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頂스님 入寂
2010. 3. 12. 10:18ㆍ좋은 글/좋은 글
法頂 (1932-2010.03.11)
[법정스님 입적] "풀어놓은 '말빚'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조선일보)
"어린 왕자! 너는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더구나. 이 육신(肉身)을 묵은 허물로 비유하면서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더구나.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일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구나."
11일 입적(入寂)한 법정(法頂) 스님은 스스로 "수십 번 읽었다"고 밝힌 '어린 왕자'에서 불교적 사생관(死生觀)을 발견하고 저서 '무소유'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 스님 스스로가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지듯 자연으로 돌아갔다.
법정 스님이 출가하게 된 것도 생사(生死)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였다. 6·25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 대학생이던 시절 당대의 선승(禪僧)인 효봉 스님을 찾아가 출가한 것이다. 1954년 출가한 후 해인사 등에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학승(學僧)으로 이름을 떨치던 스님이 본격적으로 대중과 소통하게 된 것은 역경(譯經) 때문이었다. 스님은 "해인사 시절 한 할머니가 대장경판에 대해 '아, 그 빨래판 같은 거요?'라고 하는 것을 보고 불교경전을 쉬운 말로 번역하고, 살아 있는 언어로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을 맡아 본격적인 역경 사업을 위해 서울 봉은사로 올라온 법정 스님은 대중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불교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그의 에세이가 신문과 잡지에 실리자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1975년 출가본사(本寺)인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들어간 그는 1990년엔 당시만 해도 쉽지 않던 인도의 불교성지를 석달간 순례하고 조선일보에 기행문 '삶과 죽음의 언저리'를 40회에 걸쳐 연재했고, '법정 칼럼'을 통해 불일암의 향기를 전국으로 전했다. 그렇지만 불일암까지 찾는 발길이 이어지자 1992년엔 강원도 산골의 화전민이 살던 오두막을 개조해 혼자 살면서 수행하고 글 쓰며 지냈다.
1970년대부터 이웃 종교와 교유해온 법정 스님은 길상사 개원법회 때 김수환 추기경과 장익 주교(전 춘천교구장), 원불교 박청수 교무 등을 초청했으며, 이듬해 2월 명동성당을 찾아 강연했다. 매년 성탄절 무렵이면 길상사 앞길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법정 스님은 지난해 2월 김 추기경이 선종(善終)했을 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제목의 조선일보 특별기고를 통해 "어제서야 슬픈 소식을 듣고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망연자실해졌다"며 "위대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2007년 겨울 폐암으로 미국에서 항암 치료를 받은 후 법정 스님은 법문과 저서를 통해 '고마움'과 '나눔'을 자주 이야기했다. 수행자답게 생사의 문제에 담담했던 스님은 2009년 다시 병이 재발하자 주위에서 수술을 권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2일 병실을 찾은 청학 스님(광주 무각사 주지)이 "생과 사의 경계가 없다고 하는데 지금, 스님은 어떠십니까?"라고 묻자 종이에 "원래부터 (생과 사가) 없어"라고 쓰며 생사를 초월한 모습을 보여줬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언어는 공허하다"며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법정 스님은 법문 마지막을 "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니 나머지는 저 찬란한 꽃들에게 들으라"고 맺곤 했다. 또 입적 직전에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이제 침묵과 자연 속에서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길 때이다.
- 김한수 기자
스님의 무소유, 남은 이들이 소유해도 되겠습니까 [중앙일보]
미리 쓴 유서’처럼 법정 스님의 삶도 간결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스님은 목포상고와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했다. 스무 살 즈음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그는 인간과 존재라는 물음과 직면했다. 학창 시절, 밤을 새우며 그걸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스물네 살 때,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왔다. 그저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심정이었다.
법정(法頂) 스님은 유서를 두 번 남겼다. 첫 유서도, 마지막 유서도 가슴을 때린다. 첫 유서는 1971년에 썼다. 39년 전이니 법정 스님이 39세 때였다. 유서의 제목은 ‘미리 쓰는 유서’. 거기서 법정 스님은 자신의 장례식 풍경을 이렇게 그렸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다.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서울로 간 그는 안국동 선학원에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효봉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 출가의 결심을 밝혔다. 그 길로 출가자의 삶,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부도만 남아 있던 전남 송광사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살면서 독서와 수행에 매진했다. 거기서 쓴 에세이집 『무소유』(76년 출간)는 밀리언셀러가 됐다. 요즘도 ‘불교=무소유’의 등식을 떠올리는 건 순전히 법정 스님의 공이다. 법정 스님은 이웃 종교에도 열려 있었다. 친분이 무척 두터웠던 김수환 추기경은 『무소유』를 읽고서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김 추기경의 선종 1년여 만에 법정 스님도 입적했다.
