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무한(山情無限)

2019. 9. 24. 16:50시 모음/기행문

"명문(名文)을 읽으면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명문(名文)이란 시공(時空)을 초월해 누가 읽어도 감동을 받는 글을 말한다. 80년 전에 나온 글도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본 것처럼 새롭고 신선하며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그런 글이 명문이다.

그렇다면 명문(名文)의 필요충분 조건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문장이 문법(文法)에 맞게 완벽하고 어휘 사용이 적확(的確)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장만으로 명문(名文)이 될 수 없다. 여기에 내용이 좋아야 하고 글쓴이의 혼(魂)이 담겨 있어야 한다.

 

꽃을 피운 蘭

 

<기행문>

산정무한(山情無限)

정 비 석(鄭飛石,1911-1991)

......

 

 장안사(長安寺)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千萬不當)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찾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記念印章)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하여 천지에 참괴(慙愧)함이 없는 공명(公明)한 심경을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有無)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明鏡)! 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신라조(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 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明鏡)에 영조(映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는지 모른다.

.....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 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山情無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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