담촌과 '정당매'가 있는 단속사지를 또한 빼놓지 않고 가야 하기에 오늘 일정은 뻑뻑하기만 하다.

 

목면시배지

 

목면시배지                                                                     

남강 뚝길을 걸어 배양마을 목면시배지(木棉始培址)에 도착하니, '삼우당문익점선생유허비'와 '삼우당문선생목면시배사적비' 두 기가 우뚝 서 있다.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삼우당 문익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류혁명을 일으킨 삼우당 문익점을 점필재 김종직은, "우리나라 열린 지 몇 천 년인가 백성이 옷 입는 것 다 이유 있네 선생이 가져온 그 물건 재화 되어 오래도록 영원하라"라고 기렸고, 세종 때 상국 남지는, "공민왕을 섬긴 신하로 곧은 절개 버리지 않았었네 중국의 간원에서 허위문서 불에 태우니 하늘의 은하수도 감동하였어라. 귀양살이 3년을 하였었건만 그 이 된 기운은 펄펄도 하여라.  몰래 좋은 씨앗 구해서는 고려 서울 개성으로 돌아왔고 무명베의 이를 끼쳐 우리 뭇 백성 옷 입혀 주었네"라고 제문에 써 삼우당을 칭송하였다.

 

  

 

 

묵곡교를 건넌다.

남강은 더욱 넓어져 진양호를 향하여 흐르고 있다.

 

겁외사(劫外寺)

 

                                                                      

겁외사(劫外寺)

'상대유한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를 지닌 겁외사는 산청군의 협조와 불필스님의 원력으로 2001년 창건되었다. 성철스님의 생가를 복원하였는데, 선친의 호를 따라 '율은 고거'라 이름하였고 전시관인 포영당, 사랑채인 률은재, 안채 세 부분으로 이루어 있다. 사찰 부분은 대웅전, 누각 벽해로, 심검당, 요사채로 구성되었고, 마당 중앙에는 성철스님의 동상이 있다. 대웅전 외벽 삼면에는 성철스님의 일대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성철 스님

 

                                                                                   

性徹(1912-1993)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고, 속명은 영주, 법호는 퇴옹이다.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 둘레에 철조망을 치고 10여 년 '장좌불와 동구불출(長座不臥 洞口不出)'의 수행으로 유명하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라는 법어로 온 국민의 불심을 일깨웠고,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던 스님은 오직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며, 평생토록 철저한 수행을 하였으며, 무소유와 청빈의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가 열반 후 다비식 때 수십만 인파가 가야산 해인사에 운집한 소이연이기도 하다.

 

오도송(悟道頌)

黃下西流崑崙頂     황하수 역류하여 곤륜산에 치솟으니

日月無光大地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도다

遽然一笑回首位     문득 한번 웃고 고개 돌려 서니

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있네

 

열반송(悅槃頌)

平欺狂男女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만 갈래나 되는데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내가 수행자로서 평생을 살았는데, 사람들은 내게서 자꾸 무엇을 얻으려라고 하고 있다. 실은 자기 속에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것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나만 쳐다보고 사니 내가 중생들을 속인 꼴이다. 그러니 나를 쳐다보지 말고, 밖에서 진리를 찾지 말고 자기를 바로 보아라. 각자 스스로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잘 개발하라.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면 그 누구라도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쓸 수 있다.  그 지름길이 바로 참선이다. 그러한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깨우치지 못하고 떠나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는 뜻으로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 고 하신 것이다."    (열반송을 풀이 한 원택스님 글)

 

포영당에서  바라본  전경

 

                              

 

경내에 자라고 있는 백송

 

                            

샅고개를 넘어 도평마을을 지나니 남사교가 나온다.

남사교를 건너 우측 사수천 둑길로 내려서 천변을 따라 남사마을로 향한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사수천에서 먹이를 찾던 백로가 후드덕 날아오른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길에 하루 묵었던 이사재에 오른다. 1857년에 건립되었으니 150여 년 된 고옥이다. 계자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대청 안창호가 아름답다.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고옥의 마당 댓돌 위 툇마루에 앉는다. 뜰에는 나무 그림자가 적적하고, 바람결에 가랑잎이 마른 소리를 내며 뜰 위를 돌돌돌 굴러갔다 굴러온다.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간질인다. 정녕 봄은 이미 와 있는가.

 

 

 

 

 

 

 

 

 

솟을대문 '거유문' 앞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남사마을이 한눈에 전망된다.

