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8. 17:54ㆍ문화유적 답사기/삼성산 기슭을 걷다
(1) 만안교, 중초사지 당가지주와 삼층석탑을 찾다
2011. 1. 7. 금요일 맑음
어제가 소한(小寒)이다.
영하 12도 게다가 강한 바람이 불어 어제보다 체감온도가 훨씬 더 춥다고 예보한 오늘이다.
지독한 독감에 걸려 달포 가까이 고생하다 이제 겨우 회복하게 되니, 마음의 충동질로 인하여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관악역 1번 출구로 나가 석수동 방향을 향하여 10여분 걸으니 삼막교가 나오고 삼막교 아래로 내려서서 삼막천 눈 쌓인 천변길을 걷는다.
잠시 후 홍예 모양을 한 만안교(萬安橋)가 보인다.
잘 다듬어 만든 7개의 홍예가 있는 만안교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 온다.
만안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이 다리는 효성이 지극했던 正祖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려 갈 때 행렬의 편의를 위해 축조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자주 참배하여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원래 한양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고 노량진과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다리가 많고 고갯길이 있어서 행차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과천에는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시흥, 수원 쪽으로 길을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지나게 되었다. 정조 19년(1795)에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으로 3개월의 공사 끝에 이 다리를 완성하였다. 만안교는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 원래는 남쪽으로 양 460m 떨어진 석수로의 교차지점에 있었는데, 1980년 국도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조윤형이 쓴 만안교비에 이 다리의 연혁이 나와 있다.
만안교비가 세워져 있는데 만안교비명은 다음과 같다.
만안교의 축조를 칭송함, 머리글을 겸함
남충현(과천현) 관아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행차길이다. 우리 성상(조선 22대 정조대왕)께서 해마다 원침(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을 성묘할 때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봄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 내를 건넘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대체로 행차길에는 하천과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였다가 왕의 행차 후 바로 철거하였다. 따라서 얼음이 풀릴 때와 장마가 질 때에는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이에 전직 경기관찰사가 돌다리로 바꾸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미천한 신이 명을 받고 초가을 음력 7월에 일을 착공하여 3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교량은 길이 15장에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수문(비문에는 5개이나 실제로는 7개)은 다섯이다. 임금께서는 감독하는 사람과 장인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리고 특별히 만안교란 이름을 내리셨다. 생각건대 왕자가 다리로 편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의 장안교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또한 도보로 건너는 작은 다리와 수레로 건너는 큰 다리가 성주(중국의 주나라) 때에 만들어졌으나 돌로 쌓아 만년을 전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 다리는 다행히도 화성의 행차길에 있어 왕의 수레는 1년에 한 번, 어머니의 가마는 10년에 한 번씩 육룡(왕의 수레, 여섯 마리의 말)에 멍에를 메이고 8개의 방울을 울리며 편안히 지나갔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만 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다. 그리고 편리함은 만백성에 미쳐 멀고 가까운 짐 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를 건넘으로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을 돌아가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로써 만만 년토록 임금의 큰 은혜를 업고 자애로운 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공사를 처음 시작할 때 돌을 채취하였는데 하천가에 돌이 나와 경비를 반감할 수 있으니 마치 하늘이 도운 것 같아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를 숙여 그 일을 기록하며 기리어 말한다. 왕께서 해마다 한 번씩 성묘를 행차하시니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복이 함께 이르게 되었으니 아래에는 하천이 있습니다. 때때로 어머니의 가마를 모시고 만년토록 편안하소서 은혜가 만백성에 미치니 마음 놓고 건넘에 환성을 올리도다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도다.
만안교를 뒤로하고 걷는다.
이내 개천이 합수하는 지점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좌측의 개천길을 따라야 한다.
편편한 돌 징검다리를 건너 예술공원 이정표가 붙어 있는 좌측 다리 밑 천변길로 들어선다.
약 200여 미터 걸으니 중초사교가 나타난다.
길 위로 올라 중초사교를 건너면 우측이 유유산업 정문이다.
제약회사 유유산업이 자리 잡은 터 전체가 중초사 절터였다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 옆으로 흰 눈이 쌓인 축대위로 단정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보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눈 위에 우뚝 서 있는 단정한 당간지주,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삼층석탑이 아름답다.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돌며 완상 한다.
눈이 시리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4호)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cm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 초사 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 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cm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 해방 후 인근의 석수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였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다.(문화재청)
서쪽 지주의 명문은 모두 6행 123자이다.
"보력 2년(826년) 세차 병오년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 동쪽 승악(僧岳)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라고 새겨져 있고, 조성 책임자인 절주통 황룡사 항창화상을 위시해 10여 명의 법사가 이 일에 동참하였다는 내력을 기록하였다.
안양 중초사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
중초사 터에 남아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을 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 쳐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되었다.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이다. 1층 기단이라는 특이한 점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2) 우리나라 유일무이의 마애종(磨崖鐘)을 찾다
중초사교를 다시 건넌 후 개천 따라 안양예술공원 방향으로 걷다
안양보육원 가는 다리를 건너면 멀리 거대한 암봉 밑으로 전각이 보인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이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유일무이의 석수동 마애종(경기도 지방문화재 제92호)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 32에 위치하고 있다.
거대한 암봉 위로는 꾸불꾸불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암벽 밑에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지나 마애종 보호각 울타리 사이로 마애종을 바라본다.
햇살로 인하여 보호각 울타리가 그림자 되어 드리워져 있는 암벽을 조용히 응시한다.
