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귤중옥(橘中屋) 가시울타리에 떨어진 동백꽃이 다시 붉은 꽃을 피운다

2013. 3. 24. 12:27문화유적 답사기/秋史 적거지를 찾아 걷다

 추사의 적거지를 찾아 걷다

 (2) 귤중옥橘中屋)  가시울타리에 떨어진 동백꽃이 다시 붉은 꽃을 피운다

 

 

추사의 벗 동백

 

이 청 리

 

 

 

추사의 벗이 어디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마음속에 그 세한도를 놓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나와 벗 사귐이 어떠하시겠는가

 

자고로 하늘이 시들지 않는 꽃 하나

 

피어 놓은 시절이 겨울이 아니지 않은가

 

이 겨울 추사와 내가 꽃을 피워 봄이

 

어떠하시겠는가

 

벗이란 보여주는 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꽃을 피우는 것이

 

하늘의 꽃이 아니시겠는가

 

내가 추사의 몸으로 돌아가 짓푸르고

 

추사가 내 몸으로 돌아와

 

이렇게 활짝 꽃을 피어 봄이 어떠하시겠는가

 

 

귤중옥(橘中屋)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에 떨어진 동백꽃이 다시 붉게 피고 있다

 

      

단산을 뒤로하며 잠시 걸으니 옛 대정현성 동문지(東門址)에 도착한다.

큰 고요함, 대정(大靜).

적막하게 고요한 마을이어서 옛사람들이 이름을 대정이라 지었나 보다.

성벽 앞으로 '대정 고을 표지석'이 서 있다.

 

대정현성이 축조된 것은 태종 18년(1418)이고 동서남북 사방에 문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동문 근처 일부에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선조 때에 성문 네 곳에 돌하르방 4기씩을 세웠다고 한다.

옛 동문 앞에는 3기의 돌하르방이 다소곳 서 있다.

 

 

 

                         

대정고을 표지석  -뒤로 복원된 성벽이 보인다

 

                     

대정현성 문입구에 세워졌던 돌하르방 (추사관 입구 동측)  : 목도리 같은 것을 두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대정현성 동문 옹성 내에 있던 돌하르방

              

 

한라산이 내민 백록수

 

                 이 청 리

 

 

한라산이 지친 몸 풀기나 한 듯

 

대정까지 내려와 추사 계시는가

 

부르는 소리에

 

붓을 들다 말고 문밖을

 

나서서 모셔드리네

 

우뚝 서 있어야 할 한라산이 대정 쪽으로 내려와

 

그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고

 

가까이서 접한 한라산은

 

바람에 입은 상처가 어디 겉뿐이었으랴

 

속은 꿰매도 꿰맬 수 없는 몸이지만

 

묵을 대로 묵은 백록수 한 잔을

 

채운이 비껴 나는 듯 따르고 있었네

 

이렇게 한라산과 마주 하지 않았더라면

 

그 긴 유배를 어이 견딜 수 있었으랴

 

 

대정읍성 동문 안쪽에 추사 적거지로 지정된 곳에는 '추사김선생적 여유허비(秋史金先生謫廬遺墟碑)'가 서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이며 시. 서. 화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조선 순조 19년(1819)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다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김 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에 처음 집을 잡아 가시울타리를 두른 유배처는 포교 송계순의 집이었고, 이곳에 머물다가 2 년 뒤  현 추사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 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는데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탱자나무 가시울타리가 둘러쳐진 돌담장 밑에는 추사가 그토록 사랑했던 수선화가  오늘도 눈이 시리도록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양에서는 그토록 귀한 수선화를 이곳 사람들은 수선화를 알아주지 않고 원수 보듯 호미로 파내어 버리고 소나 말에게 먹이고 짓밟아 버리는 것을 보고 처량한 감회가 일어 눈물이 흐른다고 하였다. 추사가 9년간의 유배 생활 중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방대한 량의 독서를 하였으며,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추사체를 완성했고, 한겨울 쓸쓸한 자화상인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쳐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추사체를 완성한 훗날 추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硯 禿盡千毫"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 평생에 벼루 열개를 갈아서 구멍 냈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동시대인 환재 박규수는,

"완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유배 이전에는 고대 비문 글씨와 옹방강의 글씨를 본받은 것으로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갔다 온 후에는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없이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다"라고 평하였다.