 

 

 

 

돌담장과 먹 기와집, 고목이 있어 더 아름다운 남사예담촌수백 년 된 고목들, 수백 년 간 내려온 고옥들은 현재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기에 더 아름답고 소중한 곳이다. 진양하 씨 고택에는 수령 600여 년을 넘은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는 매화나무가 있는데 '원정매(元正梅)'라 부른다.  '山淸三梅' 중의 하나다. 매화나무집이라고 표찰을 단 솟을대문은 자물통이 굳게 잠겨 걸려있다. 마을 사람에 물으니 집주인이 지방으로 출타 중이어서 집으로 들어갈 수 없어 매화나무를 감상할 수 없다 한다. 애석한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린다. 돌담장 길을 이리저리 걷는다.

 

 

 

 

 

 

 

 

 

 

사양정사 솟을대문 앞에는 흙담장 일부를 허물었는데 그 사이로 600년 된 감나무가 우뚝 서 있다. 들어가지 말라는 표찰이 붙어 있고 가림막으로 막아 놓았다. 수령 700년 된 감나무로 시수, 칠 덕수, 오 절 수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려말 원정공 하지의 손자가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기리기 위하여 심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다. 전형적인 반시감으로 산청곶감의 원종이기도 하여, 현재에도 감이 열리고 있다 한다.

 

 

 

 

 

 

사양정사(泗陽精舍)

"사양정사는 庚申(1920)년에 상량한 건물로 유학자 溪濟 鄭濟鎔(1865-1907)의 아들 鄭德永과 장손 鄭鍾和가 남사로 이전한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시천면 덕산 석남촌에 있었던 尊道齊와 단성면 구산촌에 있던 龜山書室을 이건한 다는 뜻으로 壬申(1932)년, 이웃에 이미 건축되어 있던 

이 건물을 매입하여 사양정사라고 현액 하였다고 한다. 정덕영이 자손을 교육하고 방문객을 맞아 교유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정제용이 매입하기 

이전의 초창과 관련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예담촌 남사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사양정사는 750㎡의 대지에 본채와 대문채 2동으로 구성되었다. 본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에 전후 퇴칸은 갖춘 규모로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누마루+방+방+대청 2칸+방+누마루로 되어있다. 화강석 두벌대 기단 위에 숙석 초석을 두고 외진 은 원주 내진은 방주를 세웠으며 굴도리와 소로로 수장한 반 5량 가이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집이며 천장이 높다. 부재가 굵고 치목이 정교하며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이 풍부하고 유리 등의 새로운 건축재료와 공법이 적용된 근대한옥으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문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광대한 규모로 홍살 달린 솟을대문이 내달기로 되어있으며 좌측 3칸은 광, 우측 3칸은 광 1칸 방 2칸이다. 대문칸의 높은 장초석이 두드러지며 화방벽 토벽 판장벽을 용도에 따라 시설하였다."(문화재청)

 

    

 

 

 

홍살 달린 솟을대문

 

 

 

 

 

 

 

 

 

 

 

툇마루에 환한 햇살이 가득하고, 계자난간을 두른 마루에도 환히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나무색깔과 나뭇결무늬가 고풍스럽다. 높이 솟은 홍살 달린 솟을대문, 먹기 와를 얹은 흙담장을 바라본다.

 

사양정사 옆으로 가 보니 수령 120년 된 배롱나무가 있는데 여름내 장마와 무더위를 이겨내면서 꽃을 피우는 나무다. 항상 이웃을 생각하라는 맘으로 사양정사에 심었다 한다. 

 

 

 

수령 220년 된 단풍나무가 부챗살처럼 가지를 펴고 있다. 가을이면 가장 아름답게 물이 드는 단풍나무가을이 지나면 어느덧 겨울채비를 걱정하는 종갓집 며느리 마음과 같이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면서 잠시 시름을 잊으라는 맘으로 이 나무를 심었다 한다.

 

 

 

남사예담촌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유명한 나무가 있다. 이 씨 고가로 들어가는 골목에 있는 X자 형태로 자라고 있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를 집에 심으면 가문에 큰 인물이나 큰 학자가 나온다고 하여 길상목으로 불리어졌고 양반집에서만 심었다. 또한 이 나무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맑게 해 준다 하여 일명 선비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곳 남사리의 회화나무는 마을의 지형이 쌍용교구로 용의 불을 막기 위해서 두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어 불의 기운을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X형태의 회화나무는 부부나무로 나무아래를 통과하면 금실이 좋은 부부로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한다.

