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雲 崔致遠의 둔세지(遯世地) 홍류동

2015. 4. 6. 21:30나를 찾아 걷는 길/가야산(伽倻山)을 찾아서

孤雲 崔致遠의 둔세지(遯世地) 紅流洞

2015 3. 17

 

해인사 소리(蘇利) 길)길

 

팔만대장경이 재난을 피해 옮겨온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가는 길

고운 최치원선생이 은둔하러 들어왔던 가야산 골짜기 홍류동천(紅流洞天)이 "소리길"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되었다.

소리(蘇利)란 우주 만물이 소통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생명의 소리를 의미한다.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에서 시작하여 해인사 통제소까지 6km 여  2시간 코스로 이어지는 길이다.

 

해인사 소리길 표지석 앞에 서서 매화산과 남산제일봉의 불꽃 바위능선을 본다.

가야산 속의 무릉도원을 상상하면서 멀리 가야산을 바라본다는 갱멱원 (更覓源)을 시작으로 홍류동계곡- 해인사 -가야산 상왕봉에 이르기까지

19명 소가 있다.

 

호젓이 더딘 걸음으로 숲언덕을 찾아드니

돌무더기 어지로 운 구비마다 물결이 부딪히네.

꽃은 지고 새는 우는데 인적은 드물고

구름까지 깊어 예 놀던 곳 알 수 없어라.

< 예운 최동식 >

 

논두렁 밭두렁 사이의 호젓한 산길을 걷다 기암괴석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와 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류의 물소리를 듣는다. 

 

봄에는 붉은 진달래와 철쭉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계곡물을 붉게 물들인다 하여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을 얻었다.

조잘조잘 거리는 계류의 물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오르내린다.

푸릇푸릇 산죽이 피어난 곳 조각조각 모자이크하듯 회갈색 껍질을 덕지덕지 붙인물박달나무가 서 있다.

계곡가에 서 있는 구부러진 소나무 

노송이 우거진 소나무 숲길에 동녘 햇살이 내린다. 솔향이 코끝에 찡하다.

 

연못 속의 화도(花道)

피안을 향해 걷는 구도의 길, 연꽃을 새겨 놓은 징검다리를 건넌다.

 

가야산 깊은 골에

떠도는 흰구름

가는 곳을 알 수 없어 서성이고 있다

 

언제부턴가

개울가에 잠겨 있는 돌은

면벽참선에 들어가고

그 물 위로 떠다니는 낙화

이정표 없어도

잘도 흘러간다

 

앞서 걸어갔던 님의 말씀

한물결 일으켜 만물결 일어남은

또 뭘

급하게 달려온 메아리

알려주지 않음은 매한가지

 

이 몸 쉴 곳은

한 줌 흙인 것을

나도 업 쌓으면

내생엔 좀 나은 모습일까

 

가야산에 가면

궁금한 생각마저 누 될 것 같은데

어디선가 허허하는 님의 웃음소리

 

 < 해인사 가는 길 - 박정순 >

 

해인사 소리길 표지석

 

소리길 입구

 

계곡에서 흘러온 꽃잎을 따라 올라 가는 곳 - 축화천(逐花川 )

 

 

구부러진 산길

 

 

논두렁 밭두렁 사이의 호젓한 산길

 

소리길 탐방지원센터

 

홍류동 계류

 

물박달나무

 

물박달나무 회갈색 껍질

 

소나무에 동녘 햇살이 내리고 있다

 

 

소나무 숲길

 

북두칠성 예향하던 곳

 

바위에 새긴 부처 < 박상희 작 >

 

 

연못 속의  화도(花道 ) <김성복과 성신석조각연구회 작 >

 

 

징검다리 돌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김성복과 성신석조각연구회 작 >

 

 

소나무 토막으로 쌓아 올린 탑이 기발하다

 

 

  

崔孤雲先生의 遯世地 紅流洞

농산정 맞은편 언덕에는 문창후 최고운선생 신도비와 유허비가 있다.

그 앞에는 고운의 기상인양 푸른 향을 뿜는 두 그루 향나무가 자라고 있고,

높다란 돌계단 위 담장 안에는 고운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학사당(學士堂)이 있다.

계단 아래에 외롭게 서서 최고운선생을 기다리고 있는 석마(石馬)의 모습이 마냥 애틋하기만 하다. 

 

857년 신라 헌안왕 1년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난 최고운은 12세 때 입당 유학하였으며, 18세에 빈공진사로 급제하였다.

