溜穿石 -처마물이 계속 떨어지면 바위를 뚫는다

2013. 3. 29. 16:09문화유적 답사기/제주 오현단五賢壇을 찾아서

제주 오현단五賢壇을 찾아서

  2013. 3.15.   금요

 

유천석溜穿石 -

처마물이 계속 떨어지면 바위를 뚫는다

  

산지천 복개 구간인 동문 재래시장을 지나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산지천을 따라 걷는다.

오현 1교 근처에서 가파른 골목 언덕배기에 오르니 제주성지에 다다른다.

성벽 아래 '橘林秋色'이라 새긴 오석으로 만든 표지석이  서 있다.영주 십경의 하나인 귤림추색橘林秋色. 옛 적 이 일대는 넓은 귤 과원이 펼쳐져 있던 곳가을에 귤이 익을 때 이곳 남성에 올라 바라보면 온 천지가 황금물결을 이루어 장관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그 제주성 남 성벽 아래 나무가 울울한 곳 귤림서원 옛 터에는 제주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현인(五賢)을 기리는 오현단五賢壇이 있다.

 

제주성지濟州城址

 

  

오석으로 만든 ' 橘林秋色' 표지석

 

  

다섯 작은 돌 조두석俎豆石에서 풍기는 오현五賢의 향기

  

오현단五賢壇 표지석이 서 있는 동문을 들어서니 군데군데 노거수들이 오현단을 지키고 있다.

제단 앞에는 봄 풀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다.

 

각자刻字없이 배열된 조두석俎豆石 앞에 서서 다섯 선현들의 맑은 향을 더듬는다.

120년 전 세운 다섯 개의 짤막한 돌에서 풍기는 멋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오현五賢의 향기가 배어나기 때문인 듯하다.

 

오현五賢은,

중종 15년(1520)에 제주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충암(沖菴) 김정(金淨),

중종 29년(1534) 제주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광해군 6년(1614)에 유배 왔던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조 34년(1601) 안무어사(按撫御史)로 내려왔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으로,

 

조선시대에 이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이다.

 

오현단의 유래는 선조 11년(1578) 판관 조 인 후가 충암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소謫所였던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沖菴廟 [祠])를 

짓고 제사를 지낸데서 비롯된다. 

그 후 현종 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현재의 오현단 경내로 옮겨 사祠로 하고, 원래 이곳에 세워졌던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하였다.

그리고 숙종 8년(1682) 규암 송인수 , 현종 10년(1669)에 동계 정온과 청음 김상헌을 추가하여 배향하였고, 숙종 21년(1695)에는 

우암 송시열을 마지막으로 추향(追享)함으로써 '五賢'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귤림서원은 숙종 8년(1682)에 사액(賜額)을 받았고,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기까지 약 200여 년간 제주 유생들의 

교학 활동과 지방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고종 29년(1892) 김희정(金羲正) 등 제주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여 제사를 지내었다.

 

오현단(五賢壇) 표지석 :문기선(文基善, 3回)의 글씨로 음각입석(陰刻立石)이 오현단 동쪽입구에 서 있다.

 

 

오현단 전경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이 각자(刻字)없이 배열되어 있다.

 

 

  

높이 43~45㎝, 너비 21~23㎝, 두께 14~16㎝인 조두석(俎豆石)이 각자(刻字) 없이 33~35㎝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바위들이 벽처럼 서 있다.

바위에는 ''曾朱壁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도다.'

당당한 글씨가 증자와 주자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즉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벽에 새겨 세우니 존경하고 따르라'라고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曾朱壁立' 네 글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로, 본래는 성균관 북벽에 새겨져 있던 것인데, 

제주 출신 변성우邊聖雨가 정조 10년(1786) 성균관 직강으로 있을 때 탁본하였던 것을 제주에 귀향한 뒤 귤림서원에 준 것을  

철종 7년(1856) 판관 홍경섭이 서원의 서쪽 바위에 새긴 것이다.

 

'曾朱壁立' 명문석 앞에는 '光風臺'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광풍光風은 비가 갠 뒤에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 또는 화창한 봄날에 부는 바람을 뜻한다. 송나라 육현六賢 중의 한 사람인 염계(濂溪) 주돈이는, “가슴속에 품은 것이 말끔하여 비 갠날 화창하게 부는 바람과 맑은 달과 같다”(光風霽月)라고 하였다"광풍제월의 인품을 기르는 대"를 의미하는 높은 뜻이 있다.

 

또, 그 앞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는 돌덩이 하나가 있다.

처마물이 떨어져 뚫어진 구멍이라 전한다.

원래 귤림서원 서쪽 처마 밑에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된 뒤 여러 번 옮겨지다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 한다. 

유천석(溜穿石) !
처마물(溜)이 계속하여 떨어지면 돌(石)을 뚫는다(穿).

귤림서원에서 원생들에게 “성실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큰 가르침을 내보이던 돌이다

인생이든 학문이든 성실하게 정진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큰 울림을 주는  유천석

溜穿石이다.

 

나무가 울울한 제주성벽 아래 오현단 경내를 걷는다.

오현五賢의 시비詩碑가 난립하여 서 있다.

 

'처마물이 계속하여 떨어지면 돌을 뚫는다'는 유천석의 의미를 되새기며 삼성혈로 향하는 가파른 마을 길을 오른다.

파란 청의 흰 무가 그려진 담장 벽화가 눈앞에 클로즈업된다.

 

우암적려유허비(尤庵謫廬遺墟碑)와 충암적려유허비(沖庵謫廬遺墟碑)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철종원년(1850) 4월 장인식(張寅植) 목사가 귤림서원 마당에 

 귤림서원의 내력과 오현 선생을 소개한 글이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를 제주 출신 변성우가 성균관 직강시 탁본하여 온 것을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겼다

 

 

 

' 증자벽립 曾朱壁立' 명문석

 

  

광풍대光風臺 명문석

 

  

유천석(溜穿石)

 

  

오현선생 오각비

 

  

향현사鄕賢祠

 

   

오현단 경내

 

   

파란 청의 흰 무가 그려진 담장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