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山高水長의 내륙산간지 거창을 찾다

2010. 10. 4. 11:10도보여행기/거창 송계사에서 성주 법수사지까지

거창 송계사에서 성주 법수사지까지

 (2010.9.25-9.30)

 

다시 길 위에 서서

지루한 장마, 폭염, 비, 폭염 가을장마 그리고 태풍 곤파스 연이은 또 다른 태풍 그리곤 기습적 집중호우 등으로, 금년 여름은 몇 번이고 먼 길을 떠나지 못하게 나를 동여매곤 했다. 2010년 여름은 그렇게 날개 꺾인 새의 모양으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을 느끼겠다.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길 위에 다시 서야겠다. 숨어서 피는 들꽃을 만나기 위해, 길 찾아 길로 떠나야겠다. W. 헤즐릿은, "여행의 진수(眞髓)는 자유에 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에 있다. 우리가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모든 장애와 불편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다.

자신을 뒤에 남겨 두고, 딴 사람들을 떼어 버리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R.L. 스티븐슨은, "도보여행은 홀로 가야 한다. 자유가 이 여행의 진수(眞髓)이기 때문이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가고 싶을 때 가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이 길 저 길로 갈 수 있고, 제 속도를 지켜야지 도보선수를 따라가서도 안 되고, 소녀와 발맞추느라 잔걸음으로 걸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서 밖으로부터의 인상을 모두 받아들여야 하고, 시각에 비친 풍물을 사색으로 윤색해야 한다.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와도 소리를 내는 풍금(風琴), 당신은 바로 그런 풍금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1) 山高水長의 내륙산 간지 居昌을 찾다
   - 옛 선비들의 풍류가 있는 곳을 거닐다

     2010.9.25 -26  (토-일요일)  맑고, 흐리고

 

 남부터미널에서 08:40분발 거창행 버스에 탑승한다.

잠시 붙인 눈을 뜨니 차창 밖은 누런 황금벌판이다.

높은 가을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로는 솜뭉치 같은 구름이 둥둥 떠 다니고 있다.

 

거창군은 경상남도의 서북부 끝에 자리하여 경상북도 전라북도와 마주하고 김천시, 장수군, 무주군, 성주군, 합천군, 산청군, 함양군등 7개시·

군과 경계를 이룬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내륙산 간지이다.

거창은 예부터 크게 일어날 밝은 곳, 매우 넓은 들, 넓은 벌판, 즉 넓고 큰 밝은 들이란 뜻에서 거열(居烈), 거타(居陀), 아림(娥林)으로 불리어 

오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거창(居昌)으로 처음 불린 후 주변영역과 분할, 합병되면서 여러 지명으로 부르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 동 서 삼면이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분지에 산이 높이 솟았으니 계곡도 많고 물도 맑다.

골골이 모여드는 물든 황강, 남강, 감천, 금강등의 발원지를 이룬다.

山高水長 산이 높고 물이 유유히 굽이굽이 길게 흐르니, 누대와 정자가 유난히 많다.

전나무들이 장관을 이루는 1km의 숲 속 길을 걸으니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송계사에 도착한다.

삼성각 가는 계단길을 걸어 오르니 울울한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가울바람이  땀베인 몸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간다.

앞을 바라보니 예사롭지 않은 구름이 푸른 하늘에 아름다운 수를 그리고 있다.

 

덕유산 기슭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송계 계곡을 흘러 갈천(葛川)에 이르러 동서로 갈라져 흐르면서 자연섬을 만들었다.

수목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고 있는 작은 섬이 갈계숲이다.

갈계숲에는 이 고장이 나은 조선조 명종 때의 갈천 임훈 등이 문인과 더불어 시를 짓고 읊던 정자가 있다.

옛 선비들의 자취와 흔적을 음미하며 200-300년 수령의 물오리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우거진 숲 안의 가선정 등 정자를 둘러보며 숲 길을 거닌다.

 

농산리에 위천에 있는 강선대와 모암정을 (지금은 생태체험학습장 및 야영장이 들어서 있음) 찾는다.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농산리 석조여래입상을 답사하기 위해 논둑길을 걸어 야산 기슭을 오른다.

석불의 옷자락 표현법이 최초의 부처상 인도의 우드야나왕 여래상 형식임을 알게 된다.

 

굽이 쳐 흐르는 위천  풍취 있는 바위 위에 세워진 용암정을 지난다.

황산마을 앞 구연동  원학계곡에 있는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에서 물을 보는(觀水) 법의 묘리를 배운다.

즉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라고.

거창을 네 글자로 잘 표현한 '山高水長'碑가 거북 등에 세워져 있다.

 

수승대란 거대한 거북 형상의 바위를 일컫는 것인데, 물 가운데 우뚝 솟아 섬처럼 떠 있다.