23세 때 반적 황소의 토벌에 나설 때 고병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었는데, 이 격서 중에 "不有天下之人 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 已議陰誅" 즉 "천하의 모든 사람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까지도 너를 죽이기로 의논하였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황소가 혼비백산하여 평상에서 떨어졌다한다. 29세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고운은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경륜을 신라에서 마음껏 펼쳐보고자 하였으며, '급선무십조(急先務十條)' 개혁안을 올리며 내 외직에서 10여 년간 노력하였다.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달성시키기에는 이미 지도층의 부패로 신라는 쇠퇴일로의 길로 들어 선 "鷄林黃葉 鵠嶺靑松"의 말기 시대였다. 최고운은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처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은둔하며 입산 시를 남겼으며, 그 후山水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 여생을 마쳤다.

 

僧乎莫道靑山好  山好何事更出山

試看他日吾踪跡  一入靑山更不還

스님아,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산이 좋다면 웬일로 다시 산을 나옵니까?

두고 보시오, 뒷날 나의 종적을.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 贈山僧 또는 入山詩 >

 

학사당과 신도비 유허비 전경

 

높다란 계단을 오르면 고운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학사당이 있다 매년 한식절에 배향하고 있다.

 

 

석마(石馬 ) 가 외롭게 서서 최고운선생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여 애틋하다

 

문창후최고운선생신도비(文昌候崔孤雲先生神道碑 )

 

문창후유허비(文昌候遺墟碑)

 

문창후유허비 왼쪽으로 농산정이 보인다

 

가야서당

 

학사당 아래에는 최고운선생이 세상을 등지고 독서하며 지냈던 가야서당이 있다.

가야서당(伽倻書堂), 유수헌(流水軒), 지척루(咫尺樓)) 편액이 걸려 있고, 네 기둥에는 "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그의 둔세시 주련이 걸려 있다.

 

지척루 편액과 주련

 

 

주련

 

孤雲 崔致遠의 자취 제시석(題詩石)

옛 학사당이 있던 근처에 후손들이 최치원의 유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0년 세운 송림 속에 있는 농산정(濃山亭)에 오르니 첩첩의 바위가 절경을 이루는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계곡 큰 바위 위에는 '고운 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 비석이 서 있고, 첩첩의 바위로 떨어지는 폭포 위의 평평한 암반에 그가 세상을 등지고 가야산에 입산할 때 지은,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이라는 친필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치원대(致遠臺지원대(致遠臺) 혹은 제시석(題詩石)이라 후세인이 부른다.

"선생은 신라사람으로 생존 연대가 멀어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옛사람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선생에 대해, 학문으로 보면 문묘에 올랐고, 문장으로 보면 문단을 주도했으며, 뜻으로 보면 백이(伯夷)처럼 세상을 피해 살았고, 자취로 보면 장자방(張子房)처럼 신선에게 의탁했다고 말들 한다."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새겨 놓았다는 제시석의 둔세시는 마멸되어 "狂奔 故敎" 네 글자만이 남아 있다. 

 

1597년 한강 정구가 기록한 유가야산록에는 ,

"최고운의 시 한 수가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며 바위를 깎아 내는 바람에 지금은 더 이상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참 동안 더듬어야 어렴풋이 한두 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771년 옥소 권섭이 기록한 유가야산기에는 고운이 시를 짓고, 손수 물 가운데 평평한 바위에 썼지만, 여울물이 사납고 새긴 것이 깊지 않아 이미 다 마멸되고, 다만 "狂故敎" 네 자만 분별할 수 있었는데, 우암 선생이 계곡 북쪽 바위 사이에다 다시 그 시를 모사해 새겨 놓았다"라고 되어 있다.(월간 해인)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네

 

지도층의 부패와 정쟁으로 자신의 경륜을 펼치지도 못하고 좌초된 울분을 토로한 것인가.

시비(是非) 소리 귀에 들릴까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싸 버렸나

홍류동 첩첩의 바위 위에 서서 님의 마음을 쫓는다.

천년 세월 마르지 않고 첩첩의 바위 사이를 미친 듯 흐르우렁우렁한 계류의 물소리가 고운의 울분인양 들린다.

송림 속의 농산정

 

 

정자에는 농산정 편액;세 개와;안쪽으로 농산정기와 찬양사 4개 그리고 제시석 원운을 차운한 시 8수가 걸려 있다.

