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입석, 서석, 규봉 그리고 무등정상 천지인 삼봉

2014. 4. 19. 11:54나를 찾아 걷는 길/무등산無等山에 오르다

무등산無等山에 오르다

 (2) 입석, 서석, 규봉 그리고 무등정상 천지인 삼봉三峰

     2014.4.1

  

무등산은 광주광역시의 동쪽 가장자리와 전남 담양, 화순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광주. 전남의 진산이며 남도민의 신산이다.

무등산의 자랑은 토산이 지니는 후덕한 풍모와 더불어 정상을 중심으로 곳곳에 펼쳐진 웅장한 암석미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입석, 서석, 규봉으로 이것을 무등산 3대 석경으로 주상절리라 한다. 육당 최남선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금강산에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비길 경승이 없으며, 특히 서석대는 마치 해금강의 한쪽을 산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며 감탄했다.

 

무등無等을 보며

- 서 정 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 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증심사證心寺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4년에 철강 선사 도윤이 처음 창건했다고 하며, 고려 의종 11년에 혜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조선 세종 25년에 김방이 세 번째로 중수하면서 오백 전을 지어 국태민안을 기원했으나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아픈 과거도 있다.
제 초기 증심사는 항일적인 임제종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으로 오백전과 노전만 남겨놓고 모두 불에 타버리게 된다.

증심사의 현재 건물은 오백전, 산신각, 비로전, 대웅전, 지장전, 적묵당, 행원당, 종각, 일주문 등으로 되어 있다.

한국 전쟁의 참화를 피한 오백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70 - 80년대에 복원된 건물이다.

 

증심사 일주문

 

 

 

대웅전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7충 석탑의 1층 탑신 각 면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2층에서 7층까지의 탑신 각 면에 범자를 새겼다. 2층에서 7층까지 지붕 돌 아래 면에 연꽃무늬를 양각한 것이 특이하다.

 

 

 

 

 

오백전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건물이며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고 그 앞에는 증심사를 창건한 칠감선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오백 전은 개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적에 김방이란 사람이 경양방죽 공사 현장에서 커다란 개미집을 발견하고, 불심이 깊었던 김방은 개미집을 그대로 무등산 기슭에 안전하게

옮겨 주었다. 그 무렵 김방의 가장 큰 고민은 경양방죽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일꾼들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검방이 양식 창고에 가보니 개미들이 줄을 지어 쌀을 물고 창고로 들어갔다. 개미들의 행렬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김방은 개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증심사에 오백전을 지어 오백나한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렇듯 오백전은 하찮은 미물도 보은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며 만물이 회통하여 지은 전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백 전의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상은 1443년(세종 25년) 증심사를 3창 한 금방이 조성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흙으로 빚었다.

  

증심사 전경

 

 

                                                           무등산에서 제일 물맛이 좋다는 돌샘약수

  

 

  

봉황대  - 원래는 봉화대라고 하던 곳으로 천제단에 제를 모시고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한다

 

                                                                                           천제단

 

천제단(天祭壇)

광주 고을 사람들이 국태민안을 기원하거나 기우제 등을 지냈던 제단으로 천제봉 또는 천제 등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상대. 중대. 하대로

형성되어 있었다. 의재 허백련은 이 천제단을 민족의 제단으로서 이곳에 단군신전을 건립하여 민족신앙의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앞장서기도 했다.

  

당산나무

수령 482년의 보호수인 느티나무

반세기 동안 무등산을 지켜온 노거수老巨樹다.

 

반세기 무등산을 지킨  느티나무

 

 

 

                                                 느티나무의 밑동에서 고목의 풍모가 풍긴다

 

 

무등산  /  전 원 범

 

 

 

가슴에는 와서 우는 수 천의 새가 있고

 

시시로 돌아와서 환생하는 바람이 있고

 

언제나 피었다 지는 별같은 꽃이 있다

 

 

 

드높은 층층대의 꼭대기에 자리하여

 

푸른 하늘에 젖어 생각이 잠기고

 

흐르는 나날 속에서 짙어오는 그 가슴

 

 

 

가슴을 열어보면 쌓이는 세월의 소리

 

해를 품어 토해내는 진한 빛, 빛의 소리

 

은은히 울리어 와서 감겨든 석종소리

 

 

 

안개로 차오르는 파아란 욕망의

 

울어도 울어도 소리없는 그 기다림에

 

내리는 하늘 한 자락 노을빛을 태운다

 

 

 

먼 길을 헤매던 발자국들이 돌아와 있고

 

언덕에 묻혀 있는 그 많은 이야기로도

 

산은 늘 돌아앉아서 종일토록 말이 없다

 

 

새인봉璽印峰

높이 608m  정상의 바윗덩어리가 임금의 옥쇄와 같다 하여 새인봉 또는 인괘봉印掛峰이라 했다.

 

 

 

  

 

  

 

                               

새인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약수사 전경

 

 

 

입석대立石臺

입석대(1,017m)는 9천만년 전에 솟아올라 억겁의 풍상을 겪는 동안 쪼개지고 깎이고 눕고 하여 오늘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었다.