이것을 모현대(慕賢臺)라고도 부르는 것은 수많은 현인 은사들이 찾은 데서 연유한다.

그들이 찾아와  남긴 흔적들이 거북바위에 빼곡하다.

요수 신권과 대학자 퇴계 이황 사이에 얽힌 사연의 흔적을 찾기도 하고,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의 풍류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거창의 누대와 정자는 대개 거북바위 위에 짓고, 용틀임하는 휘어진 기둥을 사용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향촌의 사대부들인 북상촌의 임 씨 집성촌, 위천면의 강동마을과 거창 신 씨들의 집성촌인 황산마을, 마리면의 영승마을 등은 지난날 

양반층 체취가 고여 있는 곳들이다.    

 

송계사 (松溪寺)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에 위치하고 있다.

"덕유산 수리봉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송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에 원효와 의상 두 고승이 북상면 소정리에 영취사를 창건한 후 5개의 암자를 세웠는데 그 하나로 송계암을 지었다고 하며, 이후 영취사가 폐사되면서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대웅전, 문가, 삼성각, 요사채 등을 중건한 송계사가  그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유

 

        

삼성각

 

                                                 

  

삼성각에서 바라본 전경

 

                                                         

갈계숲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은사(隱士)의 정원을 이르는 임정(林亭)이다. 면적 2ha에 평균 수고 22m의 아름드리 2~3 백 년 된 소나무, 물오리나무, 느티나무 등이 군림을 이루어 지난 1982년 11월 23일 거창군 천연보호림 제2호로 지정되었다. 덕유산 기슭에서 발원한 원천이 송계를 지나 갈천(葛川)에 이르러 동서로 나뉘어 흐르면서 시냇물이 자연섬을 만들고 수목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조선조 명종 때 유현(儒賢) 석천 임득번(林得蕃)과 그의 아들 효간공, 갈천 임훈 등 삼 형제와 문인들이 시를 지으며 노닐던 곳으로 숲 안에는 가선정, 도계정, 병암정, 신도비 등이 세워져 지조 높은 선비들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갈천선생 호를 따서 세워진 가선정이 있어 가선림이라고도 하고 마을 이름을 따 치내숲이라고도 부르며 청학교가 놓인 뒤 청학림이라고도 하는데, 임정 가선림 청학림 모두 학덕 놓은 선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갈계숲

 

 

 

 

병암정

 

 

 

도계정

 

 

 

가선정

 

 

 

 

 

가선정의 천정 단청 그림

 

 

 

 

 

경모재

 

                                                                 

강선대(降仙臺)와 모암정(帽巖亭)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있다.

"조선조 인조 때 척화신 동계 정온선생이 남한산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던 덕유산 모리재 초입에 있는 명소이다.노송 한 그루가 고사목이 되어 서 있는 바위에는 강선대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옛날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대를 들러리 하고 있는 맞은편 고 숲에는 모암 임지예를 기려 세운 모암정이 물과 어울린다."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1436호)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산 53에 위치

" 이 불상은 광배와 받침대를 모두 갖춘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석불이다.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었다. 머리 부분의 상투모양은 높고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알맞은 이목구비를 갖춘 둥근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당당한 가슴과 함께 부드러운 경사를 이룬 유연한 어깨, 잘록한 허리와 날씬한 다리 얇은 옷자락 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는 불상의 뛰어난 입체감을 더해준다. 여기에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가슴 위로 몇 갈래의 U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다가 허리 부분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고 두 다리에 살짝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렸다가, 종아리 부분에서 큰 V자로 마무리했다. 이러한 옷자락의 표현법을 인도의 우드야나왕 여래상 형식이라 부른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가 성불한 후 한때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태어나 어머니에게 설법하였는데, 그때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부처가 잠시라도 지상에 없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cm 크기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불상이 최초의 부처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여래상의 옷자락의 조각형식이 이 석조여래상과 같은 형태였다고 한다. 이 같은 옷자락의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몸 전체를 감싼 광배에는 불꽃무늬를 새겼고,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받침대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솜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용암정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있다

옛날 두 마리의 용이 살면서 그중 한 마리는 하늘로 올라가고 한 마리는 사람들의 눈에 띄여 승천하지 못하고 용폭을 만들며 죽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수승대 어귀밖이요. 성악의 돛대라고 일컫는 용암정은 18세기 후반에 처음 용암 임석형 선생이 정자를 세우고 살았을 때 선비들이 시문을 논하던 곳이다. 용포가 돌아 굽이쳐 흐르는 곳에 정자를 떠 받치는 바위와 주변의 풍경은 옛사람들이 시와 낚시를 즐겼던 풍취를 담겨있고 선현들의 아아한 기품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수승대(搜勝臺)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에 위치한 수승대는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 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 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樂水 愼權) 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암구대(岩龜臺) 등이 있는데 이는 유림과 거창신 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으며, 솔숲과 물과 바위가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고 또한 자고암과 주변에는 고란초를 비롯한 희귀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관수루

