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샘물이 솟는 法泉寺址를 찾다

2011. 8. 29. 10:40문화유적 답사기/진리의 샘물이 솟는 法泉寺址를 찾다

진리의 샘물이 솟는 法泉寺址를 찾다

  

진리의 샘물이 솟는 절,  法泉寺

옛 절터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다.

법천사지 가는 마을 입구에는 노거수가 우뚝 서서 길손을 맞이한다.

노거수 앞에는 '서원'이라 새겨진 마을 표지석이 있다.

 

 

 

 

 

 

 

거운 8월의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다.

발굴작업을 끝내고 잘 정비된 절터 축대 계단을 걸어 오른다.

자잘한 들꽃들이 수줍은 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산기슭 제일 높은 곳 '지광국사 현묘탑비' 

앞을 바라보니 너른 들판 뒤로 나지막한 산 능선이 흐르고, 그 너머 멀리 산 능선이 겹쳐 보인다.

빼 욱한 당우들이 들어 선 절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다른 감동이 있다.

폐허가 된 옛 절터의 여백과 공간

무언지 모를 편안함이 있고, 침묵하며 서 있는 깨어진 비신(碑身)에서 긴 세월의 흔적을 본다.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고려시대 걸작품을 바라보니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절터에 남아 있는 깨어진 석물들...

부처의 광배, 연화문 대석, 깨어진 석탑, 어디에 쓰였는지 모를 석물들을 보며 먼 옛날로 회귀한다.

한 때 대찰이었던 法泉寺

폐사가 된 빈 절터에는 옛 흔적만이 남아 기나긴 세월 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다.

빈 절터의 여백처럼 마음을 비우라 한다.

진리의 샘물이 솟았던 옛 法泉寺에 울려 퍼졌던 법고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귀를 기울인다.

 

 

 

탑비에서의 조망

 

 

발굴작업을 끝낸   법천사지는 축대를 쌓아 잘 정비해 놓았다 .

 

  

 

축대와 계단

 

  

法泉寺址

고려사』, 『신 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문헌에 전하는 法泉寺는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과 탑비(塔碑, 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으며, 법천사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묘탑지와 부도전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2001년부터 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문지 3개소, 석축 및 담장 유구, 계단 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碑) - 국보 제59호

 

이 탑비는 고려 시대의 스님인 지광 국사(984-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국보 제101호)을 세운 이후 1085년(고려 선종 2)에 스님의 삶과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묘탑 옆에 세운 비이다. 현묘탑은 일제 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인들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이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에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스님이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해린인 것과 16세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받고 84세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비의 뒷면에는 1,370여 명의 제자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가 4.55m인 이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11세기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힐 만큼 조각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절터 여러 곳에서 옮겨 모아 둔 석물들과 지광국사 현묘탑비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기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 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비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겼다.

 

 

 

 

비신 상단부 가운데에 '지광국사 현묘탑비'라 쓴 사각의 편액이 새겨져 있고, 편액 앙 옆으로 사각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봉황을 새겨 넣었다.  그 위로 비천상. 나무. 당초문. 해. 달이 세밀한 조각솜씨로 새겨져 있다.

 

  

 

                        

부도비의 비신 상단부에는 안상을 파고 그 안 중심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를 , 좌우로는 계수나 무 밑의 토끼와 삼족오를 새겨                           달과 해를 상징하였다. 그 주위로 산과 구름, 비천, 봉황등이 새겨져 화려하다.

 

                         

 

 

안상 주변의 보상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안상 안에 산과 구름 비천이 보인다.

 

  

 

지광국사 현묘탑비'사각의 편액 양옆으로 사각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봉황을 새겨 넣었다 .

 

 

 

 

비문은 안민후가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단아하게 썼다.   비신 바깥 쪽으로 보상당초문(덩굴무늬)을 조각하여 돌렸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절터  여러 곳에서  옮겨 모은 석물들

 

     

 

 

 

 

 

 

 

 

 

 

석재에 새겨진 활짝 핀 연꽃

 

  

 

 

 

 

 

 

 

부처님 광배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 국보 제101호

이 승탑은 고려시대의 고승 지광국사(984-1067)의 묘탑으로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1912년에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이 되어 3년 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지게 되었다. 탑의 받침대에 해당되는 기단부에는 여러 단을 두어 꽃, 상여, 신선, 장막등을 장식하고 탑의 몸체에도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장식을 하였으며, 지붕과 꼭대기도 불보살상, 봉황, 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다. 이 승탑은 지광국사의 장례 때 사리를 운반하던 화려한 외국풍의 가마을 본떠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승탑은 고려시대에 들어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고안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잇다. 지광국사는 고려 전기의 이름난 고승으로 현종. 문종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문종은 지광국사를 왕사로 삼았다가 훗날에는 국사로 임명하였다.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옆에 위치해 있다.

