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혼을 간직한 '尋牛莊'

2011. 9. 12. 14:37문화유적 답사기/민족의 혼을 간직한 '尋牛莊'

민족의 혼을 간직한 '尋牛莊'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 2 번지에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만해한용운심우장'(萬海韓龍雲尋右莊)이 있다

성북로에서 심우장 이정표가 가리키는 좁고 허름한 계단 골목길을 5분여 걸어 오르니 '尋牛莊' 택호가 대문에 걸려 있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게 된다.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주 보기 싫다고 남향한 주춧돌을 만해가 북향으로 돌려놓고  총독부와 등을 진 북향집을 지은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곳 심우장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해가 만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곳이다.

일제시대 조국의 강토가 짓밟히는 뼈아픈 역사 속에서도 민족의 혼을 간직한 유일한 조국의 땅이였다.

 

옛 시절 이곳은 성밖 북장골 송림이 우거진 한적한 곳이었다.

집을 지은 후 스스로 '尋牛莊'이라 이름 지었는데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위창 오세창이 쓴 '尋牛莊 "편액이 걸려 있는 청빈한 기운이 흐르는 고졸한 서재 툇마루에 앉아 만해 한용운의 향기를 더듬는다.

대문이 있는 마당 담장옆으로 붉은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보인다.

마당 모서리 만해가 손수 심었다는 올곧게 뻗어 푸르게 자라고 있는 향나무와 그 옆 활짝 핀 무궁화가 민족정기를 빛내고 있다.

마치 만해의 기상과 정신을 나타내 보이는 듯하다.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법신은 이 땅에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되었다.

선각자의 고단한 삶을 마감한 만해를 추모하며 위당 정인보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날에 님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런가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민족 운동가, 불교 사상가, 근대 시인으로 집약되는 萬海

 

조종현이 쓴 추모시는 만해 한용운의 큰 삶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꿋꿋하게 걸어갈 때 성역(聖域)을 밟기도 했다.

보리수의 그늘에서 바라보면

중으로도 선사(禪師)로도 보였다.

예술의 산허리에서 돌아보면

시인으로도 나타나고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만해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독립지사였다. 항일투사였다.

만해의 진면목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뜨거운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건 아니다. 항일투쟁하기 위해서다.

만해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님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웅변가다.

그저 말을 뽐낸 건 아니고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피로 뱉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럴까? 그렇게 될까?

한 점 뜨거운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도사렸기 때문이다.

 

무연히 툇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바람이 휘익 볼을 스치며 흐른다.

귀뚤귀뚤 또르르르...

섬돌 아래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온다.

아!  가을이 왔음을..... 

가을 바람결에 실려 '풍란화 매운 향내'보다 더한 만해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온다.

 

심우장을 갈려면 허름한 좁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

 

  

언덕에서 바라 본 심우장 지붕

 

 

 

 

만해 한용운이 1933년 부터 1944년 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은 북향하여 서 있고, 벽돌조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은 동향으로 서 있다.

 

 

서재 툇마루

 

  

만해 한용운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尋牛莊' 편액이 걸려 있다.

 

                                                  

葦滄 吳世昌이 전자체(篆字體)로 쓴 '尋牛莊' 편액

 

'尋牛'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牧夫)에 비유하여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속을 헤매는 모습을 초발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이다.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牧夫'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졌다.

'牧夫'는 '尋牛'와 같은 뜻으로, '심우장'의 '심우'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을 가졌고,

'尋牛莊'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즉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

                        

그의 수양의 경지를 보여 주는 심우장 시를 옮겨 본다.

        

尋牛莊 1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쏘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尋牛莊 2

禪은 禪이라고 하면 禪이 아니다.

그러나 선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 별로히

선이 없는 것이다.

선이면서 선이 아니요

선이 아니면서 선인 것이 이른바 선이다.

..... 달 빛이냐?

갈꽃이냐?

흰모래 위에 갈매기냐?

 

尋牛莊 3

소 찾기 몇 해로운가

풀기 이 어지럽고야

북이산 기슭 안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시잖으면

정녕코 만나오리

찾는 마음 숨는 마음

서로 숨바꼭질 한제

골 아래 흐르는 물

돌길을 뚫고 넘네

말없이 웃어내거든

소 잡은 줄 아옵시라.

 

 

 

 卍海 韓龍雲 肖像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이다. 용운은 법명이며, 만해(萬海, 卍海)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 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처음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순력 한 후 28세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10년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심우장에서 만해는 유마경 원고를 번역하였고, 신문, 잡지 등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고,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언제나

호의를 갖고 대하였으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네.

절대 진리는 순환함이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일세.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올 것일세." 하면서 자상하게 타이르시던 삶의 체취가 풍기던 심우장이다

또 만해는 당시 금서로 묶여있던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흑풍, 박명, 후회등의 신문 연재소설을 남겼고, 단재 신채호의 묘비명을 썼다.

                          

 

 

만해의 친필 시 -

 

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치고    

가없는 가을 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양 언덕이 고요하여 일마다 한가하여 은자가 자연에 도취되어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산사에 미풍일고 해는 트는 듯 한데 헤일 수 없는 짙은 가을 향기 선의(禪衣)를 때리누나

 

 

轉大法輪  진리의 바퀴는 쉬임없이 구른다.

 

 

만해의 유묵(遺墨)   마저절위( 磨杵絶葦) :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고사로 쉬지말고 계속 정진하라는 뜻

 

 

정사년(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중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이  풀려 지은 깨달음의 시 悟道頌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란 어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그 몇 사람 객수속에 길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千界     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
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붉게 흩날리네.

 

 

심우장에서 유마경 원고를 번역하였고 신문 잡지등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다.

 

  

만해와 손병희 선생이 좌장한 가운데 태화관에서 3.1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광경(기록화)

 

   

만해의 독립활동을 엿볼수 있는 1920년의 신문기사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독립은 남을 배척함이 아니라"    "깃부다! 더욱힘쓰라!   독립만세! "    "조션독립운동은 일본의 압박을 피함이 안이오 조션 민족 자신이 스사로 살고 스사로 놉힘이라"

 

  

3.1 독립선언 후 만해 한용운이 수감되었던 마포형무소

 

 

툇마루 앉아 보이는 마당과 전경   소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사이로 멀리 산능선과 집들이 바라 보인다.

 

  

수령 90년의 붉은 소나무

 

   

만해가 손수 심은 수령 80년의 향나무    그의 기상을 닮아 푸르고 올곧게 자랐다.

 

   

만해가 심은  향나무 옆에는 무궁화가 활짝 피어 민족정기를 빛내고 있어 그의 기상과 정신을 보는 듯 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에는 푸른 둥근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님의 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