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솔산 선운사, 보은길(소금길)을 걷다

2011. 1. 28. 22:46도보여행기/고창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

(2) 도솔산 선운사, 보은길(소금길)을 걷다.

      2011. 1. 21.  금요   맑음

 

07:00 숙소를 나선다.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 선운사 동구로 향한다.

선운사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이 없다.

동백호텔로 가보니 음식점에 불이 켜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방에서는 음식 준비로 분주하다.

8시가 되어야 가능하다고 하니 기다린다.

음식이 깔끔하고 맛깔스럽다.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선다.

선운사 동구 도솔천 건너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암벽에 붙어 오르며 자라고 있는 송악이 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푸르러진다.

 

선운사 송악

김 길 자

 

 빗살무늬 쏟아지는 도솔천 옥빛거울에 
 맑고 푸른 하늘이 내려와
 솔바람 물결 타고
 송악의 세월을 나른다

 

 꽃핀석산, 단풍 같은 날 없어도
 때가 되면 웃음 피워 꽃등 거는
 사철 푸른 노거수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산 17-1번지”
 천연기념물 367호 문패 걸어 놓고

 

 절벽 같은 세상 허허로움에
 구불구불 들리는 산사의 풍경소리 따라
 산 봉우리 돌아 내려오며

 

 참을 인忍자를 하나, 둘, 셋, 
 가슴에 새기는 중이다

 

 

 

 

고창 삼인리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이 송악은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80cm에 이르고 나무의 높이도 약 15m나 되는 거목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내륙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 중에서 가장 큰 나무이다.

 

□송악

두릅나무과 늘 푸른 덩굴나무로 남부지방에서 자란다. 개화기는 10-11월이고 결실기는 다음 해 5월이다. 줄기에서 많은 공기뿌리가 나와 다른 물체에 붙어 오른다. 잎은 어긋나며 둥근 세모꼴로 잎몸이 3-5개로 얕게 갈라지며 가죽질이다. 잎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앞면에 광택이 있으며 뒷면은 연녹색이다. 가지 끝의 산형꽃차례에 자잘한 연노란색 꽃이 둥글게 모여 핀다. 둥근 열매는 검은색으로 익으며 둥그스름한 씨가 5개씩 들어 있다.

남부 지방에서는 소가 잘 먹기 때문에 '소밥'이라고도 한다.

 

선운산에는 유명한 식물 넷이 있다.

동백,  장사송,  송악, 꽃무릇이 그것이다.

 

꽃무릇 

다년생 초본식물로 일명 석산(石蒜)이다. 매년 9월 중순경 온 산에 군락을 이루어 붉은 꽃이 피며 꽃이 진 후 진녹색의 잎이 나와 다음 해 5월에 사라진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만 한다는 애틋한 연모의 정을 담고 있어 일명 상사화(相思花)라고 하기도 한다. 9월경 30-50cm 높이로 꽃줄기가 자라 그 끝에 진홍색 꽃이 산형꽃차례로 달린다. 꽃잎 조각은 6개가 뒤로 말리고 가장자리에 주름이 진다. 수술은 6개이며 꽃 밖으로 길게 나오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송악의 푸르름을 본 후 도솔천을 따라 걷는다.

은행나무 유주가 보인다.

 

 

                                 

 

은행나무   유주

                                                                                                                                             
□유주 (乳柱)

은행나무 유주(乳柱)                           

글자 그대로 '젖기둥'이라는 뜻이다. 그 모양이 마치 여인네의 젖가슴과 닮았다 하여 유주라고 하나 실제로는 남자의 심벌을 더 닮았다.

그래서 득남 목적의 민간 신앙 숭배물로 보호되는 경우가 많다. 은행나무가 줄기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자가치유의 방법으로 그 부위에 특정의 물질을 보냄으로써 만들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흰 눈 쌓인 도솔천

 

흰 눈 쌓인 도솔천은 신비롭다.

흰 눈을 배경으로 검은색의 바위와 계곡 앙상한 나무 덩굴들이 조화되어 신비롭게 보인다.