 

추사의 흔적을 더듬으며 강도순의 집 바깥채, 모거리, 안거리를 기웃하며 마당을 서성인다.

동백나무에는 붉은 꽃잎과 노란 꽃술의 화사한 수많은 동백꽃이 반질거리는 녹색 잎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환하게 웃고 있다. 

낙하한 동백꽃이 지상에서 다시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귤중옥(橘中屋)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에 뚝뚝 떨어진 동백꽃이 다시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의지와 노력에 따라 우리도 언제든 다시 꽃 피울 수 있음을 낙하한 동백꽃이 웅변하는 듯하다.

  

 

추사김선생적 여유허비(秋史金先生謫廬遺墟碑)

 

          

 

추사가 두 번째 유배생활을 했던 강도순 집

 

                     

  

돌담장과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담장아래로 수선화가 꽃을 피우고 있다

 

                     

  

돌담장 아래의  수선화  -금잔옥대金盞玉臺

 

                    

  

 

                                            

 

 

수선화

         이 청 리

 

산아래 길을 잃고 서 있는

수선화! 그대 처지와 내 처지가

엇비슷하네

수선화! 그대를 수선화라 부르지 않고

마늘꽃으로 부르며 잡초로 여기니

나 또한 잡초보다 못한 생으로 이곳에 와

살아가네

수선화! 그대가 피는 꽃이 청초하지만

나 또한 붓으로 피워보는 추사체 꽃은

향기가 없네

수선화! 그대의 이름을 찾은 날

나 또한 언제 이름을 찾을지 몰라도

수선화! 그대와 함께 있으니

내가 다시 태어나 사는 것 같아라

 

 

수선화水仙花

추사가 아끼고 사랑했던 수선화 수선화는 중국의 강남에서 자라는 것인데, 순조 12년(1812) 신위가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것이 우리나라에 수선화가 들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 수선화는 구하기도 어려워 중국에서 가져온 수선화의 구근을 서로 나누는 일이 문인들의 운치 있는 일로 여겼다. 추사는 그 귀한 수선화가 제주도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저장성 이남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는 촌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가 많게는 10여 송이에 꽃받침이 8-9개, 5-6개에 이릅니다. 꽃은 정월 그믐께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도착 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또 짓밟아버리며, 또한 그것이 보리밭에 많이 나기 때문에 시골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한결같이 호미로 파내어버리는데 , 파내도 다시 나곤 하기 때문에 이것을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물(物)이 제 자리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굴원(屈原)이 "내가 누구와 이 방초(芳草)를 완상 하리오"라고 말한 것이 불행하게도 내게 가깝습니다. 보고 만나는 것마다 이렇게 처량한 감회가 일어서 더욱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이런 수선화를 보고 추사는 시를 읊는다.

"푸른 바다 파란 하늘 아래서 반가이 너를 보니 신선 같은 인연이 가는 곳마다 반색을 하는구나. 호미 끝에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캐 버린 것을 깨끗한 책상 앞에 고이 옮겨 심었네"

 

다산 정약용에게 보낸 수선화 제목의 시다.

 

水仙花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

淸水眞看解脫仙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그윽하고 담담하고 시리도록 빼어났네. 매화가 고상하나 뜰을 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참으로 해탈한 신선일세.

 

  

이와는 별도로 수선화부水仙花賦 목판이 전해진다.

 

탁본   -수선화부(水仙花賦)  목판

 

중국 청나라 호경(胡敬)의 글로, 추사가 옮겨 적은 것이다. 앞부분에 추사의 수선화 그림이 있다.

수선화 그림의 화제는 다음과 같다.

 

趙彛翁以雙鉤作水仙, 今乃易之以禿潁亂抹橫蔬, 其揆一也. 居翁. 

