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첩첩산중 합천영암사지(陜川靈巖寺址)를 찾다

2010. 10. 6. 23:29도보여행기/거창 송계사에서 성주 법수사지까지

(3) 첩첩산중 합천영암사지(陜川靈巖寺址)를 찾다

 

합천 영암사지(사적 131호)는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가야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있는 황매산(1103.5m) 남쪽 기슭으로 주위는 모두 야산으로 둘러싸인 첩첩산중이다. 이와 같은 산중 오지에 언제, 누가, 어떠한 인연으로 대가람을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영암사라는 사명도 주민 간에 구전되어 오고 있을 뿐이며, 문헌상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최근 서울대학교 도서관 古拓本書帖에 고려 예종 24년(1023년)에 세운 '靈巖寺寂然國師慈光塔碑'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에는 적연선사가 서기 1014년 6월 영암사에서 노병으로 83세에 입적하였다고 하며 아울러 영암사 서봉에다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영암사에는 이 비는 없지만, 당시 비를 세웠던 귀부가 서금당지 주위에 남아 있고, 서봉에 장사 지냈다는 선사의 부도도 대기마을 뒤쪽 영암사에서는 서쪽 약 1.5km 지점의 산중에 현존하고 있어서 이 사지가 곧 비문에 보이는 영암사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이곳이 영암사지이고, 최소한 서기 1014년 즉 고려초기까지 이곳에 영암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영암사지에는 3단의 석축위에 동서로 삼층석탑(보물 480호), 쌍사자 석등(보물 353호),  금당지가 있으며, 이 금당지 남쪽에 용도미상의 건물지가 있고, 여기서 서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두 귀부(보물 489호)와 그 사이에 서금당지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다시 금당지 북쪽 얼마 안되는 거리에 당간지주처럼 좁게 가공된 장대석 1주가 서 있는 건물지가 있다. 영암사지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동서축으로 배치된 산지가람형태이다. 가람은 서쪽에서 시작해서 동쪽 계곡 부분으로 서금당지, 금당지, 석등, 석탑, 회랑지 그리고 건물지군 수조 순으로 계단상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동아대박물관 고적조사보고서)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영암사지를 지키며 사천왕처럼 우뚝 서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팔뚝돌을 끼워 축조한 석축 옆을 지난다.

석축너머에는 거대한 암봉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데 막 저녁해가 넘어가고 있다.

수국꽃 너머로, 툭 불거져 나온 석축위의 쌍사자석등, 통돌을 깎아 무지개 모양의 호로 만든 돌계단, 그리고 길게 쌓은 석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화사석을 떠 받치고 있는 쌍사자석등 뒤로 돌꽃이 장엄하게 피어 있다.

두 마리의 사자는 꼬리를 치켜 들고, 뒷 두 다리를 연꽃이 조각된 받침돌을 힘차게 버티고 서서 앞다리를 들어 법등을 밝혀 두는 화사석을 

떠 받치고 있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발끝으로 무지개 통돌 계단을 조심조심 오르니 금당지에 다다른다.

금당의 기단 면석에는 영수상을 돋을 새김하였고, 동서남북 네 군데에 출입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불대좌 기초석에는 팔부중상을 새겼다.

정면 계단 소맷돌엔 운룡이 날고, 북쪽 계단의 소맷돌에는 고운 울음소리를 내며 극락에 산다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가릉빈가(迦陵頻伽)'가 날고 있다.

금당지 뒤의 높은 석축 위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쌍사자 석등과 삼층석탑 너머로 첩첩의 산이 바라보인다.

아주까리와 고추가 자라는 밭 옆 석축 밑에는 불유가 흐르고 있다.

파란 이끼가 낀 석조에는 맑은 물이 쉬임없이 흘러넘친다.

그 뒤편이 북건물지다.

당간지주 같이 생긴 장대석이 서 있고 빈 터에는 석축과 유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지 서남쪽의 솔숲을 지나니 서금당지다.

돌꽃 모산재가 보이는 솔숲에 둘러싸인 금당 동서 양편에는 암수 한쌍의 귀부가  있는데 이것이 영암사지의 또 하나 비장의 명물이다.

한쪽은 목을 고추 세우고 으스러질 듯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금방이라도 섬광을 뿜을 듯하고,

다른 쪽은 목을 움츠린 듯 얌전하나 정교한 아름다운 문양을 뽐내고 있다.