  일본 오사카까지 밀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이곳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파손된 것을 1975년 복원된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는 네모난 2층의 탑과 같은 모양이며, 높이가 6.1m이다.

  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풍의 창과 늘어진 커튼이 이국적이고, 지대석과 하대석의 네 모서리 위로는 용의 발톱과 같은

  것이 길게 뻗어 땅을 짓누르고 있어 기단부가 안정감이 있다.

  원래 기단 네 모서리에 사자상이 1구씩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지대석 네 모서리에는 용의 발톱 같은 조각이 땅바닥에까지 닿아서, 땅 위에 단단하게 밀착된 듯 안정감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 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塔身)에는 앞뒷면에 문비형(門扉形)과 좌우에 페르시아풍의 영창(映窓)을 조각하고, 다시 영락(瓔珞)으로 장식해 놓았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추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상륜부(相輪部)는 앙화(仰花)·복발(覆鉢)·보개(寶蓋)·보주(寶珠)가 층층으로 올려져 있고, 그 전면에도 조식(彫飾)이 가득 차 있다.   형태를 보아도 자유로운 의장으로 조형되었을 뿐 아니라, 조각이 풍부하고 정교하다.   그 반면 웅건한 기풍이 없고 기교에 치우친 점이 눈에 띄지만, 고려 부도로서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옥개(屋蓋)는 천 개형(天蓋形)으로 장막이 드리워지고, 아랫면에 해당하는 위치에 불(佛)·보살(菩薩)·봉황(鳳凰) 등의 조각이   가득하다.

 

 

智光國師 (984-1067)

지광국사는 원주출신이며 속성은 元氏 어릴 적 이름은 水夢이고, 海麟은 관응스님이 내린 법호이다.  수몽은 어려서 이수겸에게 배우다가 출가의 뜻을 품고, 법천사 관응스님을 찾아가 수업을 받는다. 어느 날 관응스님을 따라간 곳은 개경 해안사였다. 이 절의 준광스님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해린은 유식학을 공부하고 1001년 승교사를 개창하면서 명성을 얻으니 그의 나이 18세였다. 후에 法相宗의 교단을 이끄는 단초가 마련되는 셈이다. 비문에 따르면 해린의 천품과 그릇은 이미 부처님에 버금가는 큰 인물임을 적고 있어 그의 18세 명성에 품은 의구심을 가시게 한다.

해린은 젊은 나이에 더욱 당당했을까 1004년 21세에 대선에 급제했는데, "이때 법상에 앉아 불자를 잡고 좌우로 한 번 휘두르니 가히 청중이 모여 앉은 걸상이 부러진 것 같았다"라고 한다. 이에 임금은 해린을 성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다섯 왕을 거치며 대덕. 대사. 중대사. 승통의 법계를 강진홍도. 명료 돈오 등 10개의 법호를 받는다. 문종은 직접 거동하여 수차례 거절하는 해린 스님을 개성 봉은사로 찾아와 왕사와 국사로 추대한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하여도 곧 도도하고 훌륭한 문장을 이루었으니, 혜거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맞았으니 담빙의 음운학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 아니라 서화, 문장, 필법에 정통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는 찬탄이 거듭된다.

역대 왕들은 자주 지광국사를 왕실로 초청해 법화경과 유식학등의 법문을 들었고, 임금과 함께 어가를 타고 다녔으며, 직접 백고좌 법회에 동참하는가 하면, 문종은 지광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었으며, 넷째 아들(비문에는 제6자)을 출가시켜 지광국사가 법을 펴던 현화사에 머물게 하니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이다. 국사의 나이 84세. 당신의 명이 다했음을 안 지광국사는 처음 출가했던 법천사로 돌아와 머물다가 그해 10월 23일 열반에 든다. 문종은 시호를 智光, 탑호를 玄妙라 내리고 비문을 지으라 명했는데, 비문 짓기에 참여한 대신들은 중대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관상서, 예형부사감, 감수사, 겸 태자대전, 상주국, 신하 정유산 등이었다. 그들은 최고의 극찬과 명문장을 만들어 낸다. 고려 사회를 빛내던 걸출한 한 선사의 일생이 부도와 부도비로 대체되었다.

당대와 후대를 아우르는 걸작요, 후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탄생한 것이다.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법천사 당간지주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20호

 

이 당간지주는 절터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가 3.9m로 법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주는 큰 당간지주이다.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윗부분이 바깥쪽으로 둥글게 되어 있고, 안쪽으로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두 기둥 사이의 아래에는 깃대를 밑에서 꽂아 두기 위한 지름 66cm, 높이 6cm 정도의 받침돌을 8각의 형태로 다듬어 놓았다.

 

법천사 당간지주            법천리 마을 안에 있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깃대를 꽂아 두기 위한 받침돌을 8각의 형태로 다듬어 놓았다.

 

  

 

 

 

당간지주가 있는 마을 입구에서 바라다 보이는 법천사터

 

 

 

 

오가는 사람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노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