 

중국 원나라의 조맹견(彛齋 趙孟堅)이 쌍구로써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모지랑 붓으로 바꿔 되는 대로 그렸으나

그 법도는 한 가지다. 감옹

 

  

제주도 자생 수선화

                      

제주도 수선화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꽃망울을 피우기 시작해 새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제주의 들꽃이다.

무리 지어 필 때면 추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여 있는 듯"하다.

제주에서 자생하는 수선화는 흰 꽃잎이 두 겹으로 9장이고, 가운데에 암술과 수술로 보이는 노랗고 짧은 꽃잎 여러 개를 두르고 사이사이에 하얀 꽃잎이 솟아 있다. 제주에서는 수선화를 '몰마농(말마늘)이라 부른다. 

중국이나 본토의 수선화는 5∼6장의 하얀 꽃잎과 가운데 노란빛의 동그란 부화관이 있다.

그 모양이 은잔대에 금잔을 받친 것 같다 하여 흔히 금잔은대金盞銀臺, 또는 금잔옥대金盞玉臺라고 일컬어왔다. 

 

 

 

                          

송영방, 추사선생영주적거도(秋史先生瀛洲謫居圖)

 

                          

 

다음 세상 열어주리라

                       이 청 리

 

바다도 저렇게

홀로 수평선을 긋고

나도 이렇게

세상과 유배의 선을 긋고

하루하루 살아갈 때

붓은 세상을 관통하고 있네

저 바다만큼 깊이를 지니고

하지만

저 바다가 깊이를 드러내지 않듯

나 또한 내 깊은 뜻을 드러낼 수 없어라

때가 되면 이 작은 붓끝이 세상을 넘어서

다음 세상을 열어주리라

  

추사는 1차 적거지인 송계순의 집에서 2년을 머물다가 헌종 8년(1842)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를 옮긴다.

추사는 자신의 적거지 집을 귤중옥(橘中屋)이라 액호를 삼으며,

 

"매화나무, 대나무, 연꽃, 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겉 빛은 깨끗하고 속은 희며 문채는 푸르고 누르며 우뚝 선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므로 나는 그대로써

내 집의 액호를 삼는다."라고 의미를 밝혔다.

 

귤은 "우뚝 선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을 지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추사가 '귤중옥'이라 한 것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귤송橘頌'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은 귤중옥을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고도 불렀다.

수성壽星은 노인성, 남극성으로 불리며 별 이름으로는 카노프스(Canopus)이다.

남극성인 관계로 제주의 남쪽 수평선 근처에서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별이다.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은 별이지만 고도가 너무 낮은 탓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별이다.

예로부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어 왕이 그 별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이 별이 보이는 해에는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믿었으며, 이 별을 보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사는 대정 마을을,

 "들 가운데 작은 고을 겨우 말(斗)만 하고, 푸른 돌담은 짧은 대울타리와 이어져 있구나 野中小治僅如斗, 靑石郭連短竹籬"라고 하며 작은 마을이라

하였고,  또 "이곳의 집들은 모두 수성壽星 아래 자리 잡았는데, 수선화는 천 떨기요 또 만 가지로다 人家盡依壽星下, 水仙千朶復萬枝 "하여,

수성아래 자리 잡은 무병장수하는 마을로 수선화가 만개하는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 이한우는 '추사선생의 수성초당에 부쳐'라는 시를 지었는데,

 

천리 밖 남쪽 물가 초가집 한 채

임금님은 노인성을 볼 수 있는 은혜를 내리셨네.

밤마다 외로운 마음 향 사르고 앉아

흐느껴 울 적마다 흰머리털 너네.

 

라고 하였다.

 

 

노인성 별자리 위치 - 오리온자리 밑으로 시리우스 밑에 노인성자리

우리나라에서는 노인성 관측의 최적지는 서귀포이다.  이곳에 서귀포천문과학문화관이 있다.

 

노인성은 겨울철 별자리에 속해서 11월에는 새벽녘에 보이다가 2월로 가면서 보이는 시간이 저녁 시간대로 바뀐다.