무소유』를 통해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 됐다. 당시만 해도 출가한 스님이 세상을 향해 수필집을 낸다는 건 과감한 도전이었다. ‘다분히 세속적인 활동’으로 치부하는 절집의 눈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 그런 맥락에서 법정 스님은 ‘선구자’였다. 스님의 에세이집과 법문집은 출간될 때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수행자의 구도심, 불교적 메시지, 수필가의 감수성, 현대적 언어가 맞물리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불교 서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스님은 서울 성북동의 음식점 대연각을 고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씨로부터 시주 받아 97년에 길상사를 열었다. 그래도 강원도 모처의 오두막으로 훌쩍 떠났다. 길상사에선 회주 자격으로 봄·가을 정기법회 때만 법문을 했다. 법정 스님의 법문은 늘 사회적 이슈와 마음의 향기를 동시에 겨누는 ‘쌍권총’이었다. 글쟁이답게 A4지에 빼곡하게 미리 준비한 법문 원고를 읽을 때면 길상사의 법당과 뜰도 늘 1000여 명의 대중으로 빼곡했다. 법문에서 스님은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라” “더울 때 내가 더위가 되는 게 순리다”라는 그윽한 얘기부터 “주지 자리를 놓고 다투는 작태는 출가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가사 입은 도둑들이나 벌이는 짓”이라고 불교계 내부의 폐단을 통렬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지난해 봄 이후 병이 깊어져 길상사 정기 법회에 나오지 못했다. 폐암으로 몇 차례 수술도 받고, 제주도에서 요양도 했다. 두 달 전에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5일 오후 병실에 누워 있는 법정 스님을 직접 만났다. 법정 스님은 주위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앙상하게 마른 몸에 산소마스크를 댄 호흡은 꽤 힘겨워 보였다. 병실 탁자에는 가수 노영심씨가 노란 종이에 적어 놓은 짧은 메모가 있었다. ‘문병객은 차분하게 오가고, 법정 스님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성 글이었다.
최근 법정 스님은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건 39년 전의 ‘미리 쓰는 유서’를 잊지 않은 유서였다. 법정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내 장례식을 하지 마라. 관(棺)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스님의 유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가 살던 강원도 오두막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있다. 그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해라. 그리고 재는 평소 가꾸던 오두막 뜰의 꽃밭에다 뿌려라.”
스승의 무심한 유언에 제자와 신도들의 마음은 섭섭할 수도 있는 법이다. 행여 스승의 유언을 어기고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가서 대대적인 장례의식이라도 거행할까 봐 법정 스님은 변호사까지 불러 재차 당부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강원도 오두막에서 병마와 싸우던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한밤중 소나기가 잠든 숲을 깨우며 지나가는 소리에 나도 잠결에서 깬다. 숲을 적시는 밤비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한밤중 적막의 극치다!” 많은 이에게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법문’은 ‘잠든 숲을 적시는 밤비 소리’였다. 이제 그 ‘밤비 소리’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산 넘고 물 건너 강원도 오두막의 꽃밭으로 돌아간다. 덜렁 세상에 남은 것은 ‘밤비 소리’를 그리워하는 우리들 가슴의 메마른 숲뿐이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법정 스님이 걸어온 길
▶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목포상고·전남대 상과대학
▶ 54년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
▶ 군사 정권 시절 함석헌·장준하 등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
▶ 한글대장경 역경위원, 불교신문 주필, 송광사 수련원장 역임
▶ 70년대 후반 송광사 불일암에 주석
▶ 76년 수필집 『무소유』 출간
▶ 92년 강원도 오두막으로 떠남
▶ 97~2009년 서울 길상사를 열며 회주로 봄·가을 정기 법회
▶ 2009년 폐암 재발 후 요양
▶ 2010년 3월 11일 입적 </vangogh@joongang.co.kr>
백성호 기자
법정 스님 말말말 [중앙일보]
“봄 법회에 설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우리 생애에서 이런 기회가 영원히 주어지는 게 아니다. 언젠가는 나도 이 자리를 비우게 되리란 걸 안다. 자신과 진리에 의지해 꽃을 피우라.”