 

 

남사마을 사랑나무

 

                                                                          

남사마을 사랑나무

흙담장을 따라 X형태의 회화나무 아래를 지나가 본다. 한 그루는 낮게 누워 뻗어 가지를 펼쳤고, 한 그루는 하늘을 향하여 거칠 것 없이 뻗어 올라 푸른 하늘에 가지를 활짝 펼치고 있다. 정말로 머리를 맑게 하고 시원하게 한다. 지금은 침묵하며 서 있지만, 머지않아 이 회화나무는 푸른 잎을 달고 노란 꽃을 활짝 피울 것이다.

 

 

 

                                                               

 

시간을 보니 12시가 훌쩍 넘었다.'예담촌 전통찻집'에 들려 녹차수제비를 주문하여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다. 무말랭이 무침이 일품이다.

  

사효재(思孝齋)와 향나무

1706년(숙종 32년) 아버지를 헤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 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효자비를 내렸으며 

후손들이 사효재를 지었다.

 

성주 이 씨 집안과 마을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한  향나무의 수령은 520여 년이다.

 

 

 

 

 

 

아직도 예담촌을 다 못 본 곳이 많지만 단속사지 정당매를 찾기 위해 부득이 발길을 멈춘다. 오늘 중 산천재를 찾아야 하는 일정이기에 걸어서 단속사지까지 왕복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남사리 정류장에서 당초 계획한 청계리행 버스( 원지발 13:35)에 탑승한다.탑승한다. 운리에 있는 단속사지 앞에서 내리면서 기사에게 청계리에 갔다 회차하여 이곳에 도착하는 시간을 물으니 50분 후라고 일러준다. 50분 안에 답사를 끝내야 한다.

 

단속사지는 지리산 자락이 길게 누워 멈춘 옥녀봉 아래 산청군 단성면 운리 마을 한 복판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 절의 창건에 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748년(경덕왕 7) 이준(李俊/李純)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에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통일신라 이래의 고찰로서 고승이 속출하여 1,000여 년의 법통을 이어왔는데, 1568년(선조 1) 유생들에 의해 불상·경판 등이 파괴되고, 이어서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후 재건되었으나 현재는 폐사가 되어 있다. 게다가 금당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제 모습이 크게 훼손되어 있다.

 

우리나라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행의 부도비와 대감국사 탄연의 비 등도 이곳에 있었다. 신행의 부도비 일부 비 편이 동국대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탄연의 비편 일부는 숙명여대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이 있었다고 하고, '신 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자취 알 길이 없다.

 

이곳에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삼층석탑(보물 제72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이 있고, 당간지주가 원래의 자리를 외롭게 지키고 있을 뿐이다.

 

 

 

동서삼층석탑

 

     

동서삼층석탑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정당매가 있다.

 

정당매(政堂梅)는 신라말에 창건된 단속사지에 있는 매화나무이다. 고려말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이 이 고장 사월리 오룡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단속사에서 수학할 때 이 매화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강회백이 벼슬길에 나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는데 이 벼슬이름을 따서 정당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회백이 고향에 들러 정당매를 보면서 지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斷俗寺手植梅         단속사에서 손수 심은 매화를 보면서            
      

遇然還訪古山來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滿院淸香一樹梅       한 그루 매화 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物性也能知舊主       무심한 나무지만 옛 주인을 알아보고
慇懃更向雪中開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반기네

      

 

 

 

정당매를 기리는 '정당매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1915년 건립된 시비에는 정당매각기, 통정 강회백의 시, 강회백 후손들이 이 지은 시 등 여러 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사명대사 유정이(1544-1610)가 젊은 시절 단속사에 머물면서, 덕천 산천재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남명 조식을 만났다 한다.

남명이 젊은 유정에게 시를 써 주었는데 나중에 그 시를 비석에 새겨 넣었다.

 

贈山人惟政

 

花落槽淵石

春心古寺臺

別時勤記取

靑子政堂梅

 

산사람 유정에게 주는 시

                                

꽃은 연못가 돌 위에 떨어지고

옛 절의 축대 위엔 봄이 깊었네

이별의 때를 기억해 두시도록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를

 

  

정당매

 

                                                                  

정당매는 수령이 약 630여 년을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본래의 나무는 고사하고 현재의 나무는 그보다 100년 뒤에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줄기는 본래 3개였으나, 지금은 윗부분을 잘라내 버린 상태다. 1999년도에 고사한 줄기에 외과적 수술을 하여 자연스러움을 볼 수가 없으며, 줄기 밑동이 부식되어 가고 있다. 줄기 밑동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名梅의 체통을 이어가고 있다. 꽃은 백색이고 꽃잎은 다섯 개이며, 향이 매우 짙다고 한다.