2월 초에는 21시 30분 관측 시간에, 20일경에는 20시 30분 관측부터, 3월 초는 19시 30분부터 한 시간가량만  노인성을

볼 수 있다.

또, 영주 12경에 "서진노성西鎭老星"이 있는데  천지연 하류 서귀포구의 높은 언덕에 있는 서귀진(현재는 없음) 성위에서 보면

노인성을 볼 수 있다고 하였음

                         

 

 

바깥채  : 추사가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친 곳이다

 

                   

  

모거리 : 추사가 기거하며 학문을 닦으며 추사체를 완성했던 곳이다

 

                     

  

안거리 :  집주인  강도순이 생활했던 곳이다

 

                     

 

동백꽃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지상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있다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에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다시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귤 창고와 같이 생긴 추사관은 세한도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디자인한 건물이다.

옆으로는 소나무 잣나무도 심어 놓았다.

추사관에는 세한도와 추사의 글씨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한도 앞에서 오래 머문다.

2층 여백에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아래로 향한 추사의 흉상(胸像)이 세워져 있고,  백자항아리에는 그가 사랑했던 수선화가 가득 꽂혀 있다.

 

추사체의 향기

               이 청 리

 

큰 아버지 양자로 들어가

조상의 대를 잇는 열두 살의

어린 나를 남겨두고

큰 아버지마저 떠나셨네

형조판서인 할아버지마저

떠나셨네

나의 생부께서 동부지사로

청나라로 가게 되자

스물네 살 되는 해에 자제군관으로

연경의 큰 세상을 접했네

하늘이 낸 큰 스승까지 만나

붓 하나 천하를 꿰뚫은

기운을 품고 돌았으나

내게 돌아온 것은

시련의 바람 잘 날이 없었네

부귀 공명도 다 잃고

아내마저 볼 수 없고

섬에 갇혀 있는 유배의 몸

이 슬픔을 두 쪽으로 쪼개듯

내 붓끝이 용트림으로 되살아나

먼 후세까지 기운을 뻗치더이다

 

 

추사관         -  세한도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추사관

 

                          

 

추사관 건물

 

                          

 

                      

추사 김정희 흉상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 국보 제180호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 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세한도歲寒圖 

 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박철상 저 '세한도' 감상하기 글 일부를 옮긴다>

 

  

 

세한도歲寒圖   

 

세한도가 국보로 지정된 것은 단순히 예술성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며, 세한도의 탄생은 30년 동안 추사가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자 19세기 한중 문예교류의 빛나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붓을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우선의 절개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창문 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하고 고목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이 매달린 소나무 하나, 그리고 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썰렁했다. 집안에는 누가 있을까. 추사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을 것이다. 저 앙상한 나무들마저 없다면 그 쓸쓸함을 저 집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싶다. 추사는 또 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 자신의 심정을 우선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고맙네, 우선(蕅船)!

 그림을 마친 추사는 줄 친 종이 위에 강하고 굳센 필치로 발문을 써 내려갔다. 이렇게 정간에 글씨를 쓰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 유행한 것으로 우리라 나라에서도 신라시대 비석에서 발견된다. 이를 보면 정간은 글씨에서 금석기가 느껴지도록 만든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오랜 유배 생활에 얼마나 힘들고 고생했으면 눈마저 어두워져 칸을 친 종이 위에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추사의 발문은 '세한도'를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더구나 글씨는 해서가 분명하지만, 우리가 늘 보던 깔끔한 형태의 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예서의 맛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해서이다.

이는 추사가 최고로 치던 해서의 경지이다. '세한도'의 구조는 참 간단하다. 창문 하나만 나 있는 허름한 집 한 채. 나무 네 그루. '세한도'란 그림 제목과 이상적에게 준다는 내용의 글씨 몇 자. 그리고 인장 몇 방. 이것이 전부다. 배경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간단하다. 묘사력이 뛰어난 그림도 아니고 화려한 채색이 돼 있는 것도 아니다. 나무를 감상하라는 것인지, 집을 구경하라는 것인지, 난감하다. 하지만 장경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보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 있지 않던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야 한다. 도대체 뭘 감상해야 할까?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추사는 왜 '세한도'를 한 장에 그리지 않고 이어 붙인 종이에 그렸을까? 추사는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재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붓과 먹, 종이와 벼루,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최고급 재료만을 고집했다. 그런 그가 궁상맞게 종이를 이어 붙여가며 그림을 그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추사의 치밀한 계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유배 중인 추사의 삶은 힘들고 궁핍했다.