-2009년 4월 길상사에서 한 마지막 법회에서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봉선사로 갔다. 그 길로 허둥지둥 돌아왔다. 뜨거운 햇볕에 잎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
-1976년 수필집 『무소유』 중에서
“사람의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자연은 곡선이다. 강물과 산맥, 해와 달을 보라. 다 곡선이다. 직선은 조급하고, 냉혹하고, 비정하다. 그러나 곡선은 여유와 인정과 운치가 있다. 곡선의 묘미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2005년 10월 길상사 가을법회에서
“차지하는 것과 쓸 줄 알고 볼 줄 아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쓸 줄도 모르고 볼 줄도 모른다면 그는 살 줄도 모른다. 하나라도 더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는 탐욕의 노예인지도 모르겠다.”
-2009년 저서 『인연 이야기』 중에서
[법정 스님 입적]“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동아일보)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은 2008년 펴낸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렇게 썼다.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라면서 좋게 마무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님은 같은 책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며 삶의 신비이다. 만약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님의 글은 이처럼 삶을 관조하는 지혜로 가득하다. 그런 스님의 글은 30여 권의 책으로 출간됐고 나이와 신분, 종교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입적 소식에 스님의 책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교보문고가 11일 서울 광화문점에 특별코너를 설치하는 등 서점가에선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님을 기리는 추모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스님은 1975년 서울 봉은사에서 전남 순천시 조계산 자락 한 칸짜리 불일암으로 거처를 옮긴 뒤 17년을 이곳에서 지내며 ‘무소유’ ‘산방한담’ ‘텅빈 충만’ 등 산문집과 법문집을 냈다.
1976년 4월 출간된 ‘무소유’는 출판사 집계로 지금까지 370만 부나 팔린 스님의 대표작이다.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서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던 스님의 삶이 이 책에 그대로 담겼다. 소비와 소유에 집착하던 현대인들은 이 책을 통해 청빈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99년 나온 개정판에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는 추천사를 썼다.
스님이 1993∼1998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을 묶은 ‘산에는 꽃이 피네’에도 행복과 무소유, 더불어 살기에 대한 가르침이 가득 담겨 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스님은 많은 시간을 산골 오두막에서 자연과 함께 살았다. 밥을 해 먹고, 장작을 패서 땔감을 만들어 불을 지피고, 거기에 물을 끓여 차를 달였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세상을 향해 편지를 썼다. 그런 편지들을 모아 ‘오두막 편지’와 같은 산문집을 펴냈다.
스님의 책에는 “현재의 생에 충실하라”는 메시지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에선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삶에서 가장 기특하고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량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도량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일터가 진정한 도량이 되어야 한다.”
스님은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고 설파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은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서는 것이라는 얘기다.
스님은 그렇게 현재에 충실히 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젠가 우리에게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가 온다. 그때 가서 아까워 망설인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러니 시시로 큰마음 먹고 놓아 버리는 연습을 미리부터 익혀 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스님의 글은 이처럼 삶을 관조하는 지혜로 가득하다. 그런 스님의 글은 30여 권의 책으로 출간됐고 나이와 신분, 종교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입적 소식에 스님의 책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교보문고가 11일 서울 광화문점에 특별코너를 설치하는 등 서점가에선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님을 기리는 추모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스님은 1975년 서울 봉은사에서 전남 순천시 조계산 자락 한 칸짜리 불일암으로 거처를 옮긴 뒤 17년을 이곳에서 지내며 ‘무소유’ ‘산방한담’ ‘텅빈 충만’ 등 산문집과 법문집을 냈다.
1976년 4월 출간된 ‘무소유’는 출판사 집계로 지금까지 370만 부나 팔린 스님의 대표작이다.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서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던 스님의 삶이 이 책에 그대로 담겼다. 소비와 소유에 집착하던 현대인들은 이 책을 통해 청빈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99년 나온 개정판에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는 추천사를 썼다.
스님이 1993∼1998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을 묶은 ‘산에는 꽃이 피네’에도 행복과 무소유, 더불어 살기에 대한 가르침이 가득 담겨 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스님은 많은 시간을 산골 오두막에서 자연과 함께 살았다. 밥을 해 먹고, 장작을 패서 땔감을 만들어 불을 지피고, 거기에 물을 끓여 차를 달였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세상을 향해 편지를 썼다. 그런 편지들을 모아 ‘오두막 편지’와 같은 산문집을 펴냈다.
스님의 책에는 “현재의 생에 충실하라”는 메시지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에선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삶에서 가장 기특하고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량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도량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일터가 진정한 도량이 되어야 한다.”
스님은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고 설파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은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서는 것이라는 얘기다.
스님은 그렇게 현재에 충실히 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젠가 우리에게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가 온다. 그때 가서 아까워 망설인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러니 시시로 큰마음 먹고 놓아 버리는 연습을 미리부터 익혀 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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