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팔뚝 아래 흘러나온 법고창신(法古創新) -예산 秋史古宅을 찾아서

2012. 1. 11. 20:52문화유적 답사기/秋史를 찾아서

(1) 팔뚝 아래 흘러나온 법고창신(法古創新) -예산 秋史古宅을 찾아서

 

어두컴컴한 새벽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을 찾아 나선다. 1호선 전철 종점역인 신창역에 하차하니 08:30분이다.

역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신례원행 시내버스를 갈아탄다. 신례원은 생각보다 훨씬 사람들이 북적이고 활기찬 마을이다.

행장을 수습하고 예산군 신안면 용궁리로 향하여 걷는다.

창소리를 지나니 예산군을 관통하며 흐르는 무한천이 나온다.

무한천 '신례원교'를 건너다 바라보니, 얼어붙은 무한천을 따라  원리들'과 '원창들' 질펀한 평야가  펼쳐지고 있다.

  

무한천과 원창들

 

충남농업기술원을 지나 계촌리 삼거리에서 좌측 길로 접어들어 10여 분 걸어가니 사과 밭이 전개된다.

겨울,

나목의 사과나무

억센 검은 가지가 옆으로 뻗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긴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봄이 되면 나뭇가지에 움이 트고 잎이 돋고, 4월이 되면 사과꽃 향이 피어나겠지.

 

추사 김정희(1786-1856)는,

팔봉산 아래 용궁에서 1786년 음력 6월 3일 아버지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기계 유 씨가 잉태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하였다고 한다.

이 아이가 태어날 무렵 뒤뜰의 우물물이 줄어들고 팔봉산의 풀과 나무가 시들었는데,

태어난 뒤에는 다시 우물물이 솟아나고 시들었던 풀과 나무가 생기를 되찾았다 한다.

사람들은 이 아이는 팔봉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 했고 장차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경학, 금석학, 문자학, 역사학, 지리학, 불교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고,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적 재질을 바탕으로 시. 서. 화에 두루 뛰어났으며,

추사체로 서예 사상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던 추사 김정희.

文字香과 書卷氣가 배어 있는 수많은 묵란도와 산수도를 남겨 書畵一致의 고아한 경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秋史의 墨香을 더듬으며 생각하며 걷다 보니 도로 옆으로 용궁 1리 이정표가 보인다.

멀리 야트막한 오석산 능선 아래로 화암사가 보인다.

먼저 추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화암사를 먼저 찾기로 하고 논밭 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걷는다.

 

사과밭

 

                                  

 

 

용궁 1리에서 화암사로 넘어가는 마을 길 허름한 농가의 처마에는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멀리 화암사가 보인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진다.

영조는 김한신을 사위를 맞아들이면서 현재의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던 동네에 '월성위궁'을 내려 주었다.

또한 영조는 예산 용궁리 일대를 사전으로 하사하고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각 고을마다 한 간식 건립 비용을 분담케 하여 53칸짜리 집을 짓게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추사고택이며 경주 김 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이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삼국시대의 고찰이라고 알려진 화암사는 사전으로 하사된 전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1752년(영조 28년)에 월성위 김한신이 중건하여 경주 김 씨의 원찰로 삼았다.

 

요사채만 중건 당시의 옛적 건물이고 대웅전을 비롯한 다른 건물들은 근래에 중건된 것이다.

요사채에는 김한신이 썼다는 화암사 현판이 걸려 있고, 원통보전, 무량수각, 추수로 등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앞에는 수령 230년의 허리가 부러진 고목 느티나무가 쓸쓸히 서 있다.

       

 

 

 

 

 

 

 

 

 

 

 

 

요사채 툇마루에 놓여있는 기왓장에는 다움과 같이 쓰여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백암록)

 

수령 230년의 느티나무 고목

 

                                      

화암사 종각, 대웅전,미륵불과 탑이 보인다.

 

                                            

 

 

화암사 뒤뜰을 돌아 오르니 대웅전 뒤로 병풍바위가 보인다.