도솔천 계곡 물과 바위 자갈등이 검게 보이는 이유가 상수리 떡갈나무 등 참나무류의 열매와 낙엽이 떨어져, 열매와 낙엽에 포함되어 있는 타닌 성분이 바닥에 가라앉아 붙어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질마재가 낳은 한국 문단의 신화  미당 서정주 

"선운사 동구" 시비 앞에 선다.

미당의 육필원고를 바위면에 새겨 놓았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니 편백, 삼나무, 전나무가 울울한 숲이 나타난다.

나무숲이 둘러싸고 있는 부도밭은 아침 햇살을 환하게 받고 있다.

 

 

  

담장 안에 흰 눈을 머리에 인 각기 다른 모습의 크고 작은 부도와 비석들이 열을 지어 서 있다.

선운사 가람의 깊은 역사를 웅변해 주고 있다.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가 비문을 쓴 백파율사 부도비가 있다.

 

백파 긍선(1767∼1852)

조선시대 선문(禪門)의 중흥 주로 추앙받는 고승으로서 법호는 백파(白坡), 법명은 긍선(亘琁)이다. 율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추었고,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추사 김정희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達磨)'라고 격찬하였다. 스님은 김정희, 초의(草衣) 선사 등과 선문의 요지에 대해 거침없는 상호토론을 벌여 근세 불교계의 가장 치열한 교리논쟁을 유발함으로써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무분별한 탁본과 자연풍화로 인하여, 비문이 마모되거나 탈락되는 현상이 일어나 원형보존을 위하여

2006년 성보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지금 서 있는 백파율사비는 원형보다 5% 축소한 형태로

모조하여 200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본래의 위치에 건립하였다.

 

 

추사가 쓴 백파율사 비문을 옮겨 본다.

華嚴宗主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

年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杀活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

殺活機用雖大藏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妄以殺

活機用爲白坡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與白坡

頗有往復辨難者卽與世人所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難萬般苦

口說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

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爲白坡碑也畫正雪竇白巖諸門徒果老記付

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眞實厥名兮互璇不可說轉轉

阮堂學士金正喜撰幷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

 

화엄종주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근래 우리나라에는 율사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하므로 이에 율사라 적은 것이다. 대기대용, 이것은 백파가 80 평생 가장 힘들인 것인데, 혹자는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을 난해하고 억지스럽다고 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무릇 범부를 다스림에는 살활과 기용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할지라도 어느 것 하나 살활과 기용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고 백파가 망령되게 살활과 기용을 갖고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하루살이가 느티나무를 흔들려는 격인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서신을 왕래하면서 학문적인 논쟁을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의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닳도록 설명한다 하여도, 사람들은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하여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 보고 한 번 웃어 불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백파로서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설두, 백암 등의 문도들에게 이것을 써주면서 과로(추사의 별호, 즉 과천에 사는 노인)는 다음과 같이 부기하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아, 그 이름 긍선이여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완당학사 김정희가 짓고 또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철종 9, 1858년) 5월 일 건립하다.

 

 

백파율사비에 나오는 대기대용은 간단하게 현상의 세계를 대기라고 하고, 형이상학의 세계를 대용이라고 한다. 백파는 마음의 청정함 즉,“불(佛)” 을 대기(大機). 마음의 광명. 즉 “법(法)”을 대용(大用)이라 하였다. 대기대용은 '원숙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자유자재한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선운사 극락교를 건너 종루를 겸한 2층으로 된 천왕문을 들어서니 만세루다.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 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두 번째 검단선사의 창건설인데 당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운사에서는 특히 걸출한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많이 배출되어 사격(寺格)을 드높였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설파 상언(雪坡尙彦) 스님과 선문(禪門)의 중흥 주로 추앙받는 백파 긍선(白坡亘琁) 스님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청정율사 환응 탄영(幻應坦泳) 스님, 근대불교의 선구자 박한영(朴漢永) 스님 등이 선운사에서 수행하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보전과 관음전ㆍ영산전ㆍ팔상전ㆍ명부전ㆍ산신각ㆍ만세루ㆍ천왕문이 있고, 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과 괘불대ㆍ당간지주ㆍ석주 등이 있으며, 산내암자로는 참당암(懺堂庵)ㆍ도솔암(兜率庵)ㆍ동운암(東雲庵)ㆍ석상암(石上庵) 등 네 곳이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고, 영산전목조삼존불상ㆍ육 층 석탑ㆍ범종ㆍ만세루ㆍ백파율사비 등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사내에 있는 선운사박물관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279호)을 비롯한 고려불상, 조선시대 탱화, 『석 씨원류』ㆍ『선운사사적기』 등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숲ㆍ장사송ㆍ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   (전북유형문화재 제53호)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중앙칸(御間)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간(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하였다.

