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동사지와 삼층석탑 오층석탑

2011. 8. 15. 13:47문화유적 답사기/하남 동사지와 삼층석탑 오층석탑

 

河南 桐寺址 와 삼층석탑. 오층석탑

 백제와 고려가 같이 숨 쉬는 땅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춘궁동의 지명유래는 조선시대부터 일컬어 오던 춘장동의 춘자와 궁말의 궁자를 합쳐만든 이름이며, 궁안, 춘장, 버구리, 선상동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 초기의 도읍인 위례성이 이곳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고골저수지를 지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밑의 토끼굴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백제시대의 절터 사적 제352호로 지정된 桐寺址가 있다.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이 바라보이는 분지.

천년 세월의 흔적을 담은 석탑 주변으로는 하얗게 핀 개망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석탑  
      손 상 근 

열리지 않는
문이 있습니다
두드려도
귀 멀어 듣지 못하는
가슴이 있습니다

해 묵은 책 속
한 구절 시귀(詩句)처럼
꺼내기 어려운
향기가 있습니다

안개처럼 허리 휘감는
나의 말들은
표면에 부딪혀
스러집니다

맴도는 내 가슴
환히 보면서
모른 채 서 있는
당신입니다

 

  

河南 桐寺址 

종 목 : 사적 제352호
시 대 : 삼국시대~고려시대
소재지 : 춘궁동 산 41번지 일대
지정일 : 1991. 8. 24

 

동사지는 이성산 남쪽 고골 저수지 옆의 야산기슭에 자리 잡은 절터이다. 1988년 판교~구리 간 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되어 절터의 규모와 창건시기가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다. 금당터는 현 대웅전 주변에 있는 넓은 평지로 약 2m 높이의 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사각초석이 줄지어 있으며, 중앙에는 본존불의 팔각대좌 하대석이 있다.

하대석은 직경이 약 5m에 이르는데 당대 최대 규모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하대석이 불상대좌의 하대석이 아니라 목탑의 하대석이라는 의견이 있어 앞으로 추가 조사가 이루어져야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초석 배열로 미루어, 과거에 있었던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2층 불전으로 추정되는데, 경주 황룡사의 금당에 필적하는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굴과정에서 금동불상과 막새·명문 기와·도깨비기와· 청동 불기류 및 도자기가 출토되었고, 특히 ‘광주동사(廣州桐寺)’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이 절의 이름이 ‘광주동사’였음을 알게 되었다. 금당터 동편에는 동사지 3층 석탑과  5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어 금당이 쌍탑(雙塔)을 마주하고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사지는 고려 초기 최대의 절터로서 가람배치나 건축양식이 독특하여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하남역사박물관)

 

 

 

 

 

 

 

 

 

 

 

 

동사지 삼층석탑과  오층석

 

 

 

동사지 삼층석탑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河南 桐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13 호

 

3층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높이는 3.6m이며 2층의 받침돌과 3층의 몸돌로 이루어졌는데 상층 받침돌의 남쪽 면석과 상륜부는 소실되었다. 이 석탑의 특징은 각층의 몸돌 비율이 급격히 줄어드는 데에 있다.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큰데 비해서 2층과 3층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지붕돌도 이에 비례해 줄어들었다. 이러한 급격한 체감비율은 다른 탑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매우 안정감이 있고 명확하고 세련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서울로 옮겨지다가 되돌아왔다고 하는데, 크기나 형태가 다른 두 개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는 점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5층 석탑이 금당 중심과 일직선을 이루기 때문에 3층 석탑이 이동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966년 해체 보수공사를 할 때 탑 안에서 납석으로 만든 작은 탑들이 나왔고, 2000년에 다시 해체 복원하였다. (하남역사박물관)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河南 桐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2 호

 

5층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檀)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는데, 남쪽 면이 부서져 있어 그 안쪽으로 커다란 기둥돌이 들여다 보인다. 이 탑의 특징은 탑신부에서 드러난다. 첫층 몸돌이 2단인데, 아랫단을 4개의 네모난 돌로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어놓았다. 이러한 예는 (전) 광주 성거사지 오 층 석탑(보물 제109호)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다. 지붕돌을 구성하는 돌 역시 1∼3층은 4장, 4층은 2장, 5층은 1장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5단, 2∼4층은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러한 구성은 탑신부가 위로 갈수록 강하게 체감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지붕돌 아래는 수평을 이루어 반듯하며, 경사는 완만하면서도 네 귀퉁이 선이 뚜렷하게 추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이 남아 있다. 구조상 불규칙적인 면이 많지만, 각 부분의 끝맺음마다 규칙성이 느껴지고, 탑신의 비례도 조화로운 우수한 작품이다. 지붕돌 모서리의 추켜올려진 정도나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한 점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양식의 전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붕돌 받침수가 3∼4단으로 줄어든 점이나, 기단의 가운데에 새긴 기둥의 수가 줄어든 것 등으로 미루어 고려 전기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현 다보사 법당과  동사지 3층 5층석탑

 

 

 

현 다보사 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