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릇 공부는 의문(疑問)을 품는 데서 부터 시작된다

2013. 3. 20. 12:41문화유적 답사기/秋史 적거지를 찾아 걷다

 추사 적거지(秋史  謫居址)를 찾아 걷다

 (1) 무릇  공부는 의문(疑問)을  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2013.3.12  화요    맑음

 

수선화부(水仙花賦)  목판

"중국 청나라 호경(胡敬)의 글로, 추사가 옮겨 적은 것이다. 앞부분에 추사의 수선화 그림이 있다. 수선화 그림의 화제는 다음과 같다.

趙彛翁以雙鉤作水仙, 今乃易之以禿潁亂抹橫蔬, 其揆一也. 居翁. 

중국 원나라의 조맹견(彛齋 趙孟堅)이 쌍구로써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모지랑 붓으로 바꿔 되는 대로 그렸으나 그 법도는 한 가지다"

 

고도를 낮춘 비행기 창문으로 제주항과 제주 시가지 그리고 한라산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어느새 기체는 제주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린다.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산방산 옆 사계리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푼다.

추사가 위리안치 형벌을 받은 제주 대정현은 육지로 천 리, 바다로 천 리를 가야 하는 멀고 먼 길이다.

한양을 출발한 추사는 전주.남원.나주.해남을 거쳐 이진항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제주 화북진에 도착한 뒤 산간 도로를 걸어

대정현에 도착하는데 한 달이 걸렸다.

머나 먼 그 길을 비행기와 버스로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하니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비행기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제주항 제주시가지 그리고 한라산

 

 

  숙소에서 가벼운 행장을 꾸리고 길을 나선다.

산방산과 단산(簞山)이 바라 보인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돌담과 푸른 마늘밭만 보인다.  

군데군데 화사한 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바람을 맞으며 걷는 들길이 너무도 싱그럽고 편안하다.

마음은 한없는 자유로움으로 충만되어진다.

 

 

 

 

단산(簞山) 아래 자리 잡고 있는 대정향교

단산 아래 송악산을 바라보며 남향하여 자리 잡은 대정향교(大靜鄕校).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대정향교는 태종 16년(1416)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목적으로 하여 대정현 성내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북성 안에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다 하여 중간에 동문 밖으로 옮겼고, 다시 서성 안으로 옮겼으나 효종 4년인 1653년 이원진 목사가 현재의 위치인 단산 아래쪽으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조 48년(1772)에는 명륜당을, 헌종 원년(1834)에는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대성전에는 오성(五聖) , 송조 4현(宋朝 四賢),  해동 18현(海東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오성은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송조 4현은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해동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돌담장 너머의 대정향교 전경

 

 

대정향교의  낮으막한  동정문(東正門)

 

 

  

오늘이 공교롭게도 공기 2564년 춘기석전대제(春期釋尊大祭)가 열리는 날이라  대정향교 주차장에는 차가 빼 욱하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첫째 丁日)에 거행하는 석전대제(釋尊大祭)는 공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의 제단 위에 제수를 

차려놓고 폐백과 술을 드리는 의식이다.

 

돌담 사이로 작고 낮으막하게 만든 동정문(東正門)을 단정한 마음으로 허리 숙여 들어간다.

고개 들어 앞을 바라보니 허름한 건물  그리고 지붕 뒤로 소나무(곰솔)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절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연상시킨다.

안으로 들어서니 명륜당 앞마당에는 자리가 깔려 있고 식사하는 사람들로 왁자지끌 가득하다.

석전대제가 끝났나 보다.

"식사하고 가세요" 하고 권한다.

  

대정향교의 공부방인 동재에는 추사가  썼다는 해서체의  "의문당(疑問堂)" 현판이 걸려 있다.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되어 왔던 추사 김정희가  대정현 훈장(訓長) 강사공(姜師孔)의 청을 받아  헌종 12년(1846)에 쓰고, 오재복(吳在福)이 각자 한 것이다.

 

의문당(疑問堂)!