중앙 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써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 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마루가 깔린 이 단층  건물은 다른 건물들을 짓고 남은 목재로 건립하였다 한다

제 멋대로의 나무를 다듬지 않고 사용한 건물이지만 질박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대웅보전과 6층석탑

6층석탑은 고려시대 것이다. 사적기에 조선 성종 때 행호선 사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하였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대웅보전  (보물 제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대웅보전 앞 배롱나무는 동안거에 들어 있다.

축 처진 가지는 지상으로 下心의 낮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선운사 동백숲  (천연기념물 제184호)

 

대웅전 뒷 산기슭의 동백숲은 아침햇살을 가득히 받고 있다.

양지라서 눈도 많이 녹았으나 잔설들은 깔려 있다.

꽃봉오리를 조금 내밀고 윤기 있는 잎들은 초록으로 빛나고 있다.           

 

半開山茶 (꽃이 반만 핀 동백)

신 숙 주

 

꽃이 반이나 피어 고고한 모습 들어냈는데

아직 세모라 봄빛을 받지 못했도다.

이는 으레 자연의 순리에 따른 것이지만

풍상을 겪고서도 맑은 자질 뽐냄이 없어라

 

 

선운사 동백숲  (천연기념물 제184호)

이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무의 평균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로서, 절 뒤쪽 비스듬한 산 아래에 30m 넓이의 가느다란 띠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써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ㆍ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ㆍ추백(秋栢)ㆍ동백(冬栢)으로 부른다. 이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 문화적 가치와 동백나무숲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팔상전 산신각을 지나니 영산전이다.

영산전 외벽화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요령과 목탁, 연꽃, 경전, 연밥, 연잎, 연꽃 속의 동자승, 장고, 비파, 소북 등등이  묘사되어 있다.

 

 

 

 

 

오가는 발길이 없는 경내는 정적 속에 아침 햇살을 받아 쌓인 눈이 빛나고 있다.

 

 

선운사 성보박물관이 직원 휴가로 인하여 휴관 중이어서 진품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훗날을 기약해 본다.

 

 

천왕문 옆 전통다원 창호에 붙여 놓은 글들을 읽어 본다.

 

                 

 

 

 

 

마음, 마음,

어찌,

너는, 너를

다스리지 못하고

남을 이기려 하는가

 

입을 다스리는 글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말해서는 안 될 때 말하지 말라

말해야 할 때 침묵해도 안되고

말해서는 안될 때 말해서도 안 된다

입아, 입아

그렇게만 하여라.

 

 

 

 

 

 

도솔천 따라 걷는 길은 도솔천을 오르는 길이다.

신라 24대 진흥왕이 왕위를 퇴위한 후 수도 했다는 진흥굴이 보인다.

길이 10m 높이 4m의 동굴이다.

 

 

동굴 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또 다른 느낌을 받는다.

 

                     

 

 

진흥굴 옆으로 큰 가지 8개가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진 미끈한 적송이 우뚝 서 있다.

이름하여 부르기를 장사송이라 한다.