 

병풍바위

 

                                                                                      

우뚝 솟은 소나무가 곁을 지키고 있는 왼쪽 병풍바위에는 '詩境' 각자가 선명히 보인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시를 써서 남겼다는 南宋의 육방옹 육유가 예서체로 쓴 '詩境' 글씨는 명작으로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남송 때의 방신유는 시경이라는 글씨를 좋아하여 부임하는 곳마다 좋은 바위를 찾아 새겼는데, 옹방강은 광동과 계림에 있는 이 글씨를 탁본해 두었다. 추사는 옹방강에게서 육방옹의 글씨 '詩境' 탁본을 선물로 받아 이 바위에 새겨 놓았다.

 

또한 오른쪽 병풍바위에도 '天竺古先生宅'이라고 새겼다. 

천축고선생댁이란 '천축나라(인도)의 옛 선생댁' 즉 '석가모니 집'이란 뜻이다. 

 

 

 

'詩境' 각자

 

                                                                                                   

 

 

천축고선생댁 각자

 

                                                                                          

뒷산에 올라 이곳저곳 바위를 살펴보았으나 추사가 새겼다는 '小蓬來'각자를 찾을 수가 없다.

화암사 스님으로부터 위치를 확인하고 오산사거리로 다시 나간다.

그곳에 화암사-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등산로 입구 임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오석산(烏石山)을 오르는 등로가 보인다.

조금 오르니 우뚝한 바위가 보인다.

바위면을 살펴보니 '小蓬來 秋史題' 글씨가 새겨져 있다.

추사는 이곳 오석산  큰 바위에 '小蓬來'라 새겼다.

오석산을 작은 금강산으로 빗댄 것이다.

 

 

 

 

 

" 소봉래  추사제" 각자

 

오석산 능선을 따라 걷는다.

낮으막한 오석산이지만 능선에는 작은 산 답지 않게 군데군데 큰 바위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라 걸으니 화암사 뒷 능선에 다다른다.

대숲이 우거져 있다.

화암사 너머 예산의 들과 올망졸망한 산 들이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예당평야가 펼쳐지고, 삽교천과 무한천이 이곳 평야에서 만나 아산만으로 흘러든다.

 

 

 

 

 

화암사 뒷산의 대숲

 

                                

화암사 뒷산에서 바라본 화암사 전경   멀리 예산이 훤히 조망된다.

 

                                   

 

 

화순옹주 정려문과 김한신 묘

 

부드러운 오석산 능선길을 벗어나니 포장된 길이 나온다.

길을 건너 다시 용산으로 오른다.

용산의 능선길 또한 부드러운 길이다.

능선 끝 부분에서 추사고택 가는 길로 내려서니 담장으로 둘러싸인 화순옹주 정려문이 보인다.

200여 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 중앙의 오른쪽 칸에 문을 내었고, 문의 정면에 홍살을 세우고 문 위에는 붉은 칠을 한 현판이 걸려 있다.

화순옹주는 조선 영조의 둘째 딸로서, 13세에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 한 김한신은 벼슬이 수록대부 오 위 도총관에 이르렀다.

부군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부왕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대에 정조가 내렸다.

 

그 옆으로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 합장묘가 있다.

묘에는 돌담장이 둘러있고,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의 묘석을 구비하였다.

비문에는 영조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

 

화순옹주정려문과 월성위 화순옹주 묘 전경이 바라다 보인다

 

                               

정려문 홍살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 묘

 

                                        

월성위와 화순옹주 비석

 

                                      

예산 용궁리 백송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 묘소 앞에는 백송이 자라고 있고, 그 옆 우뚝 히 솟은 적송의 기상이 예사롭지 않다. 

추사가 25세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백송씨를 묘소 앞에 심은 것으로 수령이 약 200년이 되었다. 원래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갈린 수형이었는데, 두 가지는 고사하였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백송

 

                                        

 

 

 

 

 

적송의 기상이 드높다

 

                                  

 

 

 

 

 

추사고택

 

소실되어 없어진 53칸 집을 반으로 줄여 1977년에 복원한 추사고택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넓은 마당에 'ㄱ'자형의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 댓돌 앞 모란이 심어진 화단 앞에는 돌기둥이 서 있다. 

'石年'이라 새겨진 해시계를 올려놓았던 돌기둥만은 옛 모습 그대로 무심히 서 있다.

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아들인 상우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刻字) 한 것이다.

 

안채의 문을 들어서니 'ㅁ'자형 집인데, 가운데에 여섯 칸 대청이 있고, 안방 건넌방 밖에는 툇마루가 둘러있다.

기둥마다 추사의 대련(對聯)이 걸려 있다.