 

영암사지는 돌꽃으로 둘러싸인 신령한 폐사지이다.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화강암 통돌을 깎아 만든 쌍사자석등과 비장의 명물 암수 한쌍의 귀부가 있기에,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한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 동 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영암사지 석축 뒤로;돌꽃 모산재가 둘러싸고 있다

 

    

 

불두화

 

          

 

                        

대기저수지 뒤로 첩첩의 산들이 보인다

 

                                      

(1) 영암사지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보물 제353호)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이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형 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당시 호국사상의 목적아래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법주사쌍사자석등(국보 제5)과 견줄 수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이 석등(石燈)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조성(造成)된 것이다. 8각의 기대(基臺)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배치되었고, 그 안상 안에 사자상(獅子像)이 조각되었다연화(蓮華)를 새긴 하대석(下臺石)과 쌍사자(雙獅子)를 한돌로 조각하였다. 쌍사자는 앙련(仰蓮)의 상대석(上臺石)을 받치고 있으며상대석 위의 8각 화사석(火舍石)에는 4면에 화창(火窓)이 있고 또한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8각의 옥개석(屋蓋石)에는 귀꽃이 있으며, 정상(頂上)에는 연화문(蓮華紋)으로 장식하였다. 석등 꼭대기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고현재의 높이는 2.31m이다.
(문화재청)

       

   

 

                       

쌍사자 석등

 

 

 

 

 

 

 

 

 

 

 

 

 

 

 

 

 

 

 

 

 

 

 

 

(2)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이 탑은 탑신부가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편이며 2·3층은 크게 줄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이 수평이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돌의 윗면에 쇠막대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고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삼층 석탑

 

 

 

 

 

 

삼층석탑 옆의 많이 훼손되어 형체를 알 수 없는 돌부처

 

                                    

불상대좌

 

                                                                

(3) 금당지

 

발굴을 통해 조사해 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서금당·회랑터·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삼층석탑·귀부·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특히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경의 것으로, 절의 창건연대를 살피는데 중요하다. 영암사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 모양이 조각되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 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석조물은 이색적인 느낌마저 준다.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
(문화재청)

     

금당 중앙에는 H자형 불상 주춧돌이 있다

 

              

 

 

 

                        

금당의 주춧돌

 

                        

 

 

                        

소맷돌에 운룡이 투각 된;정면 계단

 

                

 

 

 

금당 사면의 출입 계단과 난간

 

                                     

 

 

 

                        

고운 울음소리를 내며 천상에 산다는 '가릉빈가'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였다.

 

 

         

 

 

 

 

 

                        

후면을 제외한 기단 면석 3면에 계단 좌우로 2마리씩;영수상(靈獸像)을 돋을새김 하였다.

 

                               

 

북쪽 건물지

 

198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에서 밝힌 건물지로, 건물지에는 당간지주 같이 생긴 장대석 1주가 서 있는데 문설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지와 연결된 계단이 있다고 한다.

 

 

 

 

  

당간지주 같이 생긴 장대석과 유구

 

         

 

 

 

아주까리, 고추 밭

 

            

  

불유

 

                          

(5) 영암사지 귀부(龜趺)(보물 제489호)

 

금당터의 동서애 위치한 2기의 비석은 비와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서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용머리에 목을 곧바로 세운 힘찬 모습이다.

겹줄로 귀갑문이 새겨진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강인함과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동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크기도 작고, 움츠린 목에 등도 평평한 편이다. 반면 등과 비 좌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서금당지에는 살아 움직이는 암수 한 쌍의 거북이 살고 있는 듯하다.

 

(가) 동쪽의 귀부

동쪽 귀부는 6 각형의 등무늬를 배열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된 비 좌는 4면에 안상(眼象)을,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동 귀부는 서귀부 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창건주의 부도비로 추정된다

 

 

 

 

 

등줄기가 반듯이 선 육각 귀갑문이 선명하고 그 위에 연꽃송이가 새겨져 있다

 

       

 

귀부의 비좌 양 측면에 물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고, 앞 뒷면에는 연꽃문양을 새겨져 있다.

 

      

 

비좌 양 옆에는 지느러미가 많은 물고기 두 마리가 꼬리를 물고 돌고 있는 문양을새겼는데, 한쪽은 꼬리를 물고;다른 쪽은 연꽃 봉우리를 물려하고 있다.

 

 

 

 

 

 

 

 

(다) 서쪽의 귀부

서쪽 귀부는 거북의 등무늬가 6 각형이고, 비 몸돌을 괴는 네모난 비 좌(碑座)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적연선사의 부도비로 추정되고 있다.

 

 

입을 크게 벌려 으스러질 듯 여의주를 물고 귀에 덮인 털들은 뒤로 휘날리고 네발은 앞으로 나가려는 듯 힘찬 생동감이 느껴진다.

 

    

       

 

석화성 모산재와 귀부

 

                   

 

 

 

 

 

 

 

 

 

 

 

(다) 서금당

 

 

 

 

 

 

불상의 주춧돌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과그 뒤 중앙 금당 양편에 귀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