 

잔잔한 꽃망울이 가지에 매달려 있다.

머지않아 꽃망울을 터뜨리고 매향을 뿜어낼 것이다.

 

 

 

 

 

마을 길을 따라 오르다 단속사지를 뒤돌아 바라보니 시원한 조망과 함께 점점의 산봉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과연 대사찰이 있을만한 자리로 보인다.

 

 

 

 

앞 쪽으로 솔 숲을 거느린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간지주가 시원하다. 당간지주 뒤로 동서삼층석탑이 보이고 지리산 자락이 흐르고 있다.

 

 

 

 

단속사지 당간지주

 

                                                              

 

 

 

 

남명 조식의 흔적을 이곳 단속사지에서도 보게 된다. 

단속사지 입구 길목에 어설프게 만든 남명선생시비가 있다.

해묵은 선돌이 옆에 서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시를 읽고 있으려니, 멀리서 청계에서 회차한 버스가 오고 있다.

 

 

 

남사리에 내려 중산리행 버스에 오른 후 시천면 사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정류장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남명 기념관이 나온다.

성성문을 들어선다.

시원한 넓은 마당에는 우뚝우뚝 나무가 솟아 있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기와를 얹은 현대식 건물이다.

마당 좌측에는 남명 조식 동상과 신도비가 서 있다.

 

 

 

남명 기념관

 

                                                                        

 

 

 

 

남명 영정 :이 영정은 남명의 후예 조원섭이 그렸다.

 

                                                                         

남명의 영정은 칼을 차고 다녔던 선비의 기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또 이 모습은 평소에 남명이 닭울음을 듣고서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띠를 매고 자리를 바로 하여 꼿꼿이 앉아 어깨와 등을 빳빳이 한 모습이 마치 그림이나 조각상 같았다는 남명의 생활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남명 영정을 보면 허리춤에 방울을 2개 차고 있다. 남명은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신을 되돌아보았으니, 이 방울을 성성자(惺惺子)라 하였다. 남명은 경의(敬義) 검이라는 칼을 차고 다녔다. 그 칼에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 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를 새겨 자신을 수양하였다. 즉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경(敬)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는 뜻이다.

 

남명 영정 오른쪽에는 남명 제자 한강 정구의 ‘남명 조식선생 화상찬’이란 글이 있는데, 서예가 오산 강용순 씨가 글을 썼다.

이 글은 한강 정구가 지은 화상찬이 아니고 남명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지은 ‘제문’의 일부분이다. 

 

여재실을 보고 소나무 울울한 뒷산을 오른다.

산천재 뒷산인 현재의 묘소는 선생이 생전에 직접 정해 두었던 곳이라 한다.

묘소 앞에 서 있는 묘비에는 대곡 성운이 지은 남명의 묘갈문이 새겨져 있다. 

".... 슬프다. 공은 배움에 독실하고 행함에 힘써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감에 넓게 알고 깊게 깨달아 견줄 만한 이가 드물고, 또한 어진 이에 추배 하여 후학들의 종사로 삼을 만하거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그 평함이 자못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오늘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리오?  백세 먼 뒷날 아는 이가 나와 알아줄 것을 기다릴 수밖에..."

 

 

남명 묘소

 

                                                                        

 

 

 

 

 

 

후대인 세운 비석 3기를 묘소 귀퉁이에 따로 모아 놓았다.

 

                                            

묘소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덕천강과 덕천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세 개의 산들이 삼세불인 듯 서 있다.

61세에 덕산에 들어 산천재를 짓고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 72세에 죽음을 맞았다.

 

 

 

 

산천재(山天齋)

"이곳은 남명 조식이 61세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장소이다. 山天이란 주역 대축괘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명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국왕에게 세 차례 글을 올려,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과, 백성을 위한 정치르 할 것을 건의하였다. 우리 정신의 큰 봉우리인 남명의 학문과 인격을 완숙한 경지로 끌어올린 이곳 산천재, 우리는 여기서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던 노학자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지리산을 본받고자 했던 남명이 이곳에서 지은 것으로, 남명의 훌륭한 뜻과 높은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鐘        

非大無聲         

爭似頭類山        

天鳴猶不鳴                     

                            

덕산 계정의 기둥에 씀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頭流山)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산천재 마당 한 곳에 '남명학연구원'이라는 간판을 단 고졸한 건물을 지난다.