 

 

                                                                             장사송

 

장사송   (천연기념물 제354호)

반송으로 분류되며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3m, 둘레 2.95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둘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장사현이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솔암 찻집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도솔암이다

도솔암의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 선운사. 도솔산등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이곳에 신라왕이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여 창건사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이 미륵신앙의 배경하에 창건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까지 도솔암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下兜率庵), 북도솔암(北兜率庵)의 세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 내원궁을 말하며, 하도솔암은 마애불이 있는 곳,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를 일컫는다. 이처럼 각각의 독립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에 와서 도솔암 하나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극락보전 앞마당에는 연등이 걸려있고, 극락보전 빗살문 위에 연등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목탁소리와 함께 스님의 청아한 독경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지고 있다.

가만히 서서 독경소리에 함입한다.

도량청정 무하예다.

여기가  곧 미륵세계 극락임을 깨닫는다. 

 

극락보전 주련을 읽는다.

極樂堂前滿月容           

玉毫金色照虛空          

若人一念稱名號            

頃刻圓成無量功           

극락당 앞에 둥근달 같은 아미타 부처님 모습,
옥호에서 나는 금빛은 허공을 비추는구나.
만약 사람들이 일념으로 그 명호를 부른다면
잠깐 사이에 한량없는 큰 공덕 모두 이루리  

 

 

도솔암 편액을 단 요사채는 단청이 없어 고풍스럽다.

기둥의 색깔이 고풍스럽고 나뭇결무늬가  아름답다,

마루 옆면 나뭇결무늬도 아름답다.

 

 

 

귀면상이 걸려 있다.

 

 

 

 

극락보전 앞 가족소원성취등이 환히 달려 있다.

종무소에 들려 가족소원성취등을 달고 가족 모두의 소원성취를 기원해 본다.

 

 

 

 

 

 

 

 

 

 

 

 

 

 

2010.10.10일 타종식을 한 새로 조성된 '도솔천내원궁대범종'은 무게 1300관, 높이 2.4m, 둘레 5m다. 조각이 미려하다. 지장 기도도량인 도솔암 도량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담긴 발원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하고 정각에 이르도록 할 것이다.

 

 

극락보전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니 나한전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도솔산

그중에서 내원궁이 올라앉은 거대한 암반을 칠송대(七松臺)라 부른다.

절벽을 이룬 칠송대 한 면에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도솔암 마애불 (보물 제1200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腹藏) 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머리 위 사각형 구멍은 등불암 공중누각을 설치했던 자리다.

 

 

 

기암괴석의 도솔산 칠송대  도솔천 내원궁을 가기 위해서는 철계단을 굽이굽이 올라야 한다.

 

 

 

 

굽은 적송이 늘어진 좁은 암반 위에 도솔천 내원궁이 자리하고 있다.

 

 

 

운사 도솔암 내원궁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上兜率庵)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6년(1511)에 중창하고, 숙종 20년(1694)에 3창(三創), 순조 17년(1817)에 4창(四創)하였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 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아 원형초석만 두었는데, 기단이 없어 건물이 낮아지므로 하인방(下引枋)의 높이만큼 되는 장초석(長礎石)을 사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아자형(亞字形) 2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천장의 구조는 우물천장이며,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겹처마에 8작 지붕을 올려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봉안하고 있다.

 

 

 

칠송대에서 바라보니 천마봉(천마암)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선운산 능선 봉우리들이 가까웁게 느껴진다.

 

 

 

마애불 옆을 지나 용문굴 가는 길에는 기암과 굴이 보인다.

 

 

 

 

로프가 길게 드리워진 경사진 길을 오르니 큰 바위 밑으로 구멍이 뚫린 용문굴이다.

 

 

 

 

 

선운사 창건 당시 검단선사가 용을 내쫓자 큰 바위를 뚫고 승천하였는데 그 구멍자리가 용문굴이다.

마치 통로를 만든 것 같이 구멍이 나 있다.

군데군데 조그마한 석굴들이 보인다. 또한 장금 어머니 돌무덤이 있던 대장금 촬영지다.

낙조대에 오른다.

대장금 촬영지 표지가 서 있다.

