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당 시문학 마을 질마재를 걷다

2011. 1. 31. 14:24도보여행기/고창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

(3) 미당 시문학 마을 질마재를 걷다

    2011. 1.22  토요  맑음

 

선운사 주차장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심원행 군내버스를 탑승한다.

시간을 보니 08:30분이다.

용선교 삼거리에 정차해 줄 것을 부탁한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버스 기사가 "미당시문학관을 가시는 군요." 한다.

"예."

"그러면 김성수 생가를 꼭 들려 구경하세요.' 한다.

자연산 장어에 대해 물으니,

요즈음도 봄가을 두 차례 인천강에 돌무덤을 쌓아 두고 장어를 잡는단다.

밀물 썰물이 오가면서 장어들이 돌무덤으로 들어가면 돌무덤을 중심으로  어망을 치고 돌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장어를 잡는다 한다.

자연산 장어는 배가 누렇고 나머지 부분은 시꺼멓다고 한다.

000 집에 가면 자연산 장어가 있다고.

용선교를 건넌다.

옛날에는 이곳이 좌치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 다니던 곳이다.

인천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음을 실감 나게 한다.

 

인천강


용선교를 건너면 부안면 선운리다.
 
멀리 변산이 보인다.

눈 쌓인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미당 시문학 마을' 안내 간판이 보인다.

'선운리 진마마을' 표지석도 보인다.

 

 

진마마을 가는 길

 

 

 

 

 

 

 

진마마을 입구에는 사찰 입구의 일주문처럼 '대시인의 의자'를 세워 서정주가 시인공부에 입문하는 과정을 불교 디자인으로 표현하였다.'대시인의 의자'는 서정주가 어린 시절, 시인 공부의 입문 과정을 소학교 시절의 의자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서정주는 이 의자로부터 자라 대시인이 되었고, 의자도 시인을 따라 거대하게 자랐다.

 

대시인의 의자

 

대시인의 의자

진마마을의 '대시인의 의자' 뒤로 진마마을과  멀리 소요산이 보인다.

미당의 생가 초가지붕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마을 정자 처마 끝의 풍경이' 쟁그렁 쟁그렁' 소리를 내고 있다.

 

 

생가 둘레에 서 있는 장승 사이에 '국화와 산돌'이라는 미당의 시가 걸려 있다.

菊花와 산돌

 山에 가서 땀 흘리며 주워온 산돌.

하얀 순이 돋은 水晶 산돌을

菊花밭 새에 두고 길렀습니다.

 

어머니가 심어 피운 노란 국화꽃

그 밑에서 내 산돌도 놓아두고서

아침마다 물을 주어 길렀습니다.

 

 

 

마당 

봄에서 가을까지 마당에서는

山에서 거둬들인 온갖 나무 향내음

떡갈나무 노가주 산초서껀 섞어서

아버지가 해다 말리는 山엣나무 향내음.

 해가 지면 이 마당에 멍석을 펴고

왼 식구가 모여 앉아 칼국수를 먹었네

먹고선 거기 누워 하늘의 별 보았네

희한한 하눌의 별 희한스레 보았네

 떡갈나무 노가주 산초 냄새에

어머니 아버지 마포 적삼 냄새에

\어린 동생 사타구니 꼬치 냄새에

더 또렷한 하눌의 별 온몸으로 보았네

 

 

어린 시절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우물과 장독대도 보인다.

 

                 

  

사랑채 有鄕齊
"다섯 살 때" 시

                                                                                                                                                                      

다섯 살 때

내가 고독한 자의 맛에 길든 건 다섯 살 때부터다.

부모가 웬일인지 나만 혼자 집에 떼 놓고 온종일을 없던 날,

마루에 걸터앉아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다등잇돌을

베고 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것은 맨 처음으로 어느 빠지기

싫은 바닷물에 나를 끄집어들이듯 이끌고 갔다. 그 바닷속에서는,

산비둘기라든가-- 어머니한테서 이름 만든 형체도 모를 새가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초파일 연등밤의 초록등불 수효를 늘려가듯

울움보를 늘여 가면서, 침몰해 가는 내 주위와 밑바닥에서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뛰어 내려서 나는 사립문 밖 개울 물가에 와 섰다. 아까 빠져있던

가위눌림이 얄따란이 흑흑 소리를 내며, 여뀌풀 밑 물거울에

비쳐 잔잔해지면서, 거기 떠 가는 얇은 솜구름이 또 정월

열나흗날 밤에 어머니가 해 입히는 종이적삼 모양으로 등짝에

가슴패기에 선선하게 닿아 오기 비롯했다.

 

 

진마마을이 낳은 대 시인의 시와 글을 읽어 보며 생가 이곳저곳을 서성거린다. 