추사는 '세한도'를 통해 그런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림을 보자. 먼저 나무들이 시선을 끈다.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세한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 넣은 것은 당연히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변치 않는 이상적의 의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공자가 이야기 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보면 오른쪽의 고목은 소나무가 분명하지만, 나머지는 사실 무슨 나무를 표현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왼쪽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표현 기법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종류의 나무가 분명하지만, 노송 왼쪽의 나무는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특히 나뭇잎의 표현 방법이 왼쪽의 나무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아 같은 종류의 나무로 보기는 어렵다.

소나무 하나를 제외하면 침엽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나무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셈이다. 이것은 추사 자신이 이 그림의 중심을 소나무에 두었다고 풀이할 수밖에 없다. 추사는 처음부터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몸통은 썩고 가지 끝에 솔잎 몇 개만 남아 있는 소나무의 몰골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끝에 붙어 있는 솔잎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것은 끝까지 절개를 지킨 이상적의 모습이자, 유배 생활에 지친 추사 자신의 몰골이기도 하다. 중의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세한도 속의 집을 구경해 보자. 기다란 집 한 채가 소나무 뒤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둥근 문이 하나 있다. 이것은 실제 집을 묘사한 게 아니다. 상상 속의 집이다. 소나무의 절개에 어울릴 만한 선비의 집인 셈이다. 하지만 봉창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방 안이 보일 뿐이다. 세한도'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림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사람 없이 집만 그린 것은 쓸쓸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그것은 추사의 의식세계이기도 하다. 적막하고 쓸쓸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느껴질 리 없다. 한없는 외로움의 상징이다. '세한도'에는 움직이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세한도'에선 바람 소리가 느껴진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반쯤 녹아 얼어붙고 하늘엔 먹구름이 황혼을 가릴 때 귓전을 때려대는 솔밭의 바람 소리, 문풍지 부르르 떨며 봉창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이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장이 뿜어내는 붉은 인주印朱의 빛깔이다. 거칠고 메마른 붓 터치 속에서 인장은 '세한도'의 눈이 된다. 인장은 '세한도'의 꽃이다. '세한도'에서 인장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모두 4방이 찍혀 있다.

<정희正喜> <완당阮堂> <추사秋史> <장무상망長毋相忘>이다.

 

   

세한도

 

  

추사는 그림을 다 그린 뒤 '세한도歲寒圖'란 제목을 예서로 곱게 써넣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갔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썼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가로로 써넣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높이 치던 소박한 서한시대의 예서가 아니다.

 

아주 세련되고 산뜻한 느낌이 든다.

 

거칠다는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가늘게 지나간 붓 자국은 그림의 붓 터치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그러고는 이어서 세로로'우선시상船是賞'이라고 썼다.

 

그다음엔 줄을 바꾸어 세로로 '완당阮堂'이라 쓰고 인장을 찍었다.

 

'세한도'에서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인장은'정희正喜'라는 이름을 새긴 인장이다.

 

'세한도'라는 글씨에서 시작된 그림은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소나무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솔잎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글씨와 그림이 자연스럽게 혼융되는 경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접점에서 '정희'라는 붉은색의 인장이 환하게 맞아준다.

 

나무는 솔잎에서 끝이 나지만 인장을 통해 그 기운이 다시 '세한도'라는 글씨에까지 이어지게 한 것이다.

 

마치 본래 소나무의 일부였다는 듯이 말이다.

  

 

 

 

세한도 그림이 끝나고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와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추사의 글이 붙게 되는데, 이 그림과 글씨를 연결하는 부분에도

인장이 하나 찍혀 있다.