 

입석대 전경

 

 

 

 

 

어느 제 지으셨다 어이 다시 뜯으신고

 

거룩한 기둥받침 새것처럼 남았세라

 

터마저 하느님 나라 고개 절로 숙여라

 

-육당 최 남 선

 

 

 

 

 

 

천만년 비바람에 깎이고 떨어지고

 

늙도록 젊은 모양이 죽은 듯 살아 있는 모양이

 

찌르면 끓는 피 한 줄 솟아날 듯하여라

 

-노산 이 은 상

 

  

 

 

  

 

 

 

 

 

 

서석대瑞石臺

서석대(1,100m)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 있어서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서석의 수정병풍'이라고도 했다. 육당 최남선은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 왔다 하고 싶은 것이 서석'이라고 하였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부른 것도 실은 서석대의 돌경치에 연유한 것이었다.

 

 

 

 

 

  

서석대 표지석 뒤로 무등산 천지인 삼봉이 보인다

 

 

무등산 정상無等山 頂上 - 천지인 삼봉三峰

무등산 정상은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 이 그것인데 세 봉우리 다 선돌의 무더기로 되어 있다.

그중  제일 높은 천왕봉은 1,186.7m이다. 지왕봉은 일명 비로봉으로, 또 마치 머리를 얹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머리바위'라고도 한다.

 

좌측으로부터  지왕봉 인왕봉 천왕봉

 

 

 

                                                                    좌측으로부터 지왕봉 인왕봉 천왕봉

 

 

원효사 일주문에서 바라보이는  무등산 정상

 

 

오르고 또 오르며 높다 하지 아니 거는

 

다다르는 거기가 곧 하늘일 줄 여겼더니

 

구름은 발 아래언마는 해가 위에 있더라

 

 

 

펴다 만 손바닥이 나주평야 한 뜰이오

 

빨아 널은 허리띠가 영산강 흐름인데

 

저 앞에 두터비 집을 송광이라 하더라

 

-육당 최 남 선

 

 

규봉 圭峰

무등산 정상에서 동남쪽에 자리 잡은 규봉의 높이는 해발 950m,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에 속한다.

이 일대의 층암괴석을 규봉이라 부른다. 원래는 절입구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을 규봉이라 했다는데, 지금은 이 바위를 삼존석三尊石이라 한다. 규봉암에 들어서면 삼존석 옆쪽으로 넓은 반석이 있는데 이것이 입석 서석과 함께 무등산 3대 석대의 하나인 광석대廣石臺다. 규봉암의 뒤편에 솟아있는 총 석은 돌 하나하나가 신공이 옥을 깎아 세운 듯한 선돌이며 바위의 사이사이 자라난 소나무와 잡목 숲은 형언하기 어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규봉암圭峰庵

규봉암은 창건연대가 확실하게 전하는 문헌은 없고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절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어 창건하기는 798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순응대사였다고 한다. 신라의 명필 김생이 쓴 규봉암의 현판이 전해 오다가 절취당했다는 유서석록의 기록으로 보아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사찰로 존재했다고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위 기록으로 보면 어느 것이 맞든 지 천년 고찰이라고 할 것이다. 6.25 사변으로 인하여사찰이 불에 타 10여 년간 폐허가 되었다 1957년 관음전과 요사채를 지어 복구하여 천년 고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사천왕문 역할을 겸하는 규봉암 圭峰庵 범종각

 

 

                                                                아름다운 규봉암 석축 담장

 

 

 

                                                             관음전 뒤쪽의 총석

  

규봉암 뒷편의 총석

 

 

                                                                                      

 

넓은 반석盤石이 광석대廣石臺다

규봉암에서 바라보면 화순의 몰염적벽과 동복수원지가 한눈에 펼쳐지고 청명한 날이면 멀리 지리산, 조계산, 백운산,

제암산, 모후산, 월출산이 바라다 보인다.

 

 

 

범종각과 삼존석

삼존석은 여래존 석, 관음존 석, 미륵존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도선국사가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 관음종석은 지진으로 윗부분이 끊겨 누워 있다..

 

 

생강나무 꽃

 

 

  

원효사元曉寺

 

원효 8경元曉八景

 

무등명월無等明月   원효사에서 무등산 정상에 솟아오른 달을 바라보는 운치

 

원효모종元曉暮鐘   저녁 으스름 사이로 들려오는 원효사의 종소리

 

의상모우義湘暮雨   해 저물녘 의상봉에 내리는 비의 너울

 

서석귀운瑞石歸雲   서석대에 감겨드는 뭉게구름

 

안양노불安養老佛   안양사의 오래된 부처님

 

삼전열적蔘田烈蹟   삼밭실에 서려 있는 충장공의 충절

 

만치초적晩峙草笛   늦재에서 들려오는 나무꾼들의 풀피리 소리

 

원효폭포元曉瀑布   장쾌하게 쏟아지는 원효폭포의 물줄기

 

  

 

회암루晦巖樓

회암루에 오르면,  무등산 정상에 솟아오른 달, 서석대를 감싸고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해 저물녘 의상봉에 내리는 비의 운치를 볼 수 있고, 원효사의 저녁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회암루에서 바라보이는 의상봉과 무등산 정상

 

 

  

의상봉

 

 

  

대웅전

 

 

  

좌측으로 원효대사 진영이 모셔진 개산조당

 

 

  

무등선원

 

 

 

개산조당開山祖堂

원효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개산조당은  원효대사의 진영을 모신 전각으로, 외벽에는 원효대사의 일생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개산조  원효대사 진영

 

 

 

*  원효대사 일생을 묘사한 외벽화

 

 

 

 

 

 

 

 

 

 

 

 

 

 

 

 

 

범종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