 

大烹豆腐瓜薑菜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高會夫妻兒女孫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의 모임

 

추사가 71세 때 쓴 글씨다.

이때에 비로소 대팽(大烹)과 고회(高會) 삶의 기본을 살펴본다.

추사는 협서로 설명을 덧 붙였다. 

이것이 시골 사람의 으뜸 즐거움이요 높은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에 아주 큰 황금인장을 차고

밥상 앞이 운동장처럼 넓고

여인 수백 명이 시중든다 해도

능히 이 맛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안채 뒤에는 추사영실이 있다.

추사의 지기 권돈인은 추사의 제자 화원 이한철에게 초상을 그리게 하여 이곳 재각에 봉안하고, '화상찬'과 秋史影室'이라는 현판을 직접 쓰고 새겼다.

초의는 추사 사후 2년 후 홀로 찾아와 제문을 받친다.

 

무오년 2월 청명일에 방외의 친구 초의는 한잔의 술을 올리고서 김 공 완당 선생 영전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좋은 환경에 태어나서 어찌 굳이 좋은 때를 가리려 했나이까.

신령스러운 서기로서, 어두운 세상에 따랐으면 그게 곧 밝은 세상이었을 텐데, 이를 어기고 보니 기린과 봉황도 땔나무나 하고 풀이나 베는

나무꾼의 고초를 겼은 것입니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사십이 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도에 대한 담론을 할 제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제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았지요.

손수 달인 뇌협과 설유의 차를 함께 나누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시곤 했지요.

생전에 말하던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 잃은 나의 슬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나이다.

슬프다! 노란 국화꽃이 찬 눈에 쓰러졌는데 어쩌다 나는 이다지 늦게 선생의 영전에 당도했는가. 선생의 이른 별세를 원망하나니,

땅에 떨어진 꽃은 바람에 날리고 나무는 달그림자 끝에 외롭습니다.

선생이시여! 이제는 영원히 회포를 끊고 몸을 바꿔 시비의 문을 벗어나서 환희지에서 자유로이 거니시겠지요.

연꽃을 손에 쥐고 안양을 왕래하시며 거침없이 흰구름 타고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벼운 몸으로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흠향하소서 (초의선집)

 

추사영실 뒤편 담장을 따라 대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담장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어 솟을대문을 나선다.

 

솟을대문

 

                                               

사랑채

 

                                               

석년      해시계를 올려 놓던 돌기둥

 

                                              

 

 

 

 

 

 

 

 

 

안채

 

                                    

 

 

 

   

 

 

추사영실

 

                                                       

 

 

 

 

추사 김정희 묘

 

추사 김정희 묘 앞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다.

원래 이 소나무는 열두 가지가 사방으로 뻗은 다복솔이었는데, 눈이 많이 오던 해에 설해를 당하여 열 줄기가 부러져 나가고 현재는 두 줄기만이

살아남아 있다

세한도에 있는 두 줄기의 세한송이 되었다.

묘소 뒤로는 울울한 대숲의 대나무는 푸르른 잎을 달고 올곧게 뻗어 올라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철종 7년, 10월 10일 갑오. 전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두루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작은 아우 김명희와 더불어 훈지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히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

 

석정

 

                                             

세한송

 

                                         

추사묘

 

                                       

추사 비석

 

                                           

 

 

추사기념관에 들려 그의 작품, 그의 다양한 면모, 그리고 그의 서예정신과 그의 업적을 조명해 본다.

추사는 1786년 6월 3일 예산에서 출생하여 4세 때, 큰 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입양되어 월성위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이 되어 

한양 월성위궁에 올라와 살게 된다.추사가 6세 되던 봄 '立春帖'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대학자 박제가가 월성위궁을 지나다 '立春大吉 天下太平春'이라는 글씨를 보고 들어와 어른을 찾아보고는,

" 이 글씨를 쓴 아이는 장차 학문과 예술로써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인데 내가 장차 잘 가르쳐 성공시켜 보겠습니다."하고 약속하였다 한다.

그리고 다음 해 7세 때에도 정희가 입춘첩을 써 대문에 붙였는데, 70세가 넘은 영의정 채제공이 글씨를 보고 주인을 찾는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터이나 만일 글씨를 잘 쓰면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요.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면 꼭 크게 귀히 될 것이요."라고 하였다 한다.