진마마을 입구 길 건너에 미당의 외가가 있다.

원래는 전통 초가가 있었으나 헐려 없어지고 현재는 정미소가 들어서 있다.

이 벽에는 미당의 시와 글이 걸려 있다

미당은 어렸을 적 외할머니 무르팍을 베고 누워 수많은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외할아버지와 일찍 사별한 외할머니 노 씨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자신이 읽은 책들을 모두 암기, 어린 서정주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미당에게 훗날 많은 영향을 주었고 미당문학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외할머니의 뒤꼍 툇마루

 외할머니네 집 뒤꼍에는 장판지 두 장만 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 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들이비칩니다. 그래 ,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당의 생가 이웃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을 들어선다.

마치 등용문을 들어서는 것 같다.

문학관 뒤로 소요산이 보인다.

 

미당 서정주(1915-2000)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생전에 15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약 70년의 창작 활동기간 동안 1,000여 편의 시들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뚜렷한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치는데 초기의 원색적이고 강렬한 관능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미학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다가 노년에는 달관과 원숙미를 표방하는 쪽으로 귀착된다.

 

현대의 시인들 중에서 만해, 소월, 지용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시인 평가에 대한 각종 자료에서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생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다섯 번이나 추천되었지만 수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한국문학이 도달한 최고의 미학적 형상력, 또는 후대에게 미치는 가장 강렬한 미학적 감화력의 주인공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 후반의 친일작품 발표 문제 및 독재정권 지지와 찬양 문제로 인해 문학계 안팎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주요 저서  시집 《화사집》(1941), 《신라초》(1960), 《질마재 신화》(1975),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 
주요 작품  시 《화사》《자화상》《귀촉도》《국화 옆에서》《동천》《추천사》《춘향유문》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은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새롭게 단장하여 지은 것이다.

이곳에서는 소요산과 질마재가 보이고 시원한 곰소만 바다와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변산능선이 바라다 보인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읊었던 그 바람을 느끼며 운동장을 걷는다.

왼쪽 온동장 가에는 '바람의 자전거' 조형물이 서 있다.

 

 

자화상이라는 시와 조형물의 내력을 쓴 안내문이 있다.

 "이 자전거는'바람의 자전거'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를 조형화했다.

두 바퀴는 8자를 표현하고, 또한 영원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바람의 역동성을 꿈꾸며, 질마재 고개를 힘들게 넘어가듯 세상의 소중한

비밀을 알고자 힘써 노력하는 모든 문학 소년들의 꿈을 상징화한 것이다."

 

자화상을 옮겨 본다.

 

자화상 

아비는 종이 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아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 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 한 어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外할아버지의 숯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찰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 마음에 얹힌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 만 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미당시문학관에는 미당의 친필원고와 생전에 사용하던 소품과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질마재의 노래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우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 리요?

 

 

 

 

                     

 

화사(花蛇)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뱀…….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이냐.

 

색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거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색대님 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뱀!

 

 

 

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 나 삼아 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 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홀로 가신 님아.

 

 

 

 

 

"미당은 노년에 세계의 산 이름을 즐겨 외웠다.

나라와 높이까지 곁들여서 외운 이 이름들은 모두 1,625개 미당은 매일 아침 특유의 염불 하는 듯한 목소리로 산 이름을 불러냈다.

미당은 기억력의 감퇴를 막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다 외우고 나니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그때가 일흔여섯이었다."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산 이름을 왜 외우시는가' 물으면 우스개 소리로 말하기를, '산 이름을 자꾸 외우면, 세계의 모든 산신령들과 친구 되는 기분이 든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새로운 목표를 향한 노 시인의 또 다른 도전이었다.

미당은 마지막 10년 동안 매일 같이 세계의 모든 곳, 가장 높은 곳에 이러렀다. 세상의 어떤 시인도 보여주지 못한 정신의 높이를 스스로 즐겼다.

그는 지구를 휘감아 버리고 있는 설산의 위용과 굽이치는 산맥들을 자기 조국의 해 뜨는 아침과 함께 꿈꾸었다.

우리가 시인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이런 기백과 지혜이다.

미당은 에베레스트를 4천 번이나 오른 시인이었다."  (설명 윤재웅)

 

미당의 시 세계에 함입하였다 밖을 나오니, 하늘은 새파랗고 햇볕에 반사되는 눈이 눈을 부시게 한다.

흰 눈 쌓인 들 건너 야산 기슭 아래 국화마을이 보인다.

 

 

 

 

질마재로 향한다.

질마재 가는 길은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질마재는 진마사람들과 소금장수들이 시장을 가거나 내륙으로 가기 위해  넘어가야 하는 고개이다.

