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추사 김정희 집터와 북한산 비봉을 찾아서

2012. 1. 13. 07:51문화유적 답사기/秋史를 찾아서

(2) 추사 김정희 집터와 북한산 비봉을 찾아서

  

추사 김정희 집터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자하문로를 따라 200m 정도 걸어가면 보도 옆에 '김정희선생 집터', '창의궁터'라고 쓰인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다.  그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서 우측 골목길로 50m  걸어가다 첫 번째 작은 골목길 입구에 널빤지로 만든 사각 나무통에 '추사 김정희 사시던

곳'이라고 흰 페인트로 쓰여 있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좁은 공간에 철책 울타리가 둘러쳐진 네 귀퉁이에는 후계목 백송이 자라고 있다.

가운데에는 고사된 '통의동 백송'의 나무 밑동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철책 울타리 안에는 장독대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곳은 조선조 영조대왕이 등극 하기전 기거했던 창의궁터이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둘때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고, 백송나무가 있던 이 동네에 월성위궁을 내려주었다.

추사가 후일 월성위의 봉사손으로 입양되어 그가 4세 되던 해 예산에서 올라와 이곳 월성위궁에서 살았다.

그 정원에 이 백송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울 통의동의 백송은 1962.6.3  천연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1990년 7월 17일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낙뢰로 줄기가 부러져 넘어졌다. 7월 19일 문화재관리국에서 대책 회의를 열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하려 했지만, 청와대에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를 쓰러진 상태로 보호하여 살리기로 하고 경찰관을 3교대 근무로 배치하여 보호했다. 1991년 봄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날 조짐을 보였지만,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선고를 받게 되자 1993년 5월 13일에 벌목되었고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나무의 키는 16미터였다. 수령이 600여 년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나무가 쓰러진 뒤인 1994년에 분석한 결과 1690년 경부터 자라 왔던 것으로 밝혀져 수령이 300년 정도로 추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성장이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는 말이 있다.

고사한 나무 밑동 주변에는 후계목이라 주장하는 백송 네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이 네 그루의 백송은 소유자가 각각 다르다.

종로구청, 서울시, 문화재청, 백송할머니 홍기옥 소유라는 표찰을 각각 달고 있다.

 

1990년 7월17일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낙뢰로 넘어진 통의동 백송 (사진출처 : 마운틴월드)

 

 

 

 

 

 

 

 

 

 

북한산 비봉(碑峰)을 찾아서

경복궁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북오도청에서 내린다. 비봉휴게소를 지나 금선사를 둘러보고 비봉을 향하여 산길을 오른다.

암릉 길을 지나며 줄곳 비봉을 바라보며 오르는 이 등산로가 비봉을 오르는 가장 멋진 길이다.

능선에 다다른다.

북한산 비봉

눈 쌓인 바위 봉우리에 비쭉 이 솟아 있는 비석을 바라보니 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흥이 일어난다.

비봉 허리를 돌아 오르기로 하고 막상 그 앞에 당도하여 보니 눈이 쌓여 있어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켜켜이 포개진 높은 바위봉만 바라본다.

 

승가사에 놀러 갔던 추사가 비봉에 올라 이끼 낀 비석을 손으로 문질러 석양에 비치는 비면의 글자를 확인하고 탁본하여 판독해 보니,

이 비가 바로 진흥왕 순수비임을 알게 된다.

일천이백년 고적이 밝혀지는 순간 감격하는 추사 김정희의 모습을 떠 올려 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 쌓인 바위봉 위에 올연히 서 있는 진흥왕 순수비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순수비를 보고 와서 추사는 시를 지었다.

 

그늘진 골짝에는 늘 비 오고

가파른 산봉우리는 한 송이 푸름

솔바람은 불어 탑을 훑고

북두칠성은 물을 길어 병으로 되돌아오네

돌은 본래 모습을 증거 하는데

새는 글자 없는 경전으로 재잘거리네

이끼 낀 비석받침은 부질없이 닳아가는데

규전은 다시 누가 새겨줄까

 

북한산 비봉

 

 

바위봉 위에 올연히 서 있는 진흥왕 순수비

 

비봉아래서 오르지 못하고 눈에 덮혀 있는 켜켜의 바위봉만 바라본다.

 

추사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금석학 고증학 등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뜬다.

옹방강의 서재 석묵서루에서 옹방강으로부터 그의 평생 업적인 금석학을 전수받고 귀국한 후 우리나라 옛 비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고증학자가 옛 비문을 연구하듯 추사는 우리나라 옛 금석문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북한산 비봉의 이 비석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던 것으로, 조선 왕조의 도읍지를 찾아다니던 "무학이 잘못 찾아 이곳에 오리라는 비석

"즉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왔다.  추사가 31세 때 김경연과 승가사에 놀러 갔다 비봉에 올라, 이끼 낀 표면을 손으로 문질러 석양이 비치는 비면을 살펴보니 글자의 획이 보여 탁본하여 판독하니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 해 조인영과 함께 다시 찾아가 68자를 살피어 확정하고 돌아갔고, 뒤에 다시 두 글자를 얻어 70자가 되었다. 

 

추사는 이러한 두 사실을 비석 측면에 새겨 놓았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 來讀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에 김정희 김경연 와서 읽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 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 함께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피어 확정하다.

 

그리고 여러 해의 연구 끝에 조선 금석 고증학계에 찬연한 업적을 남긴  '진흥이 비고(眞興二碑攷)'와 신라 진흥왕릉고(新羅 眞興王陵攷) 등 

논문을 발표했다.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 측면에 추사 김정희가 새긴 글자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 來讀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 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추사 김정희가 마모된 비문을 탁본하고 비석을 면밀히 살피어 70자를 확정했다

 

 

추사가 연구하여 발표한 글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중 승가사 진흥왕 순수비에 관련된 글  일부를 옮겨 본다.

" 이 비석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것으로, 요승 무학이 이곳을 잘못 찾아오리라는 비석이라고 잘못 일컬어지던 것이다. 가경 병자년(1816년) 가을에 나와 김 군 경연이 승가사에 놀러 갔다가 계제에 이 비석을 보니, 비석의 표면에 이끼가 두꺼워서 글자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손으로 문질러 보니, 글자의 모형이 있는 듯한데,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간 흔적에 그치지 않았다. 또한 그때가 해 질 녘이라 이끼 끼투 비면에 석양이 비치는데 살펴보니 이끼가 글자를 따라서 끊어진 파(오른쪽으로 삐친 획)와 이지러진 별(왼쩍으로 삐친 획)에 들어가 있어서 어렴풋이나마 그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시험 삼아 종이로 탁본을 떠내 보았다. 글자 모양은 황초령비와 매우 서로 비슷하였다.

첫째 줄 眞興의 眞자는 꽤 문드러졌으나 여러 번 탁본하여 보니 그것이 眞 자임은 의심할 수 없었다. 드디어 진흥왕의 옛 비석으로 확정하니 , 1천2백 년 고적이 하루아침에 크게 분명히 판정되어, 무학비라는 터무니없는 설을 깨뜨리었다. 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어찌 우리들의 한갓 金石 인연으로 해서만 그치겠는가. 그 이듬해 정축년 여름, 또 조 군 인영과 더불어 같이 올라와서 68 글자를 살피어 확정하고, 돌아갔고, 뒤에 다시 두 글자를 얻어서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석의 왼쪽 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신라 진흥 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에 김정희, 김경연 와서 읽다. 또 예자로써 새겨 놓음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피어 확정하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국보  제3호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