 

관수루(觀水樓)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1740년(영조 16년)에 건립하였다. 觀水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 누각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계자난간 팔작지붕이고,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자연석 위에 세운 활주와 일부러 휘어지고 굽어 용트림한 형태의 기둥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거창지역 누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구연서원

 

                                                   

 

전사청

 

                                                     

 

山高水長碑 비

 

                                                  

 

 

 

 

 

수승대 거북바위

 

                                                    

 

구연교와 거북바위

 

                                   

 

 

 

 

 

 

樂水亭

 

                         

                        

석재로 만든 의자     거창지역에는 석재가 많이 나서 그런지, 이런 식의 석재 의자가 쉼터에 많이 있다.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을 찾아서 금원산에 들다

 

금원산 지능선의 부속산 현성산 서문가바위 능선을 바라보며 금원산 자연휴양림을 향하여 걸어간다.

논에는 황금 벼이삭이 익어가고 있다.

상천리 마을  집 집마다 담벼락에는 벽화들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폐사지 강남 사지 석조여래입상 앞에 선다.

옛 절터의 강남 사는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 또 언제 폐사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불상은 연화대 위에 서 있으며 광배가 크게 표현되었으며, 얼굴 부분은 많이 훼손되어 모습을 알 수 없다.

한송이 연꽃 봉오리가 피어오르는 듯한 연화봉(서문가바위)이 텅 빈 절터에 홀로 남아 서 있는 석불을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지재미 골짜기 어귀 북쪽 산기슭에서 너럭바위 위를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미폭(米瀑)을 지난다.

폭포수가 흐르는 모양이 쌀이 흘러내리 듯하여 '쌀 이는 폭포'라고도 하고, 옛날 위 쪽에 동암사란 사찰이 있어서 쌀 씻는 뜨물이 항시 

바위를 흘러 '쌀이는 폭포' 또는 동암폭포라고도 하였다.

 

금원산자연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지재미골로 향한다.

산악회 버스에서 내린 일단의 산님들과 섞여 선녀 담을 지난다.

계곡 외나무다리를 건너 둔덕을 넘어서니 계곡 건너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문바위(門岩)

"금원산 지재미골 입구에 위치하여 문바위(門岩)라 부른다. 옛 가섭사 일주문에 해당하는 가람 수호신으로 우리나라 단일 바위로는 가장 큰 바위로 알려져 있다. 이 문바위는 수 천년 세월 동안 호신암, 가섭암, 김달암, 두문암, 지우암, 기도암, 용의 여의주 등 주변 여건에 따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바위이다. 바위 앞 면에는 고려말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켜 순절한 이원달 선생을 기려 '達巖李先生殉節洞'이라고 암각 되어 있다."

 

가섭사지 뒤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다.

큰 바위 틈새 사이 돌계단을 오르니 바위굴 속 남향 바위에 마애삼존불상이 암각되어 있다.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보물 제530호)

"바위면 전체를 배(舟) 모양으로 파서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 입상을 얕게 새기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이 비교적 넓적하며, 얼굴에 비하여 작은 눈·코·입, 밋밋하고 긴 귀 등에서 둔중하고 토속적인 인상을 풍긴다. 신체의 표현은 각지게 처리된 어깨, 굴곡 없이 차분한 가슴, 막대 같은 다리와 좌우로 벌린 발 등에서 고려시대의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좌·우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었지만 어깨의 표현이 본존불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하고 있다.
끝이 날카로워진 연꽃무늬 대좌(臺座)와 새의 날개깃처럼 좌우로 뻗친 옷자락 등은 삼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형식화되고 도식적인 요소가 보인다. 결국 이 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가섭사지를 뒤로 한다.

유안청계곡을 오른다.

금원산과 기백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산상천 상류 유안청계곡은 길이가 2.5km다.

계곡 곳곳에 아름다운 소와 폭포가 있다.

물도 맑으며 수량도 많고 바위도 희고 운치가 그만이다. 

붉은 화강암 위로 쏟아져 내리는 자운폭포를 지난다.

3층 폭을 이루는 유안청 제2폭포는 높이가 80m 길이 190m이고 오폭과 지폭을 가지고 있다.

소설 '남부군'에서 빨치산 남녀 500여 명이 한꺼번에 목욕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암벽을 타고 갈라져서 쏟아지는 운치 있는 유안청 제1폭포에서 배낭을 풀고 한 참을 머문 후 발걸음을 돼돌린다.

황매산 자락 영암사지까지 가야만 하는 일정이라 갈길이 멀다.