 

바로 완당阮堂이라 새긴 인장이다.

 

서화의 경우 이렇게 두 부분을 연결하는 곳에 찍는 인장을 압봉인押縫印 또는 합봉인合縫印이라 부른다.

 

이 인장은 추사의 독특한 예서 맛이 난다.

 

아마도 추사 자신이 이 글씨를 쓴 다음 오규일과 같은 제자에게 인장을 새기게 했을 것이다.

 

자유스러움과 고졸함이 함께 묻어난다.

 

이 인장에는 '세한도' 그림과 서문의 글씨를 추사 자신이 직접 이어 붙였다는 의미가 담겨 잇다.

  

 

 

다시 서문을 지나면 끝에 마지막으로 인장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추사秋史'라는 자신의 호를 새긴 인장이다.

 

끝에 '완당노인서阮堂老人書'라는 낙관이 있는데 '완당'이란 인장을 쓰지 않고 '추사'라는 별호를 새긴 인장을 찍은 점이 흥미롭다.

 

'완당의 늙은이가 썼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별호인 '추사'인을 찍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임을 마지막으로 확인해 주는 인장이다.

 

적당한 크기의 인장이 작품의 완성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한도'의 그림과 글씨는 3개의 인장이 마치 연결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추사의 인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인장에는 한 장閑章이라는 게 있다. 자신의 취미나 기호, 또는 좋은 시구나 경구를 새긴 인장을 말한다. 추사도 아주 다양한 한 장을 사용했는데, 언제나 그 상황에 맞는 글귀를 선택하여 사용했다. 이번에 추사가 선택한 것은 '장무상망長毋相忘'인이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의 인장이다. 추사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을 오른쪽 아래에 이 '장무상인'인을 찍는다. 고맙네, 우선!  오래도록 자네의 의리를 잊지 않겠네. 그대 또한 언제나 나를 잊지 말게나.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세한도' 그림의 끝부분에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를 밝힌 추사가 직접 쓴 글이 있다.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는 내용 전문을 옮겨 본다.

 

지난해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가지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하장령의 '경세문 편'을 보내왔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게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에서 구입해 온 것들이다. 여러 해를 걸려 입수한 것으로 단번에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권만을 좇는데, 그 책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심력을 쏟았으면서도 권세가 잇거나 이권이 생기는 사람에게 보내지 않고, 바다 밖의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보내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들이 권세나 이권을 좇는 것처럼 하였다. 태사공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나 이권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세나 이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께서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 그런 것이다. 아! 서한시대처럼 풍속이 순박한 시절에 살았던 급암汲이나 정당시鄭當時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권세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비下사람 적공翟公이 문에 방문을 써서 붙인 일은 절박함의 극치라 할 것이다.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쓰다

  

세한도를 받아 든 이상적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렇게 분에 넘친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쫓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을 쓴 것과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 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표구와 같은 말)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제영題詠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의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 이상적은 연행에 세한도를 가져가 청나라 문사에게 보이고 그들의 제영(題詠)을 받는다. 처음, 이상적은 세한도에 13명의 문사들로부터 제영을 받은 후 장목의 제점을 받아 1차 장황을 하였다. 13명의 문사들은  장악진, 조진조, 반준기, 반희보, 반증 위, 풍계분, 조무견, 진경용, 주익지, 장수기, 장목, 장요손, 오찬이다.

훗날 오순조, 왕조, 요복증은 이상적에 제영을 보내주었다. 이밖에도 진상업은 이상적의 요청으로 제영을 보내왔지만 세한도 제영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장악진의 제영 일부를 옮겨 본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굳은 절개를 지니고 있지만 눈서리를 맞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홀히 여기므로 그 절개를 알아보기 어렵고 등용하는 경우도 적다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비록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겨울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고자 한다면, 겨울이 닥치기 이전의 절개를 먼저 배워야 한다.  그들은 절개를 늘 지니고 있으므로 사시사철 바꾸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

 

오찬吳贊의 제영

절개는 숲 속의 나무와 같아 오랜 시간 지나야 만 완성되지만, 소나무와 잣나무의 본성 속에는 바로 그 절개가 들어 있다네. 군자는 힘들수록 단단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고 무얼 탓하리?