글자 그대로 의문당 은 궁금하거나 의문이 나는 학문의 내용을 추사에게 묻고 설명을 듣는 장소라는 뜻으로,
추사가 지역 향교유림·지방유생·학도들에게 경학과 시문, 그리고 서도를 가르쳐 준 곳으로도 유명하다.

   

" 추사는 왜 '의문당'이라고 썼을까?

인간이란 원래 알지 못하는 것에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존재다.

그리고 몰랐던 사실들을 주체적으로 알려고 노력한다.

무지한 까닭에 더욱더 알고자 한다는 말이다.

무지를 자각하는 일은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관습이나 전통 등이 진정으로 옳은지를 곰곰이 되씹어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사는, 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인 상식적인 이야기들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공부임을 대정 향교

학생들에게 일깨우려 했다."

( 양진건의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에서)

 

또, 강사공은 1811년(순조 11)은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대성전 뜰에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대성전 뜰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와  두 그루의 팽나무만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살아남은 수령 200년의  소나무는 오늘도 푸른빛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부챗살처럼 구불구불한 가지를  활짝 펼친 팽나무가 신비로워 보인다.

가슴이 뭉클거린다.

 

"공부나 인생이나 매한가지 의문을 던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의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추사는 우리에게 그 대답을 몸소 가르쳐 주려 했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크다.

그러기에 우리는 '추사 유배길'을 걸으며 내 인생의 길을, 내 삶의 길을 추사에게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기꺼이 대답을 한다.

"내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 닳게 했고 천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으니 당신도 그렇게 노력하시오"라고 "

 (양진건의 '제주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에서)

 

무릇 공부는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200년 수령의 소나무와 팽나무가 웅변해 주는 듯하다.

  

세한도가 떠 올려지는 집과 소나무

 

 

동재에 걸려 있는  '疑問堂'  현판(모조품)

 

 

  

추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疑問堂'  현판(진품)

 

 

  

대성전과  팽나무

 

 

 

대정향교 대성문을 나선다.

단산 기슭 세미물 표지석이 서 있다.

이곳은 돌세미(石泉) 혹은 세미물이라 하여 인성리와 사계리의 수원지로 사용되는 샘물이다.

추사가 세미물이 멀리 있어 물을 길어오기가 어렵다고 호소한 것으로 보아, 단산에서 나는 산(山) 물인 이 세미물을 길어 차를 달여 마셨을 것이다.

 

대성문(大成門)

 

 

  

세 미물 표지석

 

 

 

단산에서 나는 세미물

 

 

  

대정현 추사 적거지를 향하여 걷는다.

추사가 걸었을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언덕을 오르다 뒤를 바라보니 파란 마늘밭이 펼쳐져 있고 멀리 송악산이 바라 보인다.

 

마늘 밭에 우뚝 서 있는 방사탑이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방사탑 너머 단산의 모양이 박쥐처럼 보인다.

 

단산은 바굼지오름, 바구미오름, 파군산(破軍山)으로도 불린다.

 

"옛날 산야가 물에 잠겼을 때 이 오름이 바굼지(바구니의 제주어) 만큼만 보였다는 전설에 연유하여 바굼지 오름이라 불려지다

한자로 대역하여 (대광주리 단)山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박용후(향토사학자)는 정우지(靜友誌)에서 바굼지, 바구니와 가까운 말은 바구미인데 바구미는 박쥐의 옛말로 이 오름의

모양새가 박쥐를 닮은 데 연유하고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파군산(破軍山)은 바굼지 오름의 이두식 표기이다."

 

마늘밭 너머 멀리 송악산이 아련히 보인다

 

방사탑

 

방사탑은 마을 공동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역 주민이 공동으로 돌을 쌓아 세운 향토유산이다.

이 방사탑은 '알뱅 뒤' 부르는 지역으로서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곳이 허하여 마울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고,

가축이 병들어 죽어가자 이를 막기 위해 방사탑을 세웠는데 이후부터 그러한 현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상부 중심에는 사람 형상의 돌을 세워 놓았으며, 조선조 때에 축조된 것으로서 1997년에 보수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단산의 모양이  박쥐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