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지리산

2011. 3. 1. 12:49도보여행기/남명 조식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2)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두류산(지리산)

       2011. 2. 13.  일요

 

06:40분 날이 부옇게 밝아오는 새벽 민박집을 나선다.

지리산을 오르기 전에 먼저 천왕 성모를 찾아가기 위해 천왕사로 향한다.

해가 뜨지 않은 뿌연 새벽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절마당이다.

절마당 왼쪽으로 올라 들어가니 천왕성모전과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바위 윗부분을 파고 그 위에 천왕 성모상을 안치하였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서 천 년 동안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견뎌 온 성모상.

지난 1970년대에 이 석상을 우상이라 간주한 모 종교 신자들이 몸체와 머리 부분으로 두 동강 내어 천왕봉 아래로 굴러 떨어뜨려 행방이 묘연하였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 중산리에서 태어나서 자란  현 천왕사 주지 혜범이 '천왕할매'의 현몽으로 86년 진주 비봉산 과수원에 숨겨진 머리 부분과 천왕봉 남쪽 통신골에서 몸체부분을 찾아내어 봉합작업을 한 뒤 이곳 천왕사에 만신창의가 된 성모상을 안치하였다. 그 이후로 이 성모상은 천왕봉 자리에 아직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그높이 약 1.2m 너비 50cm의 앉은 자세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이 성모상은 검은 돌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특이한 돌로 만들어졌다. 성모상은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고, 얼굴은 통통하다.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오뚝하게 표현된 코밑으로 작은 입이 조각되어 있다. 상반신에는 저고리를 입고 있는 듯하며, 가슴께로 손을 모아 마주잡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박혁거세가 그의 어머니를 지리산 산신으로 봉하여 국가의 수호신으로 섬기면서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고,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고려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산신으로 모셨다고 적고있다. 혹자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 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민간의 무속적 치성과 경배의 대상물이었던 점에서 삼신할미상, 마고할미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성모상에 대한 분분한 설이 많다. 여하튼 천왕 성모상은 지리산을 수호하는 민간신앙의 여신이었고, 고대로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석왕사에 안치된 천왕 성모상

 

    

천왕봉에 있었던 天王祠 (사진출처:국립공원 깃대종)

 

 

천왕봉 天王祠에 있었던 성모상과 석상 (사진출처: 지리칼럼김경렬 님;사진)

 

                                

 

중산리에서 천왕봉 오르는 길은 남명의 시비로부터 시작된다.

 

頭流山 兩斷水를 예듣고 이제 보니

桃花뜬 맑은 물에 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武陵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법천골 입구에서 법계교를 지나면 자연석 위에 세워진 까만 비석이 보인다.

"山을 위해 태어난 山사람 宇天 許萬壽 追慕碑"다.

뒷면에 새겨진 비문을 옮겨 본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사람들이 일러 산사람이라 했던 그 분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진주시 옥봉동 태생으로 일본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 시 이미 산을 가까이하고자 하는 열정이 유달랐던 분이다. 님은 산살이의 꿈을 이루고자 40여세에 지리산으로 들어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산을 찾는 이를 위해 등산로 지도를 만들어 나눠주기도하고, 대피소나 이정표시판을 세우기도 하고, 인명구조에 필요한 데는 다리를 놓는 등 자연을 진실로 알고 사랑하는 이만이 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길을 개척해 보였다. 조난자를 찾아 헤매기 20여 년, 조난 직전에 사람들을 구출하거나 목숨을 잃은 이의 시신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옮겨 치료한 일 헤아릴 수 없으며, 지리산 발치의 고아들에게 식량을 대어주고, 걸인들에게 노자를 보태어 준 일 또한 이루 헤아릴 길 없으니, 위대한 자연에 위대한 품성 있음을 미루어 알게 되지 않는가.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 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산을 사랑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바람처럼 살다 흔적 없이 사라져 지리산 품에 안긴 진정한 산사람 우천이다.

 

우 천 허만수 추모비

 

                  

                     

추모비 뒷면

 

                                            

남명 조식은 '유두류록'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일찍이 이 산을 왕래한 적이 있었다.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동, 신흥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다. 이러하니 어찌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한 것이라면 번거로운 산행을 꺼리지 않았겠는가?  평생 동안의 계획인, 화산(華山)의 반을 빌어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으려 했던 것일 뿐이었다."

 

남명은 지리산을 12번 오르면서, 한편으로 여생을 마칠 적당한 장소를 눈여겨보며 다녔던 것 같다. 남명 조식은 61세 되는 해에 두류산 양단수가 모이고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매화나무와 천왕봉을 늘 바라보며 만년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며 살았다. 두류산을 사랑한 그는 덕산계정의 기둥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놓고 두류산(지리산)을 본받고자 했다.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頭流山)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지리산에 입산하여 천왕봉을 오른다.