꽃 피고 잎 진 것도 우연일진대

어찌하여 잡초들과 다툴까 보냐?

눈서리 매서운 겨울날이면

천지의 바른 기운 얻게 되리니

지지 않는 그 마음을 배우고 익혀

현인 되고 성인 되길 희망한다네.

....

  

조진조趙振祚의 제영

옛날에 굴원이 귤송橘頌을 지었는데, 끝에 "행실이 백이에 견줄 만하므로 본보기로 삼노라"라고 하였다.

잣나무를 보고 탄식한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귤을 찬양한 것은 그것이 천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소나무와 잣나무를 칭찬한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마음이 있는 것처럼 했기 때문이다.

아! 이 모두가 감동스러운 일이다. 이에 '구장'의 귤송을 모방하여 '송백송松柏頌'을 지어 완당의 뜻을 넓히고, 아울러 우선의 가르침을 구한다.

........

 

세한도는 이후 이상적의 제자이며 역관인 김병선에게 전해졌고, 부친이 가지고 있던 세한도를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는다. 그러다가 1914년 2월경  김준학은 자신의 글을 처음과 중간  끝에 배치하며, 동시에 문사 오순조, 왕조, 요복증의 제영을 추가하여 세한도를 새롭게 꾸며 세한도가 자신의 소유임을 명확히 하는 2차 장황을 한다. 현재의 세한도의 장황 형태가 김준학에 이르러 그 틀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준학이 세한도 앞부분에 써넣은 글을 옮겨 본다.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갑인년(1914) 봄 정월에 후학 김준학이 쓴다.

 

소나무 잣나무의 굳은 정조는

범속과 어울릴 수 없는 법이라

오랫동안 바위틈에 몸을 맡기니

아무도 부여잡고 오를 수 없네

그 옛날 완당의 어르신 한 분

기상은 절벽을 깎아지른 듯

문하의 제자들도 그를 닮아서

도의와 문장에 뛰어났다네

우 옹이 연경에 사신 갈 즈음

세한도 그림 그려 전해 주었고

우 옹은 그림 들고 만 리 달려가

명사들의 제영을 받아왔는데

묵묘(墨妙)는 무지개가 달에 걸린 듯

돌고 돌아 우리 집에 흘러왔다네.

세월은 어느덧 60년이 훌쩍

운수가 다하여 그분들도 안 계시네.

여기에 후조 바탕 묘사하여서

그 감회 조금이나 부쳐본다네.

 

....

 

내가 두루마리 맨 앞에 큰 글씨로 다섯 자를 썼는데, 이제 다시 그 끝에 내 시를 더 쓴다.

시운은 편수 풍계분의 것을 사용했다. 그는 초서를 잘 썼는데, 우 옹은 '회인시'에서 '비바람 몰아치듯 글씨를 써나가자, 종이 가득 草聖(왕희지)

이 전해온다네'라고 노래했다. 지금 내가 병든 팔로 서투르게 글씨를 쓰고 보니 귀한 두루마리를 더럽힌 것 같아 몹시 부끄럽다. 이어 김준학은 중간에도 '家藏歲寒圖詩'라는 시를 친필로 써넣었고, 끝 부분에는 '生朝書事用歲寒圖中詩韻'이란 제목으로 2수의 시를 써넣었다.

 그 후, 세한도의 주인은 또 한 번 바뀐다. 1930년대 경성대 교수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돌아간다. 이후 1930년대 말경에 그는 세한도의 그림 부분과 서문을 영인하기에 이른다. 1944년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후지스카는 일본 동경으로 가져간다. 이 소식을 들은 손재형은 동경으로 가 끈질긴 노력으로 '세한도'는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되고, 후지스카의 집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다. 하마터면 세한도가 잿더미로 사라질 뻔하였다.

