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의 품안에서 살다 간 시인 이성선

2019. 6. 26. 15:37시 모음/시

동녘 햇살을 받고 있는 설악산 대청봉 표지석

 

공룡능선과 외설악

 

설악산의 품안에서 살다 간 시인 이성선 

 

산사람에게는 여러 부류가 있다.

바위를 타고 얼음을 깨며 오르는 일을 사랑하는 클라이머는  그중 가장 도드라진 산사람이다.

클라이머가 산에 가장 잘 오르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산을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지는 의문이다.                  

클라이머에게 있어서 산은 타자다.     

그는 산에 머물지 않는다. 다만 그곳을 방문하여 오를 뿐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좋은 뜻의 '뜨내기'일 수밖에 없다.

여기 뜨내기의 대(對)가 되는 다른 부류의 산사람이 있다.

바로 '붙박이'로서의 산사람이다.

산의 품 안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산을 즉자(卽者)로서 받아들이다가 급기야는 산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사람들.

알프스에서라면 영양 사냥꾼이나 수정채취업자일 수도 있고, 히말라야에서라면 세르파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나무꾼이나 심마니일 수도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산은 그 해발고도와는 무관하다.이들이 바라보고 걷고 부대끼는 산은 미시적일 수도 있다.하지만 산의 섬세한 숨결과 천변만화하는 기상을 가장 깊숙이 알고 있는 부류는 바로 이 사람들일 것이다.산을 등반의 대상도 생활의 방편도 아닌 수행의 도량으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다.이들에게 있어서 산행은 온몸으로 정진하는 마음 공부와 다르지 않다.그들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끊없이 펼쳐진 눈밭을 걷고 무아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너럭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튼다. 아마도 산의 종교적 경건함을 가장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 부류는 이들일 것이다.
이들 다양한 부류들 중 과연 누가 진정한 산사람이냐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이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산을 대하여 살아간다.산의 진정한 위대함은 오히려 이 모든 부류의 산사람들을 하등의 차별도 두지않고 끌어안는다는 데 있다.         산에는 바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에는 들꽃과 약초와 시냇물과 바람소리가 있다.공포와 야만이 있는가 하면 성스럽기 이를 데 없는 생명의 너른 모태도 있다.그곳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얻고 등반을 즐기다가 돌연 삶의 비의(非意)와 마주쳐 전율이 일 만큼 치열한 깨달음에 가닿기도 하는 것이다.     

  

이성선은 평생을 설악산의 품안에서 살다간 시인이다.그에게 있어서 설악산은 삶의 터전인 동시에 수행의 도량이었다.그의 시에서 우리는 붙박이가 아니면 가닿기 힘든 산 사람의 높은 경지를 본다. 

그는 어찌 보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다 갔다.

그는 늘 산을 그리워하거나 산속을 걷고 있었을 뿐이다.하지만 그가 이 단순하고 질박한 삶을 통해서 걸러낸 빛나는 시편들은 산악문학의 범주를 넘어 한국 문학 전체를 놓고 보아도 당대 시 정신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삶과 예술은 산과 하나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산시'의 서문을 읽어보자.

"그 산으로 가고 싶었다. 그 산이 그리웠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산만 보면 마음 두근거려 합장한다.

그리고 벌써 10년 가까이 새벽이면 일어나 산을 향해 삼배한다.

산은 이제 멀리 있지 않다. 산은 이제 내게로 와서 나와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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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은 설악산으로 인하여 시인이 되었다.

설악산은 이성선으로 인하여 더욱 깊고 그윽해졌다.

< 심산의 '마운틴 오디세이' 설악산을 사랑한 우리 삶의 도반_이성선 시집산시,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중에서 >

 

 

흔들림에 닿아

이 성 선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설악을 가며 

이 성 선

 

먼저 깬 산봉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쫓겨서

옷자락 하얀 안개가 나무 사이로 달아난다

그 모습이 꼭 가사자락 날리며

부지런히 산길을 가는 스님 같다 

흔적 없는 삶은 저렇게 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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