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산 보현사를 찾아서(3)

2010. 11. 3. 15:59문화유적 답사기/강릉굴산사지,보현사를 찾아서

 
강릉 굴산사지와 보현사를 찾아서(3)
 

보현산 보현사

창건 설화

신라 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돌로 된 배를 타고 천축국으로부터 강릉의 동남쪽에 위치한 남항진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문수사가 지금의 한송사지로 알려진 곳이다. 절이 완공되자 보현보살은 말하였다."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새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보현보살이 신력으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멀리 날아 현재의 보현사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으니 이것이 보현사라는 것이다.

 

 

단풍이 붉게 물든 산길을 오른다.바위에 '平常心是道'라고 쓰여 있어 선종사찰임을 보여준다. 마조선사는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은 것이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했다.

 

 

 

 

 

돌절구 1기와 20여기의 석종형 부도전에 올라 경건한 마음을 갖는다.

이 절의 유구한 내력과 유서 깊은 사찰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열 지어 서 있는 20 여기의 부도는 석종형으로 단순한 모양을 갖고 있지만 머리 부분은 조금씩 다르게 장식했다.

 

 

 

 

 높은 축대 길을 따라가니 지장전 건립 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 (普賢寺郎圓大師悟眞塔) 보물 제191호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 544 보현사

보현사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834∼930)의 탑비로,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왕은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용의 머리를 갖춘 거북받침돌은 등에 6각의 벌집 모양이 채워져 있고, 중앙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 좌(碑座:비를 꽂아두는 부분)가 마련되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기고 그 위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을 힘차게 조각해 놓았다. 꼭대기에는 석탑에서처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1단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을 갖추고, 화염에 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고 있어 특이한 모습이다.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郎圓大師

보현사를 중창한 낭원대사(朗圓大師, 835~930)는 835년(흥덕왕 10)에 태어났다. 성은 김 씨요, 경주가 고향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차이며, 신승(神僧)이 금인(金印)을 주고 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8세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다가 25세 때 지리산 화엄사로 출가하여 정행(正行) 스님으로부터 개청(開淸)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되었다. 그 뒤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 일음(玉軸一音)을 듣고 금강삼매(金剛三昧)의 진리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3년 동안 혼자서 참선 수행을 하다가 범일국사(梵日國師)의 도성(道聲)의 명성을 듣고 굴산사(掘山寺)로 찾아갔다. "그대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노라." 국사는 크게 반기며 곧바로 스님의 입실을 허락하고 심인(心印)을 전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에 범일국사가 입적하자 행적(行寂) 스님과 함께 사굴산문을 이끌다가, 알찬(閼?) 민규(閔規)의 청함을 받아 보현사로 와서 도로를 개통하고 법당과 탑을 새로 세웠다. 그리고 913년(신덕왕 2)에는 보현사에 지장선원을 열었다. 전국의 승려들이 선을 지도받고자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경애왕은 사신을 보내 국사로 모시는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세간의 명성에 관심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깊은 산중사찰 보현사에서 후학들의 지도에 몰두하다가 930년(경순왕 1) 법당에서 앉은 채 입적하였다

 

 

 

 

 

 

 

 

 

 

 

 

 

용  네 마리가  화염에 싸인 보주를 여의주로 알고 서로 차지하려 다투는 형상을 투각한 이수

 

 

 보현사 경내를 들어서려면 금강문을 지나야 한다.

벽화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가 문을 지키고 있다.

 

 

 

 

 

보현사 대웅보전 (강릉시 문화재자료 제37호)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544

보현사는 650년(진덕여왕 4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처음 세운 사찰로, 후에 낭원대사(朗圓大師)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3단의 장대석(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로 길게 놓은 돌) 기단을 설치하고 막돌 덤벙 초석을 기둥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하게 그레질 한 후, 둥근기둥을 세웠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다포 양식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경내에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인 낭원대사오진탑(보물 제191호)과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 제192호)가 있어 이 사찰의 역사적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   (대웅전 안내문)

 

보현사는 신라 진덕여왕 4년(650)에 자장율사가 세운 절이다. 후에 낭원대사가 고쳐 세웠고 ‘지장선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세운 건물로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흙으로 만든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고, ‘도광 2년(1822)’이라고 쓴 기록이 있는 후불탱화와 ‘가경 4년 기미(1799)’라는 기록이 있는 탱화가 있다. 건물 앞에는 석탑재와 석사자 등 화강암 석재들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대웅전 주련을 보니 강화 정수사 주련과 동일하다

摩訶大法王
無短亦无長
本來非조白
隨處現靑黃

거룩한 부처님은
짧지도 길지도 않고
본래 희거나 검지도 아니하며
처처에 인연 따라 나투시네

 

보현사는 크지 않은 절이나 협소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위풍당당한 큰절로 느껴진다.

아마도 산세를 등에 업은 훌륭한 입지에 건립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경내를 둘러싸고 있는 울울한 소나무에서 뿜어내는 향이 좋고, 절 주위 어디를 보아도 만산홍엽의 단풍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머리가 쇄락해지고 눈이 서늘해진다.

대관령 선자령 곤신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유장히 흐르는 산기슭  앞에는 깊은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고 계곡을 따라 동해가 훤히 전망된다.

산중사찰의 정적과 아름다움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며,

하루 묵어 쉬어 가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