이성부는 중산리 사람을 부러워하고 남명선생을 기린다.

 

남명선생

중산리 사람들은 좋겠다
날마다 천왕봉 고개 들어 우러르는
중산리 사람들
저마다 가슴이 천왕봉 하나씩 품어
무엇에 노여워도 눈 감음
저를 다스리거나 돌아보거나
깨우치거나 해서 좋겠다
저 아래 덕산골 살았던 남명선생
하루에도 몇 번씩 산봉우리 쳐다보며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는
크고 넉넉한 마음
벼슬길 마다하던 그 까닭 알겠거니
소인배 들끓는 세상에서는
군자가 저를 감추어 더
고요해지는 일 내 알겠거니
           

  

칼바위

                                                                                 

칼바위도 지나고, 망바위도 지난다.

 

망바위

 

 

헬기장에 도착하니 법계사 전경과 천왕봉이 가깝게 한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돌리니, 산넘어 산 또 산 연봉의 산 능선들이 조망된다.

 

 

 

 

 

  

로터리산장 샘터 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법계사 일주문을 지나 미끄러운 돌계단을 오른다.

 

법계사 일주문

 

                                                                             

법계사(法界寺)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 1450m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하였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태종 5년(1405년) 벽계 정심이 중창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과, 1910년 한일합방 때 또다시 왜인에 의해 불타고, 1938년 청신녀 신덕순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6.25 동란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초라한 초옥으로 3층석탑을 지켜오다 불자와 신도들의 발원으로 현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계사 적멸보궁

 

                                                 

 

법계사 삼층석탑

 

                                                                    

법계사 삼층석탑 (보물 제473호)

이 석탑은 법계사의 산신각 앞에 있는 높이 3.6m의 거대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이용한 이형석탑이다. 기단부는 자연암반의 윗면을 삼단으로 가공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고르고 그 위에 몸돌을 얹었다. 자연암반을 기단석으로 이용한 예는 신라 이래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하부 기단부를 모두 생략한 예는 많지 않다. 지붕돌은 두텁고 지붕주름은 각 충이 삼단으로 되어 있으며, 후대에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이는 포탄형의 석재가 상륜뷰에 얹혀 있다. 전체적인 모습과 만든 수법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탑의 높이는 2.5m이다. 법계사는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지금은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법계사 삼층석탑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은 곳이 많아 개탄스럽다.

경관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남명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일을 두고서 '유두류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암도 ‘시은 형제’라는 글자를 새겼으니,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차하게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 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구한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후세 사람들이 날아간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두예(杜預)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업적만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삼층석탑 가는 길목에 샘터가 있다.

얼음을 깨고 조롱박으로 물을 떠 몇 번이고 마시니 오장육부가 시원하고 머리가 맑아진다.

기백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삼층석탑 아래로 산넘어 산 연봉들이 겹겹이 이어지며. 영원한 세계가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자리를 떠 날 줄 모르고  하나의  바위가 된다.

 

바위

유 치 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삼층석탑과 법계사 앞쪽 세존봉 능선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세존대)는 일본의 후지산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고 한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는 옛 구전으로 왜구의 침범과 소실이 자주 발생하였고, 고려 때 왜국

아지발도가 법계사에 불을 지르고 운봉전쟁에서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파란 하늘아래 개선문을 지난다.

 

개선문

 

                                                                   

남강 발원지 천왕샘은 얼어붙어 있다.

눈도 많이 쌓여 있고 미끄럽기도 하여 아이젠을 착용한다.

 

남강 발원지 천왕샘

 

                                                                       

막바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른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일망무제 연봉들이 중첩하여 아득하게 보인다.

 

 

 

눈 쌓인 천왕봉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다.

 

 

 

 

 

 

 

천왕봉 정상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천왕봉 표지석 주변은 사진을 찍느라 빈틈이 없다.

천왕봉 표지석 위치를 조금 옮기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사진 찍기에 참으로 불편한 위치에 있다.

천왕봉 표지석의 위치와 모양도 그동안 많이 바뀌어 왔다.

 

천왕봉 제일 높은 바위 아래 누운 바위에 "日月臺"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을 일 월대라 한다.

일월대 뒤로 지리의 연봉들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있다.

 

 

 

 

일월대 각자

 

                                                                         

 

일월대 각자

 

                                                                 

하늘을 떠 받치는 기둥이 지리산 천왕봉이다.

천왕봉 바위에 '天柱'라 새겨져 있다.

 

천주( 天柱) 각자

 

  

 

 

천왕봉에는 일곱 개의 거북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네 개는 찾았는데(?) 나머지는 시간 관계상 찾지 못했다.

