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梅花 꽃잎이 亂粉粉하는 春雪軒

2014. 4. 14. 13:04나를 찾아 걷는 길/무등산無等山에 오르다

무등산無等山에 오르다

 (1) 梅花 꽃잎이 亂粉粉하는 春雪軒

      2014.3.31

  

전남대 대명매(大明梅)를 찾아서

 

무등산無等山 가는 길 광주에 가면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전남대 교정에 있는 古梅,  '대명매大明梅를 보러 가는 것이다.

대명매는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 선암사의 선암매, 소록도의 수양매와 더불어 '湖南五梅'로 불린다.

 

전남대 교문 옆에는 우람한 플라타너스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다.

하늘로 하늘로 높이 올라 가지를 펼치고 둥근 열매를 가득 달고 있는 모습이 신령스럽다.

 

  

플라타너스  

김 현 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둥근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있는 플라타너스

 

 

교문을 들어서서 메타스퀘이어 길을 걷는다.

교목인 老巨樹 느티나무  두 그루가  하늘 높이 가지를 펼치고 서 있다.

우람한 개잎갈나무 밑을 지난다.

  

메타스퀘이어 길

 

 

노거수 느티나무 두 그루

 

 

개잎갈나무

 

대강당 앞에는 만개한 홍매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1621년 조선 중기의 학자 월봉 고부천이 명나라  희종 황제로부터 매화 한 분을 증정받아 고향인 담양에 이식하고 

'大明梅'라 이름 붙였던 매화나무다.

수령 400년의 古梅

뒤틀린 시꺼먼 가지에는 화사한 분홍색 겹꽃이 만개하였다.

만첩홍매

은은한 매향이 코끝에 묻어난다.

 

"매서운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매화가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황벽 선사의 우레 같은 선시가 생각난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아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 내어야 찬란한 생을 구가할 수 있다.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자기 향을 결코 팔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가지고 있다.

 

오동은 천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자기향을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 않고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암향을 즐기며 고매의 둘레를 돈다.

  

대명매(大明梅)

 

 

이 매화나무는, 조선 중기의 학자 月峰 고부천(1578-1636)이 1621년 서상관으로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  희종 황제로부터 홍매 1분을 증정받아 고향인 담양군 창평면 유촌리에 심고 '대명매'라 명명하였다. 1961년 월봉의 11 세손인 농과대학 학장 고재천 박사가 이 매화나무를 농과대학에 기증하였고,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수령은 약 400년이고, 옅은 분홍색의 겹꽃이 핀다.

 

 

 

 

                                                                                      대명매(大明梅)

 

 

춘설헌(春雪軒)

 

시내버스를 타고 증심사 버스 종점에 도착하니 정오에 가까워진다.

기온이 올라 쟈켓을 벗어 배낭에 넣는다.

 

대웅전 연꽃계단이 있는 문빈정사를 둘러보고 증심교를 건넌다.

의재교를 지나니 산기슭 삼나무 숲 속에 자리 잡은 돌 축대 위의 관풍대觀風臺가 보인다.

관풍대는 의재 허백련이 지인과 학생들을 위해 만든 차실(茶室)이다.

觀風이란 단어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써 '세상을 본다'라는 의미이다.

의재는 춘설 헌 바로 아래에 관풍대를 짓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차를 시음하면서 차를 중심으로 한 만남의 장, 대화의 장을 마련하였다.

 

문빈정사   대웅전 연꽃계단

 

 

차실인 관풍대觀風臺    -현재는 다례실습장으로 사용된다

 

 

관풍대 옆을 흐르는 실 계곡을 건너 산기슭을 오르니 춘설헌 뒤편이다.

건물을 돌아드니 산기슭 언덕은 만개한 매화로 새하얗다.

순간, 코를 찌르는 짙은 매향이 정신을 아뜩하게 한다.

춘설원은 매화 꽃잎이 난분분亂紛紛하고 있다.

망연하여 걸음을 멈춘다.

꽃잎이 어지러이 흩어져 내리는 텅 빈 집 춘설 헌 작은 마당 한 구석에는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 있다.

석 아정기념비 옆에는 수선화가 해맑게 피어 있고,  현관 입구 담벼락 앞에는 흰 진달래가 피어있다.

어린 매화나무와  대숲이 마당가에 있다.

 

춘설헌은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1891-1977)이 해방 후 30여 년간 기거하면서 이룩한 허백련 예술의 산실이다.