추사가 24세 되던 해 생원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써 첫 발을 디딘다. 25세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생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따라가게 된다.

추사는 단계 옹방강을 그의 서재인 석묵서루(石墨書樓)에서 만난다. 옹방강은 자신의 평생 업적인 금석학을 청년 김정희에게 전수해 주고, 경학까지도 가르쳤다. 추사는  석묵서루를 출입하며 옹방강과는 부자의 의를 맺고, 그의 아들들과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 연경에서 사귀고 인연을 맺은 또 사람으로는 운대 완원, 난설 오슬량, 야운 주학년, 동경 엽지선 등이 있다. 완원은 추사가 옹방강 다음으로 경학과 금석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추사가 박제가로부터 듣고 그를 찾아갔을 때, 47세의 완원은 그의 손을 이끌고 서재인 태화쌍비지관으로 맞아들이고, 아주 귀한 승설차(勝雪茶)를 대접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추사는 조선 금석학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삼국 이래의 금석 자료의 수집과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1816년 31세 때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 올라가 '무학오심도차비'로 알려져 왔던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 냈다. 그리고 다음 해 친구인 조인영과 함께 두 차례에 걸친 조사를 하며 이 비석에 대한 금석학적인 연구를 했다.

그리고 16년 후, 황초령비와 함께 '진흥이 비고'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두 비석이 신라 진흥왕은 국경 순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 내었다. 추사는 무장사비 탁본을 옹방강에게 보냈는데, 옹방강은 감정하기를 이는 김육진이 쓴 것이 아니라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무장사비에 주목하여 경주의 암곡동 무장사를 답사했다. 무장사터에는 삼층석탑 하나와 비석을 잃어버린 목 부러진 비석받침만 있었다. 추사는 암곡동 풀숲을 뒤져  깨어진 두 개의 비 편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추사와 초의 선사의 만남은 두륜산 북암에서 우연하게 만나게 된다, 북암을 찾아 하룻밤 묵게 되는 추사는 초의가 다려주는 작설차의 빛깔과 은은한 향에 도취된다. 연경에서 승설차와 용단을 맛보았던 추사였기에 차를 매개로 두 사람은 백 년의 우의를 나눌 것을 약속하게 된다. 그로부터 추사와 초의는 서로 위하고 아낀다. 초의를 통해 백파 선사를 만났고, 소치 허유를 만나게 된다.

 

당파 싸움에 휩쓸려, 그의 아버지 김노경의 무죄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죄를 얻고, 1840년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제주도 대정에 9년간 위리안치형을 받게 된다. 사실 추사의 인생과 예술은 이 제주도 귀양살이를 계기로 확연히 구분된다. 인격적으로도 자만심과 거드름이 사라져 원만하여졌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추사체라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볼 수 없는 독특한 서체를 낳게 한다. 인생에 실패하고 병과 외로움으로 살아갔지만, 학문과 예술에는 깊은 성취를 이루었다.

1844년 59세 때 제주도에서 그린 세한도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넘치고, 공자의 말씀인 "추운 겨울을 당한 후에야 송백이 다른 나무보다 뒤에

시드는 것을 알게 되니라."를 따서 자기의 불우한 처지를 위로하는 뜻을 표한한 것이다.

1848년 12월 6일 유배에서 풀려났고,

1849년 1월 서울로 돌아와 강상생활을 하다 2년 후 1851년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1852년 북청에서 해배되어 병들고 쇠약해진 67세의 노구로 아버지 김노경의 묘가 있는 과천으로 내려간다.

추사의 하루 생활은 글씨 쓰는 일, 불경을 읽고 참선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봉은사를 찾아가 며칠씩 기거하였으며, 세상을 뜰 무렵에는 자화(刺火) 참회(懺悔)하며 아주 절에서 기거하였다.

깨끗한 생활을 하던 추사는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판전(板殿)"의 편액을 썼다.

추사의 절필(絶筆)이다.

'板殿' 편액에는 '七十一果病中作' 款書와 '阮堂'이라는 도장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추사는 1856년 10월 9일 과천으로 돌아와 10월 10일  71년의 한 생애를 끝냈다.

그의 무덤은 아버지 곁에 두었으나 훗날 예산에 있는 첫 번째 부인 한산이 씨 묘에 이장하여 합장되었다.