1949년 손재형은 정인보, 이시영에서 발문을 받고,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갖은 오세창을 찾아가 그간의 일을 상세히 설명하니, 세한도를 펼쳐놓고 어루만지며 마치 죽은 친구를 일으켜 세워 악수하는  듯하다며  기쁨과 슬픔을 주체치 못하며 그의 노고를 칭찬하고, 몇 달 동안이나 세한도를 감상한 오세창은 그 사연을 발문으로 남겼다. 이후 세한도의 주인은 개성 갑부 손세기를 거쳐 그의 아들 손창근으로 이어졌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보관 관리하고 있다.

  

오세창의 발문을 옮겨 본다

완당 김 선생께서 억울하게 제주도 유배 가 있을 때, 그의 훌륭한 제자인 이우선 선생에게 '세한도'를 그려 보내 경계하고 면려하는 밑천을 삼게 하였다.학식이 뛰어난 두 분의 교유는 물처럼 담박했고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마침 우선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면서 이 그림을 가지고 가 여러 친구들에게 보이고 두루 제영을 요청하였다. 눈앞에 가득히 빛나는 것들은 대개 중국 명사들의 글과 글씨였다. 이에 조그만 종이 위의 마른 붓으로 그린 그림은 그 명성이 갑자기 높아졌고, 중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뒤에 그림은 우선의 제자 매은 김병선 선배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 군이 제영을 써서 소장하였다. 이때가 그림이 그려진 지 70여 년 만의 일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점거하자, 공공기관과 개인 소유의 진귀한 서적과 보물 들을 온갖 방법으로 빼앗았다. 이 때 이 그림은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로 있던 후지츠카 지카시를  따라가 버렸다. 세계대전의 전운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소전 손 군은 훌쩍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가 거금을 주고 우리의 진귀한 보물 몇 종을 되찾아왔는데, 이 그림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지는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겨우 돌아오게 되었다. 아!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의 보물을 더 아끼는 마음을 가진 지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잘했구나, 잘했어!  그런데 이 사실을 감추고 말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한 지가 이미 5-6년이 되었다. 올 9월에 손 군이 갑자기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 주었다. 서로 펼쳐놓고 읽으며 어루만졌는데, 마치 죽은 친구를 일으켜 세워 악수하는 듯하여 기쁨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에 몇 달을 감상하다가 이렇게 그 전말을 기록하고 시를 한 수 쓴다.

 

阮翁尺紙也延譽

京北京東轉轉餘

人事百年眞夢幻

悲歎得失問何如

 

완당노인 그림 한 장 그 명성 자자터니

북경으로 동경으로 이리저리 방랑했네.

일백 년 인생살이 참으로 꿈만 같네.

기쁨인가? 슬픔인가? 얻었는가? 잃었는가?

대한이 이틀 지나서 12월 5일

             위창 86세 노인 오세창은 발문을 쓴다.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단순히 그림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30년 동안 추사가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며 세한도가 탄생하고 유전된 과정은 그 자체가 19세기 조선 학예의 총화이기 때문이다.

 

세한도의 가치는 그림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를 밝힌 추사의 글, 이상적이 연경에 가지고 가  16인의 청나라  문사에게 받아 온 제영題詠, 세한도의 소유자가 바뀐 경위와  세 차례의 장황, 그리고 동경으로 건너간 것을 다시 찾아온 경위를 적은 오세창의 발문 등, 세한도가 유전되는 과정이 한 화폭에  담겨 있어 그 가치가 더 높다.

 

 

한라산 형상

             이 청 리

1840년

헌종 6년 그 해 9월 27일이던가

수륙 수 만리를 건너야 하는

물길이 아득했어라

가을빛이 스민 먼 바닷길은

칠성 너에 실려가는 서러움이었어라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구 년의 세월을

이 대정 거적지에서 보내온 날들이

까마득하구나

지방 유생들과 학동이

내 외로움 다 가져가고

저 한라산 형상을

내 가슴에 새겨 살게 했구나

세한도 한 폭을 내가 그린 것이 아닌

저 겨울 한라산의

형상 그대로를 옮겨 놓은 것뿐이었다.

내 붓을 잠시 빌어 주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