 

 

 

 

 

천마봉에 오른다.

천애의 절벽 천마암 끝 조그마한 바위에 오른다.

이곳이 최고의 전망처다. 

기암괴석의 도솔봉

칠성대 위의 내원궁과 도솔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 쌓인 연봉과 기암괴석 봉우리들을 완상 한다.

 

 

 

천마암 위에도 눈이 쌓였다

 

 

 

배맨바위를 바라보며 낙조대로 다시 내려가 소리재로 향한다.

능선을 걸으면서 바라보니 흰 눈을 뒤집어쓴 천마봉과 연봉들이 그럴듯하다. 

 

 

 

 

소리재에서 참당암 가는 길로 내려선다.

 

 

참당암은 수행도량이다.

청정한 도량은 마음의 번뇌를 씻어주고 정신을 쇄락하게 한다.

두 마리의 개가 뒤엉켜 뛰어다니고 한 마리 검은 개는 내 뒤를 따라다닌다.

 

 

 

 

 

참당암(懺堂庵)

선운사의 암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사격이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거찰이었다. 삼국시대 의운(義雲) 스님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의운스님이 도솔산 법화굴(法花窟)에 살고 있을 때 산 아래 죽포 포구에 돌배 한 척이 들어왔다. 이 배는 속인들이 보려고 다가가면 바다로 멀어지곤 하다가, 의운스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포구로 나가서야 저절로 다가왔다. 이윽고 배에서 노를 젓던 한 금인(金人)이 나타나 여러 불상과 경전과 보인(寶印)을 스님에게 전해주고 떠났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나는 우전국의 왕인데 불상을 모신 곳을 찾아 해동의 여러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 넌 중, 도솔사에 대참(大懺)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이곳으로 왔으니, 청컨대 집을 짓고 편안히 모시도록 하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스님은 산 가운데 터를 잡고 진흥왕의 도움으로 절을 세우고 '대참사'라 하였으니, 이때는 581년(백제 위덕왕 28)이었다. 이 절이 삼국시대 의운스님이 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시주한 것은 후일에 첨가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1328년(충숙왕 15)부터 이듬해까지 중수가 있었으며, 1346년(충목왕 2)부터 1398년(태조 7)까지 약 52년에 걸쳐 점찰신앙(点察信仰) 법회가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는데 먼저 1530년(중종 25)에 재중수하였고, 이어서 1614년(광해군 6), 병자호란 뒤인 1642년(인조 20), 1794년(정조 18)등 4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당시는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성종대(1469~1494) 이후 선운사가 산중의 중심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현재 참당암의 전각은 대웅전과 약사전(藥師殿)·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도솔선원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당암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이며,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약사여래불상(실제로는 지장보살상으로 보아야 함)과 참당암 동종은 전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참당암 대웅전 (보물 제803호)

선운사 산내암자 참당암의 중심건물로서 신라시대 의운화상(義雲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매 칸마다 4 분합문을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다포양식의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인 반면 뒷면 공포는 굽면이 곡선이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1900년에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이채로우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스님이 걸어 나오시기에 합장하고 묻는다.

심원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이렇게 눈이 쌓여 있는데 갈 수 있겠는지요?"

"아마도 발자국이 있어서 갈 수 있을 겁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산기슭을 올라서니 차 밭 사이로 발자국이 이어져 있다.

검은 개가 언제 따라왔는지 앞장서 뛰어간다.

 

 

 뒤를 돌아보니 참당암이 눈 속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놓고 있다.

 

 

 

 눈 속에 파 묻힌 차 밭의 찻잎이 더욱 푸르러 보인다.

 

 

 

산 능선에 올라선다.

여기가 바로 참당고 개다.

내려서는 길이 눈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앞을 살펴보니 나뭇가지에 빨간 리본이 펄럭인다.

그 아래로 희미한 발자국이 보인다.

검당포를 향하여 내려선다.

1,400년 전 검단리 마을 사람들이 검당포에서 화덕에 불을 붙여 구운 소금을 등짐 지고 제염법을 가르쳐 준 선사에게 보답하고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걸었던 길 

보은의 길을 걷는다.