 

거북바위

 

                                                             

거북바위

 

                                                                     

거북바위

 

                                                                         

거북바위

 

                  

큰 거북바위

 

                                                                      

새파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천왕봉 하늘 기둥이 아름답다.

'사랑한다'하는 하는 것처럼 하트 모양의 바위가 서 있다.

 

 

 

통천문을 지나 제석봉을 향한다.

 

통천문

 

                                                                          

제석봉

 이 성 부

 

참을성이 많은 봉우리다 있는 듯 없는 듯
넓게 펑퍼짐하게 저를 받들고 있다
아래로는 뼈다귀처럼 드러난 영혼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솟아올라
내 발걸음 자꾸 멈춰서 돌아보게 한다
덕을 쌓고 넓히고 베풀어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무엇 하나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잠잠하여 마르기만 할 뿐이다
힘겨워하는 산 사람들 등을 밀어
위로 위로 올려 보내고
구름과 바람은 장터목으로 내려 보낸다
제 몸을 스쳐가는 것들
저를 때려도
그냥 그대로 앉아 있음이여

 

 

 

 

 

 

 

 

제석봉 고사목

 

                                                                 

 

고사목

이 성 부

 

내 그리움 야윌 대로 야위어서
뼈로 남은 나무가
밤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밤마다 조금씩 손짓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한 오십 년 또는 오백 년
노래로 살이 쪄 잘 살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
불벼락 맞았는지
저절로 키가 커 무너지고 말았는지
먼 데 산들 데리고 흥청망청
저를 다 써버리고 말았는지
앙상하구나
그래도 사랑은 살아남아
하늘을 찔러
뼈다귀는 뼈다귀대로 사이좋게 늘어서서
내 간절함 이토록 벌거벗어 빛남이여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니 오후 4시를 넘어섰다.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물물교환과 물건을 사고파는 장이 섰다 하여 장터목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석양 긴 빛이 장터목을 비치고 있다.

세석산장까지 가기가 다소 부담스럽다.

세석대피소에 전화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장터목 대피소에서 묵는다고 양해를 구한다.

저녁 후 일몰 촬영을 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몸이 고단하여 잠자리에 든다.

 

 

장터목대피소

 

                                                                     

 

 

 

  

2011.  2. 14.  월요

 

참으로 놀라운 밤이었다.

코 고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대피소의 밤을 보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새벽 천왕봉 일출을 보러 가는 산님들로 인해  어느 순간 대피소가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도 일어나 행장을 꾸린다.

새벽 5시 40분 장터목 대피소를 나서니 구름 없는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세석고원으로 가기 위해 연하봉으로 향한다.

 

 

 

 

 

 

 

 

 

 

산길에서      

            이 성 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 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도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되는지를 나는 안다

 

 

 

 

 

 

 

촛대봉 고개에서의 일출

 

                                                                      

 

 

 

 

 

지리산 세석평원의 철쭉

배 한 봉

 

   1.
내 사랑 그녀, 돌 속에서 꽃을 피웠네
천년만년 돌 속에 앉아
돌아오지 못하는 내 사랑 그녀,
슬픔과 두려움이 눈보라처럼 허옇게
훑고 가는 그 폐허, 결빙된 돌 속에서
불을 꺼내었네
세상으로부터 잊힌 사랑이라지만, 그 어떤 광기의
칼바람도 다스리지 못하는 피의 불
細石을 다 태우고도
그녀는 돌 속에서 돌아오지 못하네

 

   2. 
옛날 옛적에 平也와 蓮眞이라는 연인이 있었네 씨족사회의 엄한 규율과 관습을 피해 대성동 계곡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네 처음으로 지리산 사람이 된 이들은 산나물과 열매로 연명했지만 은방울꽃 같은 웃음이 날마다 피어났네 여름이나 겨울, 그 사나운 폭우와 폭설이 길을 끊어도 산막집 등불은 꺼지질 않았네 이 골짜기에는 사람 되기를 기다리는 곰과 호랑이도 살았네 산막집 절구도 찧어주고 음식도 나눠 먹었네 겨울 가고 봄 오고 또 몇 년이 지났네 언젠가부터 蓮眞의 청초한 미소 뒤에 엷은 그늘 깔리기 시작했네 이 까닭을 눈치챈 검은 곰이 산신령님만 내릴 수 있는 秘方 하나를 넌지시 알려주었네 세석평원에 있는 陰陽水 물을 마시면 자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걸 엿들은 호랑이가 산신령님께 고자질을 하고 말았네 평소 蓮眞을 흠모해 온 호랑이는 산신령님이 이 공로를 인정해 사람이 되게 해 주리라 생각했었네 이 비밀을 누설한 검은 곰은 평생 토굴에 갇혀 살게 되고, 蓮眞은 자갈로 덮인 평원을 꽃밭으로 일궈내야만 돌아갈 수 있다는 벌을 받고 말았네 산열매를 따서 돌아온 平也는 몇 날 밤낮 蓮眞을 찾아 헤매다 호랑이의 질투에 목숨 잃고 말았네 이 일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손이 닳아 터지도록 자갈을 실어내고 꽃밭을 일궈나갔네 이때 그녀 손에서 떨어진 한 맺힌 붉은 피가 방울방울 꽃이 되었네 피의 꽃, 철쭉이 되었네 일궈도 끝내 다 일궈낼 수 없었던 세석평원, 오늘 보니 천왕봉 산신령님 향해 속죄하다 망부석이 된 촛대봉 앉은 바위 그녀가 풍화의 세월 건너왔네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그때 그 사랑의 빛깔로, 내 안에 들어와 참 환한 마음을 켜들었네