 

상천리 황금벌

 

                                                       

 

상천리 담벼락 벽화

 

                                          

 

 

 

강남 사지  석조여래입상

 

                                           

 

미폭(米瀑)

 

                                              

 

선녀담

 

                                                     

 

소나무가 울울한 지재미골 입구

 

                                             

 

가섭암의 일주문  역할을  하는 문바위

 

                                       

 

문바위에 새겨진 글자  '達巖李先生殉節洞'

 

                               

 

가섭암 마애삼존불이 있는 바위 동굴 오르는 돌계단 길

 

                               

 

 

                             

이 불상은 석굴(石窟)의 암벽(岩壁)에 새긴 삼존불(三尊佛)인데, 전체를 보주형(寶珠形)으로 파서 광배(光背)인                                 동시에 빗물이 흘러내리는 홈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금원산(金猿山)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磨崖佛)이다. 가섭사지(迦葉寺址)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위굴이 있고 안쪽 남향 바위에 삼존불(三尊佛)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의 부분을 삼각선으로 그어 구획하고, 가운데는 보주형으로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새겼다. 중앙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로 거느린 모양이다. 중앙은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연꽃 수미단 대좌 위의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에 삼각형의 코, 얼굴에 비해 작은 눈과 입, 크지만 밋밋한 귀가 토속적 인상을 준다. 좌우 보살의 얼굴도 비슷한데 화려한 옷자락은 조금은 번잡한 느낌이다. 삼존불 모두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전체적으로는 납작하게 표현되었다. 본존불의 각진 어깨, 밋밋한 가슴, 부자연스레 가슴에 모은 팔, 막대 같은 다리, 좌우로 벌린 발등과 같은 도식적인 처리는 고려시대 부처상의 특징이다. 오른쪽에 새긴 글에는 1111년에 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래의 가섭암 자리는 1770년대까지 절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석재가 남아 있다. 지금 위천초등학교에 옮겨진 삼층석탑은 비슷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삼존불은 가섭암과 같이 고려시대에 있었던 절의 일부였을 것이다."
 

 

가섭사지    마애삼존불상관리사가 있다

 

                              

 

자운폭포

 

                                                          

 

유안청 제2폭포

 

                                          

떨어지는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유안청 폭포의 본래 이름은 가섭동폭이었다. 옛날 가섭사가 자리했던 곳에 조선시대에 지방향시 공부하였던 

공부방인 유안청(儒案廳)이 자리해 유안청 계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혹은 거창유 씨의 처음 터를 잡은 곳이라 유안청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여름철에도 발을 담그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물이 차고 깨끗하며, 소설가 이태가 쓴 '남부군'에 빨치산 남녀 오백여 명이 목욕하였다는 곳이기도 하다.

 

유안청 제1폭포

 

                             

 

매표소 앞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영승마을 입구에서 내린다.

영승마을

"옛날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사신을 마을에서 맞이하고 보냈다는 뜻으로 영송(迎送)으로 불렀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정월 초 4일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살던 처외숙과 장인을 찾아온 길에 마을 이름의 내력을 듣고 '영송의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송(送)과 승(勝)이 소리가 같기 때문에 영승(迎勝)으로 고쳤다'라고 한다. 마을 앞에는 농월담(弄月潭)이 머물고 사락정(四樂亭)과 영승서원(迎勝書院)이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일찍이 퇴계 선생은 이 고장에 반하여 '농사짓는 즐거움, 누에 치는 즐거움, 땔나무 하는 즐거움, 낚시하는 즐거움'을 사락(四樂)이라하여 시로 읊었고 또 영승촌 이른 봄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읊은 시 영승촌의 조춘(早春)이 사락정에 걸려 있다."

 

영승촌에 이른 봄을 만나니 

 

눈앞에 매화, 버들이 새봄을 다투네 
동풍이 먼저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누나

 

북쪽 기러기 장차 수빈으로 돌아가려니 
누가 월담을 만들어 나그네를 설레게 하는가 

 

나 일찍 구름처럼 이룬 현인들 글에 의지하노니 
술잔 앞에서 상대사를 말하지 말게나

 

야취는 바야흐로 기쁘고 참됨 뿐일세

 

사락정(四樂亭) 옆으로는 벼 이삭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영승서원 가는 길목의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은 저마다의 미학을 뽐내기도 하고, 용틀임하며 하늘을 오르는 용의 형상을 한 범상치 않은 노송들이다.

 

  

 

 

 

 

사락정(四樂亭)

 

                                        

 

 

 

미학을 뽐내는 노송

 

                                               

 

영승서원

 

                               

대병에서 둔내리 영암사지 가는 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거창의 일정을 이것으로 접고  군내버스를 타고 합천 대병으로 간다.

아슬아슬하게 가회행 버스에 환승하고 둔내리 영암사지 앞에서 내린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황매산 식당에서 식사하고 일박을 청하니 방이 없단다.

소개해준 바로 옆집 민박집에서 하루 유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