 

 

군데군데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드디어 집이 보이고 큰 당산나무가 보인다.

연천 동이다.

검은 개는 좋아라 앞을 뛰어가다 기다린다.

이제는 그만 돌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손짓한다.

 

 

 

 

화산 마을을 지나니 변산이 저 멀리 보이며 앞이 트인다.

여기까지도 따라온 개를 막고 돌아가라 다시 또 손짓하니 되돌아선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

 

                        

 

금산 마을 길을  걷는다. 처마 끝에 일열로 달린 고드름이 반짝이고 있다. 파란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더욱 멋진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돌담장 있는 집은 시골 풍경의 정감을 느끼게 한다.

 

 

 

심원에 도착하니 오후 3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심원초등학교를 지나  검당 소금전시관 가는 길로 들어선다.

 

 

 

여류명창 진채선 생가터를 들려본다.

 

 

 

들이 끝나는 곳에 하얀색 검단소금전시관이 보인다.

그 뒤로 변산의 연봉들이 달리고 있다.

 

 

넓은 들에 쌓인 눈이 햇빛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검당 소금벌막

바닷바람에 의해 모래가 이동하여 한 곳에 모여져 만들어진 모래 언덕을 사등이라 하는데 그 위에 마을이 형성된 것이 지금의 사등마을이다. 사등마을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덕에 불을 붙여 굽던 육염(자염)  생산지로 검당포가 되면서 소금 무역이 성행하던 곳이었다. 선운사 창건설화와 마을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400년 전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선운사 계곡에 출몰하던 도적들을 계도해 소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다. 선사는 선운사에서 3km 떨어진 바닷가에 진흙으로 샘 같은  웅덩이를 만들고 그 샘에 바닷물을 부었다가 수분을 증발시켰다.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소금을 육염이라 하는데 제염법을 가르쳐 준 선사에게 보답하기 위해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보은염이라 하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한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풍습을 바탕으로 매년 고창에서는 선운사 보은염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소금벌막 앞 방파제 벽에는 '사등마을이  들려주는 하늘염 전통 소금 이야기'란 내용으로  벽화를 그려 놓았는데 곰소만과 변산을 배경으로 멋진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하전 갯벌체험마을에 도착한다.

석양빛이 길게 비춘다.

 

 

                   

 

 

곰소만 해안 방파제 길을 따라 걷는다.

 

 

                  

 

 

아름다운 노을빛을 내며 화사하게 해가 지고 있다.

 

 

 

해는 지고 어둠이 깔리는 길을 헤드랜턴을 켜고 도로를 빠른 속도로 걷는다.

차량이 달려오면 길가로 비켜서며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고개를 넘어서니 인천강이 나타난다.

용선교를 건너 숙박할 곳으로 예정한 한솔모텔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서니 개들이 짖으며 따라온다.

모텔에는 불이 켜 있지 않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텅 빈 집이다. 

옆집 펜션으로 전화를 하였더니 영업중단하였다 한다. 펜션 또한 자기가 읍내로 나와 숙박할 수 없다고 한다.

난감하다.

지도를 보니 선운사 입구까지 약 3km다.

걸어가기로 결정하고 깜깜한 골목을 나서니 개 세 마리가 짖어대며 따라온다.

스틱을 휘둘러 쫓아내고 용선교를 건너 선운사로 향한다.

조금 걸으니 수다동이 나오는데 버스정류장이 있다.

시간을 보니 7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잠시 기다리다 걸어가고  있는데 차 소리가 들려 뒤돌아 보니 군내버스가 온다.

손을 흔드니 저만치 앞에 가서 정차한다.

휴!

탑승하고 기사에게 고맙다 인사한다.

선운사 입구에 내려 어제 들었던 숙소에서 짐을 푼다.

오늘은 12시간을 꼬박 걸은 고단한 하루였지만, 하루 밥벌이를 한 것 같은 만족한  하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