 

추사의 絶筆 봉은사 '板殿' 편액

 

                                                                              

추사의 묵향(墨香)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 '낡은 책 무뚝뚝한 돌이 있는 집'

추사는 漢碑가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비바람에 마모된 형상까지 글씨에 도입하였다.

'殘書頑石'은 천년을 이겨낸 고집스러운 돌이 물고 있는 남은 글씨이다.

추사는 그대로 자신의 서체에 옮겨 앉히고, 거기에다 옛 서체를 토대로 획을 추가하고 획을 빼고 변형하고 단순화해했다.

                           法古創新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추사가 만년에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70 평생에 벼루 10개를 구멍 냈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추사체의 성립은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추사의 글씨 속에는 여러 가지 서체의 특징과 장점이 자재롭게 구사되어 있으나 조금도 위화감이 없이 혼연일체의 빛을 내고 있다.

그는 서화 모두에서 文字香과 書卷氣를 갖추어야 한다 했다.

더구나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券氣)가 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끝에 발현되지 않는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며 예서를 쓰는 신결(神訣)이다 하였다.

그 문자향과 서권기를 가슴에 새기려면 인품과 학식을 높일 수 있도록 많이 읽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한 예자원(漢隸字源)'에 수록된 碑文 309개를 온몸으로 익혀 글씨를 쓸 때는 이를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사체는 法古의 치열함 속에서 출발하고 천 년 전의 시간 속으로 드나들며 그 정신을 꺼내오는 작업이 추사가 고심참담했던 문제의식이었다. 

추사는 팔뚝 아래에 309碑를 갖추었기 때문에 단계적인 수련을 거쳐,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뛰어난

예술의 경지를 이룩할 수가 있었다.

 

불이선란(不二禪蘭)

 

 

                             <작품설명>

추사 김정희의 난초그림이 파격을 넘어 불이선의 경지에 다다른 불계공졸(不計工拙)의 명화이다.

오른쪽 아래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뻗어 오른, 꺾이고 굽고 휘고 구부러진 담묵(淡墨)의 난엽 열두어 줄기에, 화심(花心)만

농묵으로 강조한 아주 간결한 구도이다.

이 작품은 그림의 첫 화제가 "부작란화..."로 시작되어 '부작난'이라고 불렸지만 이 말이 어법에 맞이 않아 근래에는 화제의

내용에 따라 '불이선란'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제시(題詩)설명>

不作蘭畵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난초를 안 그린 지 스무 해인데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이 드러났네

                         문 닫고서 찾고 찾고 또 찾은 곳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이라네

               

若有人强要 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만약 누군가가 강요한다면, 또 구실을 만들고 비야리성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겠다. 마냥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구竟又題

                             초서와 예서의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제하다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선객노인

 

吳小山見而豪奪可笑

오소산(오규일)이 이를 보고 얼른 빼앗아가니 가히 우습다.

 

<참고사항>

불이선이란 '유마경', '불이 법문품'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든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저마다 설명하는데 마지막의 유마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 찍힌 인장 중 秋史. 古硯齋. 金正喜印. 墨莊. 樂文儒士 등은 완당의 도인으로 온당이 직접 찍은 것이다.

그러나 오른쪽 아래에 찍혀 있는 9개와 왼쪽 위편의 호리병 도장의 神品은 소장가의 소장인 또는 감식가들의 감상인(鑑賞印)이다.

이중 不二禪室. 勿落俗眼. 神品 등 3개의 도장은 장택상의 감상인이다.

 

추사는 말년 과천과 봉은사를 오가며 지냈다.

영기스님은 봉은사에서 '화엄경'과 '행원품별행' 등 불경을 판각하고 있었다.

영기스님이 보내 준 유마경 판각을 찍어 한 부는 자신이 보고 한 부는 친구 권돈인에게 보내준다.

'유마경'을 읽으며 추사는 禪의 喜悅을 느낀다.

어느 날,

솟아 나는 禪悅을 주체하지 못하고 붓을 들어 초서와 예서 쓰는 법으로 그린 것이 '불이선란'이다.

 

추사기념관에서 추사의 묵란 '불이선란(不二禪蘭)'  한 점을 구입한다.

집에 돌아와  '불이선란'을 액자에 넣어 서재 벽에 걸어 두고 틈틈이 바라본다.

추사의 영원한 묵향...

문자향과 서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