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울의 도심都心 , 종로구의 이곳저곳 -(하)

2013. 9. 16. 22:28나를 찾아 걷는 길/'카라부란'이 불어대는 沙河를 건너

'카라부란'이 불어대는 沙河를 건너는 나그네를 꿈꾸며

 (3) 서울의 도심都心 , 종로구의 이곳저곳 -(하)

 

1. 필운대弼雲臺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배화여고 교내로 들어서서 좌측 여고 건물 뒷 쪽으로 돌아가니 '낙석위험'표지판이 걸린 높다란 암벽이 가로막고 있다.

"이항복 집터"라고 새겨진 비석이 보인다. 암벽 왼쪽면에 붉은 칠을 한 '弼雲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암벽 밑에는 흐르는 석간수가 고이게끔 암반에 홈이 빠져 있다. 필운弼雲은 이곳에 살았던  이항복의 호다. 조선 선조 때에 대제학을 지내었으며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다. 이항복(李恒福, 1556년 ~ 161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정치가이며·시인이며·작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靑華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죽마고우인 이덕형과의 우정 이야기(오성과 한음)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까지 몽양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및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북청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하였다.

 

 63세의 노정승 백사가 북청 귀양 길  철령 높은 재를 넘으며 읊었던 시조가 우리를 애달프게 한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북청에 도착한 백사는 가슴 막혀하며 또 시를 읊는다.

겹겹이 싸인 산들이 정말로 호걸을 가두려는데
고개 돌려 일천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을 막는구려

 

암벽 가운데에는,  필운의 9대 손이며 이조 마지막 영의정이었던 귤산 이유원이 선조의 옛집을 찾은 감회를 적은 예서체의 시가 단정히 새겨져 있다.

 

우리 조상님 사시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는데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는 흰구름만 깊이 잠겼도다

백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유풍은 가시지 않아

옛 조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필운대는 복사꽃 무리가 가장 유명했던 모양이다.

봄에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복사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한다.

 

정조대왕도 필운대 꽃구경을 하고 詩를  지었다.
백단령 차려입은 사람들은 모두 시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그러나 지금은 배화여고 건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필운대는 감옥과 같다.

 

‘필운대’라는 글씨는 이항복의 글씨라기보다는 이유원의 글씨로 추측된다

 

 

필운대 각자 바위 전경

 

 

 

 

 

고종 10년(1889)   필운의 9대 손이며 이조 마지막 영의정이었던 귤산 이유원이 선조의 옛집을 찾은 감회를 적은 예서체의 시가 새겨져 있다

 

 

암벽 오른쪽에 새겨진 아홉 사람의 이름은 선생의 집을 지을 때 관련되었던 사람들로 추측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의 필운대 弼雲臺

 

 

2. 수성동水聲洞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의 화폭이 됐던 서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계곡'이 그림처럼 되살아났다.

현 옥인아파트 일대는 조선시대 수성동(水聲洞)으로,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겸재 정선의 <수성동> 회화에도 등장하며, 당시의 풍경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전통적 경승지'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이 일대가 조선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주 무대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계곡 아래에 걸려 있는 돌다리는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고,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보존된, 통돌로 만든 제일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이 다리에 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제택조에 안평대군의 집에 대한 설명으로

"인왕산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 한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의 화폭이 됐던 서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계곡'이 그림처럼 되살아났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nbsp; 1751년 경의 수성동水聲洞&nbsp;&nbsp;&nbsp;<간송미술관 소장>

 

 

 

 

1751년 경,&nbsp;인왕산에서 흐르는 계류는 수성동과 옥류동으로&nbsp;갈래가 되어 흐르다 기린교 위쪽에서 합수되어&nbsp; 청계천으로&nbsp;흘렀다

 

 

  

 

기린교

동국여지승람에는 "인왕산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 한다." 라는기록이

남아 있다. 통돌로 만든 다리(기린교)가 원형 보존되었다.


 

옥류동 계곡

 

 

수성동 계곡에 예쁘게 피어 있는 참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