 

   3.
돌 속에서
그녀가 꺼내든 꽃

 

먼 길 돌아온
몹쓸 시간, 몹쓸 세월
죽어서나 만나자고
하늘 가장 가까운 데서
피는 꽃
오늘은,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뚝, 뚝 떨어지네

 

사랑 때문에 아픈 세상
앓으며 늙는 일도 아름다운 가치라고
일러주는
그때 그 산막집 등불 꽃!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여 산지기에 대성동골로 하산하고자 하는데 눈길 상태를 물으니, 그쪽 길은 워낙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눈 쌓인 길 상태가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대답한다.

대성골로 내려 의신마을을 거쳐 화개동천을 걸어 쌍계사로 가고 저 했던 계획을 접고 부득이 거림골로 하산하기로 한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여 취사장에서 음식을 조리하는데, 거구의 한 사나이 다가오며 "밥을 좀 드릴까요?" 하며 내민다.

"아, 있는데요.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한다.

원래 위치의 세석 식수원이 꽁꽁 얼어붙어 2-300m 아래에 식수원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

수통에 물을 받아 시원하게 들이켜고 물을 가득 채운 후, 눈 쌓인 철쭉터널을 걸어 내려간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나무 그림자가 투영되고 있다.

산죽이 눈 속에 묻혀 푸른 잎을 내밀고 있다.

구상나무도 지난다.

산죽밭도 지난다.

수피가 종이장처럼 벗겨지는 거제수나무, 줄기에 얼룩무늬를 한 노각나무, 참나무. 피나무도 지난다.

당단풍나무. 다래나무. 개서어나무. 고로쇠나무도 지난다.

산죽이 온 산등성이 가득하다.

거림골은 얼음이 녹으며 봄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어느덧 거림골 등로 입구 소나무 앞에 당도한다.

거림 민박촌이 나타난다.

거림마을을 지나 내대천을 따라 걷는다.

한가로운 산골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된다.

산에는 이미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다.

'무릉도원' 너와집이 보인다.

 

 

 

 

 

 

 

 

 

 

 

 

 

하늘아래 첫 동네 남대마을을 지나, 예치마을에 도착한다.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예치마을은 1997년 산청 양수발전소 건설로 하부댐 수몰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이주 정착을 위해 산청호 주변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민박촌을 형성하고 있다.

 

예치마을 쉼터에 앉아 쉬며 버스를 기다린다. 못 보고 온 남사마을 정당매를 오늘은 볼 수 있을까 하여 사양정사 문화해설사에 전화를 거니, 부산 간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죄송하다고 한다.

 

남명은 "유두류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높은 산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준다면, 십 층의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것이다. 바다와 산을 3백 리 길이나 유람하였지만, 오늘 하루 사이에 세 군자의 자취를 다 보았다. 물만 보고 산만 보다가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 산속에서 10일 동안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사이에 좋지 않은 생각으로 바뀌었다. 후에 정권을 잡는 사람이 이 길을 와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는지 모르겠다. 또한 산속에서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세 군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만고에 전해질 것이니, 어떻게 바위에 이름을 새겨 만고에 전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참된 문화유산 답사는 물도 보고 산도 보고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면서, 선인들의 자취와 그들이 살았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남명선생

이 성 부

 

세상에 나아가서 부대끼는 사람보다
세상에서 숨어 귀 막고 눈 가린 사람이
세상을 더 잘 터득하는 법!
큰 산을 끌어와서 방에 가두고
좁은 문 닫아 잠그면
그리운 얼굴들 이리저리 헤매어 신발 찾는 일
선연하게 내려다보이느니
바람 불어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귀가 트이고 눈이 밝아져
잠자코 있음도 오히려 살맛 난다네
큰 산속에 묻힌 외로움과 어깨동무
만권 서책 즐거움과 호미거리
사람도 큰 산에 숨으면
그 산을 닮아 더욱 커져가는 것
내 오늘에서 깨달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