해변가 모래땅에서 농사를 지울 수 없어 소금을 구워  짊어지고 질마재를 넘었다.

부안면에 있는 알뫼장터에서 곡물과 교환하여 생활을 영위하여했기에 수없이  넘나들어야 했던 고개다.

 

 

 

 

 

 

질마샘이 보인다.

고개를 넘다 힘들어 목을 축여 갈증을 해소하며 쉬어갔던 곳이다.

 

 

 

 

질마재 이정표가 서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이정표가 서 있는 사거리에서, 연기마을로 가는 길로 내려선다.

발자국이 없는 눈 길이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며 걸어내려간다.

짐승 발자국을 따라 걸어내려간다.

갈증을 느끼고 있는데 나무에 조롱박이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바위 밑으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차가운 물을 두어 바가지 들이킨다.

시원한 감로수다.

 

 

 

 

 

수면 위로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는 연기제에 도착하니 머리가 시원해진다.

겨울 풍광을 즐기며 발목까지 빠지는 눈 길을 걷는다. 눈 쌓인 추운 겨울 저수지의 수려한 풍치에 매료된다.

 

 

 

 

 

 

꽃무릇 쉼터와 데크, 산림경영모델숲을 지난다

 

 

 

저 멀리 보이는 연기마을도 눈 속에 파묻혀 있다.

 

 

 

연기마을을 지나 인천강의 수변로로 들어선다. 눈 덮인 인천강에 무리 지어 자란 갈대가 바람에 솨솨 흔들리고 있다.

 

 

 

 

 

갈대

신 경 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풍천장어로 유명한 인천강 수변길을 따라 걷는다.

 

풍천장어 

풍천은 지명이 아니다.

풍천장어의 이름은 조석(달과 태양의 중력에 의한 밀물 썰물의 현상) 조차(밀물 썰물시 수위 변화) 영향이 큰 서해안에 인접한 작은 

강이나 소하천에 간만(밀물 썰물) 변화에 항상 바람과 하천이 변하여(물흐름의 변화) 이곳에 서식하는 장어가 바닷물과 함께 바람을 

몰고 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풍천장어의 특징은 강하구 지역으로 담수와 해수가 섞여 염분도가 낮고 육지에서 영양염류가 많이 유입되어 플랑크톤과 어류 수산 
생물이 

풍부하므로 먹이의 다양성 수질의 특이성 큰 폭의 수온차 들물 날물에 따른 이동성이 크므로 육질 맛 영양이 최고라 하여 

민물장어 중에서 최고로 칩니다.

늦가을에 잡히는 풍천장어는 민물에서 5~10년 정도 성장하여 산란기가 되면 강하성으로 바다로 가기 전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염분도가 낮은 기수 지역에서 바닷물에 적응하여 이곳을 통하여 바다로 가는데 이때에 자연 산 민물장어의 특징으로 알고 있는 가슴 

지느러미(배부분) 쪽이않고 

수개월에 걸쳐 산란 장소까지 6000여 km를이동하여 산란하는데 산란을 위해 바다로 가기 전 잡히는 장어 특히 갯벌 구간이

10km 이상이 되고 뱀장어 서식과 이동 통로로 최적지인 고창 선운산 입구에서 잡히는 민물장어를 풍천장어라 하여 

예로부터 유명합니다. <네이버 지식>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 선운사 앞 고랑을 풍천(風川)이라 부른다. 본디 이름은 장수천이다. 밀물 때 서해의 바닷물이 이 고랑으로 밀려들어오면서 그 바다의 거센 바람까지 몰고 와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풍천의 장어가 맛있기로 소문이 나 장어집들은 거개가 ‘풍천장어’를 간판에 달고 있다.

 

풍천 장어는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지는 ‘풍천(風川)’에서 잡은 장어로 풍천이라는 이름은 서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른 장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일대에는 풍천장어구이를 판매하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 외에도 영산강 하류인 나주의 구진포와 이리의 목천포에서 산다. 풍천 장어가 유명한 것은 이곳 가까이에 있는 염전으로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 장어 맛이 좋기 때문이다. 특히 풍천장어는 6월부터 10월까지 많이 잡힌다. "   <네이버 백과사전>

 

  

 

 

 

 

 

인천강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장어를 잡는 것이냐고 물으니 잉어를 낚는다고 한다. 낚시에 걸린 잉어를 연실 뜰채로 걷어 올린다. 강둑길을 걸어 반암교 옆으로 올라선다.

 

인천강 뚝을 따라 병바위로 가는 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며 눈가루가 뿌린다. 공중에 눈비늘이 은빛으로 반짝거리며 날리고 있다.'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 길'을 완주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