 

 

 

담장이 둘러서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남명매가 서 있고 그 너머 멀리 천왕봉이 바라 보인다.

우측으로 산천재가 있는데 저녁 햇살로 남명매의 실루엣이 댓돌 위에 투영되고 있다.

 

 

 

남명매

 

        

 

 

이 매화나무는 남명이 61세 때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뜰에다 심은 것이라 한다. 기품 있는 모습은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사람들이 남명이 심었다 하여 남명매(南冥梅)라 부른다. 수령 440여 년으로 추정되며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꽃 색깔은 처음 필 때에는 분홍빛을 띠지만 나중에 백색으로 피고 꽃잎은 중간형이며, 꽃잎 수는 17-18개의 중엽매화이다.

 

산천재 주련에는 "德山卜居(덕산에 터를 잡고서)" 시가 걸려 있다.

春山底處无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有餘       

        

봄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 건가?
십리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산천재

 

                                                                       

 

 

 

 

"산천재 툇마루에 올라가 위를 바라보면, 정면에는 소나무 아래에서 신선이 바둑을 두는 그림이 있고, 왼쪽애는 농부가 소를 모는 그림, 오른쪽에는 버드나무 밑에서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그림이 있다.

장자에 전하는 고사로, 허유라는 은자는 요 임금으로 부터 천하를 맡아 달라는 말을 듣고 거절한 뒤,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 그러자 소부라는 이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산천재 그림에 나와 있는 선비는 허유이고 농부는 소부이다.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고고하게 살았던 남명의 삶을 그린 그림이다." (문화유산답사회)

 

 

 

 

 

 

 

 

 

산천재 툇마루에 앉아 석양이 내리는 남명매를 바라본다.

석양은 덕천강에 부서지고 있다.

남명매의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경의검을 차고 다닌 선비, 성성자를 달고 다니며 소리가 울릴 적마다 자신을 경계하였고, 산림처사로 고고하게 살았던 남명의 삶을 떠 올려본다.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두류산(지리산)을 본받고자 했고, 두류산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12번의 지리산을 오른 후인, 61세 되는 해에 이곳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거처를 옮겼다.

그의 나이 58세 때인 1558.4.10부터 26일까지 17일간 12번째로 지리산 일대를 유람한 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유람기를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물도 보고 산도 보고 사람도 보고 세상도 보았다"라고 적었다.

"참된 문화유산 답사는 자연을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인들의 자취와 그들이 살았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남명은 일깨워 준다.

 

 

 

 

산천재를 뒤로하고 덕천서원을 향하여 걷는다.

덕천강변의 도화정을 지난다.

도화정 옆에 서 있는 시비에도 남명의 시가 새겨져 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으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세심정(洗心亭)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는 세심정은 남명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등이 중심이 되어 덕천서원을 지을 때 함께 지은 정자이다. 세심(洗心)이란 말은 주역(周易)의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聖人洗心)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세심정에 올라 마음을 깨끗이 씻어 본다.

 

 세심정 옆에는 남명의 시비가 있다.

 

浴川 

 

全身四十年前累
千斛淸淵洗盡休
塵土倘能生五內
直今刳腹付歸流

 

냇물에 목욕하고서

 

 만약 오장(五臟)속사십 년 동안 더럽혀져 온 이네 몸

천 섬 되는 맑은 깊은 못에 싹 씻어 버린다
만약 오장 속에서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 갈라 흐르는 물에 던지리라

 

 

 

세심정

 

 

 

 

  

 

 

 

덕천서원(德川書院)

"남명 조식(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사액서원이 되어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당, 신문, 강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이다. 공부하는 공간이 앞쪽에 있고 사당이 뒷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칼찬 선비, 조선 선비의 으뜸 남명 조식은 임종 시 그의 제자에게 "나의 이름 앞에 어떤 벼슬도 쓰지 말라" 하였다. 율곡 이이는, "근대에 이른바 처사로서 끝까지 그 지절을 지키고 벽립천인(壁立千인)의 기상을 우뚝 세운 이로는 공을 짝할 사람이 없다" 하였다.

 

 

홍살문 옆에는  450여 년 된  고목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덕천강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다.

덕산정류장으로 가 중산리행 버스에 오른다.

사위가 깜깜할 때 중산리에 도착한다.

위층이 민박인 식당에 들어 저녁 식사하고 숙소에 배낭을 푼다.

분주히 돌아다닌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