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 11:24ㆍ좋은 글/좋은 글
청산은 비에 젖지 않는다
成田 스님
비가 오는 날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에 갔다.
무겁게 비는 내리고 있었으나 산은 오히려 청정히 깨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무도 꽃들도 비에 젖지 않았다.
비에 젖는 것은 나뿐이었다.
계곡에 흐르는 물까지도 비에 젖은 표정이 아니었다.
계곡을 타고 더욱 더 즐겁게 내닫는 물길.
물길은 낮은 곳을 향하여 즐겁게 흘러만 갔다.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는 즐거움을 물줄기는 보여 주었다.
만약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싶다면 모든 사람의 발밑으로 다니라는 말이 떠올랐다.
바다가 내게 다가왔던 의미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낮은 곳으로 흘러온 물줄기들이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바다가 아니던가.
그 바다 앞에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경험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 밑으로 흐르는 바다의 겸허함 때문이었다.
그 한없이 큰 겸허 앞에서 나의 오만은 한없이 작아져야만 했다.
바다는 내게 존재의 길을 일깨워 준 것이다.
오대산 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무도 꽃도 젖지 않는 빗줄기에 나만 젖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젖어야할 것이 있기 때문에 젖는 것이다.
나는 내 살아온 과거와 빗속에 서있는 지금을 돌아보았다.
마치 생각의 잡화상만 같았다.
너무 많은 생각과 삶의 흔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있었다.
수없이 버렸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때로 성내고 때로 괴로워하고 때로 아쉬워하던 순간들이 여전히 남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수행의 시간들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무나 꽃을 닮기에는 한참이나 먼 내 삶의 자리가 부끄러웠다.
얼마나 버리고 버려야 나무나 꽃처럼 비에 젖지 않는 저 투명한 존재의 시간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일까.
무겁고 어두운 이 존재의 시간을 나는 벗어나고만 싶었다.
상원사에는 수좌 스님들이 결제 중이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잠깐 짬을 낸 결제 중인 사형스님과 함께 차를 마셨다.
빗소리는 추녀를 타고 찻잔에 떨어지고 비를 따라 내려온 하늘의 구름이 절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차를 마시기에는 좋은 풍경이었다.
빗소리와 함께 찻물 떨어지는 소리가 묘한 화음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미완의 소리였다.
마치 성불하고자 앉았으나 아직 중생인 사형의 삶의 소리와도 같았다.
매력적이었다.
그 속에는 애씀과 꿈과 각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형에게 이 산을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청산에 기대어 살다가 그냥 청산이 되라고 했다.
그는 웃었다.
걸망을 메고 살아온 세월이 이십 년.
그는 아직 청산에 기대어 사는 중생일 뿐이다.
때로 청산을 벗어났다가 때로 청산에 깃드는 그는 그러나 아직 시들지 않는 꿈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어쩌면 청산에 들어 세상을 잊고 살아갈 런지도 모른다.
그날이 언제일까.
그 날이 오면 그도 저 나무처럼 더 이상 비를 맞아도 비에 젖지 않게 될 것이다.
사형은 선방으로 다시 들어가고 내려오는 길에서 나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해. 왜 비만 오면 저렇게 흠뻑 젖는 것이지.”
젖지 않는 나무와 비에 젖는 나 사이의 거리가 아득히 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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