차밭을 가꾸며 茶人으로서의 탈속한 경지를 추구한 곳이기도 하여 墨香과 茶香이 깊게 배인 곳이다

 

본래 이곳은 마치 중국의 난저산 기슭에 있는 난정蘭亭과도 같은 풍치를 느끼게 하는 곳이라 하여, 독립운동가였던 석아 최원순(1891-1936)이 말년에 지병을 요양하기 위해 별장을 짓고 은거하며 자신의 호를 따 석 아정石啞亭이라 했다. 그러다 1936년 서거 전에 오방 최홍종에게 양여하여 오방정五放亭이 되었다. 해방 후 오방은 증심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의재에게 이 건물을 양도했는데 건물이 낡아 1958년 의재가 지금의 건물로 개축하고, 중국 나대경이 지은 '약탕시' 가운데서 '春雪'이라는 이름을 따서 춘설 헌春雪軒이라 불렀다. 차를 좋아했던 의재는 무등산 산록에 일본인이 일궈놓은 차밭을 광복 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삼애다원이라 부르고 차밭을 가꾸었다. 이 차밭의 찻잎으로 만든 차를 '춘설차春雪茶'라 했다.

 

춘설헌을 찾았던 육당 최남선은 의재의 茶道가 초의와 추사에게서 유래했음을 노래했다.

 

무등차-春雪茶

천고의 무등산이 수박으로 유명 터니

홀연히 "證心春雪" 새로 고개 쳐들었네

이 백성 흐린 정신을 행여 밝혀 주소서

 

차 먹고 아니 먹은 두 세계를 나눠보면

부성富盛한 나라로서 차 없는데 못 볼러라

명엽茗葉이 무관세도無關世道라 말하는 이 누구뇨

 

해남변海南邊 초의석草衣釋과 관악산하 완당노阮堂老가

천리에 우전차로 미소주고 받던 일이

아득한 왕년사往年事러니 뒤를 그대 잇는가

 

  의재와 다우茶友였던 노산 이은상은 그와 밤새 차를 마신 후 노래를 남겼다.

 

무등차의 고향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내어

초의선사 다법대로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보고 다시 한 잔 향내 맡고

다도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동다송東茶頌 제3 송 초의 선사의 역주에 보면,

남송 때 이릉 사람인 나대경의 수필집 '학림옥로'에 수록된 시구 중 일부를 골라 인용하면서 초의 스님이 임의로 붙인 제목의

나 대경약탕시羅大經瀹湯詩가 있다.

 

羅大經湯詩

松風檜雨到來初  急引銅甁離竹爐

待得聲聞俱寂後  一春雪勝醍

 

 

소나무에 바람 불 듯 전나무에 비 내리듯 물 끓는 소리 들려오면 

지체 없이 동병을 죽로에서 내리고

물 끓는 소리 고요해지길 기다렸다가

달여 마시는 한 주발의 춘설차 제호보다 뛰어나네

  

엄다飮茶는 탕관의 물이 끓는 소리를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솔바람 소리처럼 물이 끓다가 이어서 전나무에 내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전나무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두드리는 리드미칼 한 북소리처럼  가슴을 잔잔히 울리고 적시던 소리였다.

그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다.

등파고랑騰波鼓浪의 상태에서 전나무에 비 내리는 듯한 소리 들리면 지체 없이 탕관을 죽로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무념무상 소리가 고요해지길 기다렸다 찻잎 넣어 달여 낸 향기 나는 한 주발의 춘설차는 제호보다 뛰어나구나.

 

  

만개한 매화꽃 속에 파묻힌 춘설헌

 

 

꽃잎이 어지러이 흩어진 마당가에 피어 있는 보랏빛 제비꽃

 

 

 

                                                                               춘설헌(春雪軒)

 

 

石啞亭(五放亭) 기념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당시의  의재 허백련

 

 

 

 

 

 

 

 

매화

 

 

의재 묘소에 오르는 산기슭 풀밭에 산자고가 단아하게 피어 있다.

뾰족한 2개의 뿌리 잎과 함께 자란 꽃줄기 끝에 흰꽃이 하늘을 향해 피어 있는 산자고를 바라보고 있으 마음이 환해지고 맑아진다

  

 

 

산자고

 

 

 

                                                                                    의재 묘소

 

 

문향정聞香亭을 향하여 둔덕길을 걷는다.

문향정은 본래 의재가 실습용 축사로 지었다가 후에 춘설차 보급 장소로 사용되었다.

지금 이 건물은 노후한 건물을 해체하고 같은 규모로 개축해 춘설차 문화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실내로 들어서니 찻잔이 창문가로 진열되어 있다.

녹차를 주문하니 다구와 함께 세작 춘설차 한 봉지를 내놓는다.

찻잎을 넣고 찻물을 부어 차를 달인다.

연둣빛 찻물.

  

춘설차 

허백련 선생 다원에서 / 안 도 섭

 

전라도 시인의 집 갔더니

쟁반에 춘설차 올려 나온다

 

투박한 찻잔에선

서린 김 피어오르고

혀끝 아린 떫은맛

 

우정도 이러할 까

떫은 듯 깊은

속내 마음 주고받으며

 

옛이야기 껄껄껄

소담히 고담 즐기며

춘설차 투박한 찻잔을 비운다

 

공장을 가동하는 물레방아가 있는 춘설차 실습장으로 향한다.