 

농산정기 (濃山亭記)
농산정 편액

 

홍류동 첩첩의 바위

 

 

첩첩의 바위 사이를 흐르는 홍류동 계류

 

 

첩첩의 바위 사이를 흐르는 홍류동 계류

 

                                                                    

고운 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 ;비석

 

천년 풍우에 그의 자취가 점점 인멸되어 가는 안타깝게 여긴 가산 지관스님이 제시석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가야산 홍류동 고운제 시석처" 비를 세웠다.또한 제시석에 남아 있던 狂奔 故敎 네 자를 더 깊이 새겼다.

 

 

' 伽倻山 紅流洞 孤雲題詩石處' 비문

 

 

伽倻山 紅流洞 孤雲題詩石處

고운 최 선생은 신라가 낳은 천재적인 학자일 뿐 아니라 종교. 철학. 정치. 시문. 서도 등 각 분야에 걸쳐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이다. 선생은 12세에 입당 유학하고 28세에 귀국하였다. 22세인 황소난 때 병마제통인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지은 격문 중 "불유천하지인(불유천하지인)이 개사현륙(개사현륙)이라 앙역지중지귀(앙역지중지귀)도 이의음주(이의음주)라"는 구절은 황소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겸병부시랑 지서감에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과 간신들의 시기로 정읍. 함안. 서산군수 등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894년에 시무십조의 개혁안을 올려 아찬이 되었으나 계림황엽의 비운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각지로 유랑하다가 가야산에 들어온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900년에 해인사 선안주원벽기를 지은 것은 입산 이전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선생이 가야산 들어온 때는 37세인 894년 시무십조를 올린 후 고려 태조의 재위년(918-943) 중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918년 이후에 입산하여 현재의 고운암 터에 집을 짓고 살면서 무릉교 등 13명 소를 정하여 명명하고 자필로 그 이름을 새겼다. 그중 가장 절경인 홍류동의 농산정 동쪽 계천 중 암반에 그가 입산할 때 지은

狂噴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이라는 입산 시를 새겼으니 제시석이라 한다.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홍수광란(洪水狂瀾)으로 거의 마멸되고 기구인 광분 2자와 결구인 고교 2자 등 4자만 희미하게 남아 있으므로 우암 송시열이 농산정 맞은편 문창후 유허비 북쪽 해인사로 올라가는 오른쪽 암반에 자필로 이 시를 새겨두었는데 대부분의 인사들이 고운 진적으로 잘못 알고 있으므로 기자가 본 위치를 찾아 희미하게 남아 있는 4자를 다시 심각하고 후인들의 탁견을 없애고자 이 비를 세워두는 바이다.

불기 2540년(1996년) 3월 10일  伽山 李智冠 記    中山 崔鐘相 書

 

제시석(題詩石)에 남아 있는 고운 최치원의 친필 "狂奔 ;故敎 " 네 글자

 

 

이곳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새긴 글자가  바위에 빼 욱하다.

 

 

 

농산정 맞은편 문창후유허비에서 가야산으로 가는 길 석벽에는 새겨 놓은 글자가 뻬욱하다.

우암 송시열이 친필로 새긴 고운 최치원의 둔세시가 석벽에 새겨져 있다.

1725년 정식이 쓴 가야산록에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승려가 '시내 가운데 돌에 최치원의 친필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옮겨와 시 새긴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석벽 아래 길가 평평한 돌 위에는 둔세시를 차운한  일필휘지로 쓴 두 편의 시도 새겨져 있다.

  聞道孤雲入此巒

不知靈跡依何間

漫將開眼看尋處

動者流川靜者山

                   晦庵 定慧 謹記

고운이 이 산에 들어왔다는 말 들었지만

신령스러운 발자취 어디에서 머물었는지 알 수 없구나

느긋이 눈을 뜨고 그의 거처를 찾고자 하는데

움직이는 건 물이요 고요한 것은 산일뿐

 

圈然炎削來경巒

百道流泉瀉兩間

欲逐孤雲攀不得

遊筇到處悵空山

               不肖子 工生 羲

깎아지른 산등성을 끼고

여기저기 흐른 물이 한 골짜기로 쏟아진다

고운을 따라잡고 싶어도 여의치 않으니

지팡이 닫는 곳마다 텅 빈 산이 서글프다

 

농산정 맞은편 석벽에 행랑 우암 송시열의 친필로 새긴 최고운의 ;둔세시

 

工生 羲의 차운 시

 

晦庵 定慧의 차운 시

 

소나무 숲길

 

달빛이 잠겨 있는 연못  제월담

 

길상사

 

꽃이 떨어지는 소 낙화담(落花潭)

 

 

첩석대(疊石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