듬성듬성 심어 놓은 꽃이 떨어진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둔덕길을 걷는다.

무등산록 차밭에서 따낸 찻잎을 덖고 손으로 비벼대는 전통적 제다의 전 과정을 실습하는 곳이다.

풀밭에는 잔잔한 보랏빛 풀꽃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다구와  달여 낸 춘설차

 

 

 

                                                                    실내 창가에 진열되어 있는 찻잔

 

  

풀꽃

 

 

 

                                                                          물레방아가 있는 춘설차 실습장

 

  

의재미술관은 월요일이라 안타깝게도 휴관이다

'문자향 서권기 文字香 書卷氣'라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만권의 책을 읽으면 몸에서 문자의 향기가 나고 서책의 기운이 흐른다는 뜻이다.

文字香 書卷氣는 남종문인화풍 서화론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미학개념이다.

 

추사 김정희가 아들 상우에게 보내는 글에 文字香과 書卷氣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古高雅한 뜻이 없으면 손에서 나올 수가 없다.

가슴 속에 淸古高雅한 뜻이 있어도,  또 가슴 속에 文字香과 書卷氣가 없으면 능히 팔뚝 아래 손 끝에서 발현되지 않는다.

모름지기 가슴 속에 먼저 文字香과 書卷氣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근본이며 예서를 쓰는 비결이 된다."

 

"난치는 법 역시 예서 쓰는 법과 비슷하니, 반드시 文字香과 書卷氣가 있은 다음에야 잘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일 그림 그리는 법을 따르려면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옳다."

 

男兒須讀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실을 만한 책을 읽어야 한다'하였다.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아름답다.

 

춘설차밭 가는 길 화살표 방향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만개한 매화나무는 온통 새하얗고 분분이 꽃잎이 날리고 있다.

뚝뚝 떨어진 동백꽃은 지상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있다.

차밭 가는 길이 끊어진다.

 

  

의재 미술관 입구

 

 

문자향 서권기 현수막이 걸린  의재 미술관

 

 

 

 

 

  

지상에서 다시 꽃을 피운 동백꽃

 

 

증심사 왼쪽 산기슭을 따라 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 길섶에 자란 제비꽃을 보며 허위허위 무등 산록을 오르니 차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 능선으로 둘러싸인 무등산 산록 5만 평 삼애다원三愛茶園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은 차밭 너머 하얗게 만개한 매화나무와 대나무 숲이 보인다.

멀게 또는 가깝게 부드러운 산 능선이 감싸 흐르고 있다.

해발 700m의 이 산록은 일교차가 크고 안개와 구름이 많다고 한다.

새인봉과 운소봉이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탱자나무 울타리

 

새인봉과 운소봉이 바라다 보인다

 

 

 

 

  

 

 

 

운소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삼애다원과 증심사

 

 

毅齋 許百鍊(1891-1977)의 예술세계

< 김인환 -'허백련의 예술세계'에서 >

  

"허백련을 일컬어 한국에 있어서 '한국 남화의 마지막 보루이자, 거장 또는 최후의 남화가南畵家'라고 평하는 글이 많다. 그것은 그의 예술세계가 어디까지나 정통적인 남종화에 뿌리를 두고 그 법통을 지키며, 거기서 별로 일탈한 적 없이 어느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그 정신근저에까지 파고들어 가서, 그 토양 위에서 한국적인 수묵화의 맥락을 정립하려고 노력한 화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허백련 이후, 사실상 중국에서 받아들인 남화의 화법이나 필치의 정제, 보다 더 근간을 이루는 동양 수묵화의 정신을 고지식하게 또는 고집스럽게 회화를 통해서 발현시킨 화가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허백련을 '철두철미한 남화작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남화의 큰 봉우리인 옛 중국의 黃公望을 지향하여, '文字香.書卷氣'를 중시하는 선인들의 선비적 인격완성에 뜻을 두었던 점, 스스로 자연을 벗하며 자연 속에서 然我一致의 경지를 구현하려던 의도 자체가 그렇다.

......

허백련의 또 다른 면모는 민족사상가로서, 또는 농민운동가로서도 족적을 남긴 점이라고 하겠다. 이른바 三愛(愛天, 愛土, 愛族)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또한 나라를 부강시키기 위해서는 농촌운동이 절실하다는 판단 아래 농업고등기술학교를 개설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茶園과 農園을 가꾸며 철저하게 탈속과 근로생활을 실천한 화가이기도 했다. 만년의 허백련은 그의 향리 호남지방의 광주 무등산 기슭에 생활 근거지를 정하고, 오로지 예도와 농촌운동의 길로만 정진해 왔다. 예도에 있어서는 많은 추종자의 후학들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練眞會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화가집단에 위해서 그의 예술관과

회화정신에 있어서의 정수라고 할 핵심요소들이 계승되어 오는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