"종각에 달아 놓은 종을 스님이 치고 있는 장면이다. 그 구성을 찬찬히 살펴보면, 바위면 전체를 종각으로 삼고 종을 치는 스님은 동자승으로 묘사해 매우 독특한 감동을 이끌어 낸다. 사각형의 결구형식에 쇠사슬로 매달아 진 종은, 용머리로 감싼 음관에 정교한 용뉴를 갖추고 있다. 종신은 아래로 내려가며 약간 벌어졌다가 끝에서 살짝 오므린 모습까지 전통적인 한국종 모습에 충실하다. 종신은 윗부분에 묘사된 유곽, 중심부에 자리 잡은 연화문 당좌, 알 수 없는 문양을 새긴 아랫부분으로 나뉘어 매우 치밀한 공간구성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기둥 위의 둥근 구름문양, 음관을 감싸고 있는 부드럽고 가는 용의 수염, 종매를 잡고 종을 치려는 동승의 움직임, 오른쪽 어깨에 걸친 가사, 발까지 내려온 법의 등 조각솜씨가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며 조화로운 균형감이 퍽 안정된 느낌을 준다. 남남동으로 안치된 마애종이 아침햇살을 받으면 그 선명한 윤곽이 눈부시게 돋아날 것만 같다.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구성이다. 조성된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용뉴. 종신 등의 표현과 부분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신라 말 아니면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종으로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데가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기법으로 더욱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마애종 외곽 옆 산으로 오르는 등로를 따라 암봉 위로 오른다.
암봉 위에서의 시원스러운 조망이 압권이다.
(3) 염불암을 거쳐 삼성산 삼막사를 찾아 걷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 삼성산 삼막사를 향하여 개천을 따라 오른다.
갑작스럽게 허기를 느껴 된장찌개로 점심식사를 한 후 염불암 오르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 도로를 걸어 오른다.
염불암이 위치한 삼성산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그 하나는 원효, 의상, 윤필 신라의 세 성인이 이 산에 들어와 원효대사는 삼막사를, 의상대사는 연주암을,
윤필거사는 염불암을 각각 짓고 수도하였다는 데서 기인하고, 또 하나는 삼막사에 지공, 나옹, 무학이 머물렀던 까닭에
삼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염불암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유래도 있으며 이때 이름은 안흥사로 곧 염불암의 시초로 전해진다.
염불암 대웅전 마당에는 500년 수령의 보리수가 있으며, 마애부도, 높이 8m의 미륵불이 있다.
칠성각 외벽의 연꽃 벽화가 아름답고 염불 전의 용선 벽화와 연꽃 문양 단청이 아름답다.
염불암 범종각 옆길의 삼막사 가는 등로를 따라 오른다.
돌길과 돌무더기를 지나 능선을 넘어 눈 쌓인 미끄러운 길을 한참 내려가니 삼막사다.
삼막사(三幕寺)
삼막사는 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 17년(877)에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성인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이라는 이름도 이때 지어졌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로 부르다 사찰이 용성해지며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의 삼먁사를 닮아 삼먁사로 불리다
언제부터인가 三幕으로 바뀌었다. 고려 충목왕 4년 나옹대사와 인도 승려 지공이 이곳으로 오니 선풍이 크게 일었고, 조선조 무학대사에 의하여 동쪽에 불암사, 서쪽에 진관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한양 남쪽의 비보사찰로 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태종 때 대중창이 있었으며, 임진왜란시 왜구가 침범하여 불을 질렀으나 법당 건물이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근대에는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이 이곳에 백련암을 지어 은거하였다. 현재 조선 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와 명왕전이 있으며, 고려시대 삼층석탑(일명 살례탑)과 사적비, 남녀근석, 마애삼존불과 비지정문화재인 삼귀자, 감로정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어 삼막사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삼귀자(三龜字)
조선말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1852-1935)이 이곳 백련암지에서 은거할 당시에 쓴 글로 바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 자를 새겨 놓았다.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좌측에 "불기 2947년 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란 명문이 있어 1920년에 쓴 글임을 알 수가 있다. 서체는 전서로 우측각자머리에 "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하여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에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으며 삼귀자 우측에는 바위면에 시주자 명단을 새겨 놓았다.
칠성각 오르는 길은 돌바닥과 돌층계로 잘 만들어 놓았다.
해가 어느덧 서산마루에 걸려 있다.
삼막사 마애삼존불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
이 마애불은 조선 영조 39년(1763)에 조성된 것으로 암벽을 얕게 파서 만들었는데, 칠성각이 전실 역할을 하고 있는 석굴사원 양식으로 전해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거느린 삼존불로 모두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불상이 모셔져 있는 칠성각이 조선 영조 40년(1764)에 세워졌으므로 본존불은 칠성각의 주존이 치성광여래로 볼 수 있다. 민머리에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표현되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어깨에 닿은 긴 귀와 얼굴에 연이어 어깨가 표현되어 목은 달리 표현되지 않았다. 옷은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으로 가슴에는 내의인 군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고 두 손은 배 앞에서 보륜을 쥐고 있다. 좌우의 보살상은 연꽃좌에 앉아 있으며 해와 달이 표현된 삼산관을 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다. 가슴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하였으나 보관과 손 모양을 제외하면 본존과 같은 모습이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인 모습을 볼 때 얼굴과 당당한 어깨 등 상체 표현에 치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본존불의 보륜 수인과 좌우 보살상인 일광보살, 월광보살상의 특징은 칠성각에 본존으로 봉안된 형식과 더불어 칠성의 본존불인 치성광삼존불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로서 치성광후불탱은 꽤 남아 있으나 마애불상으로는 매우 희귀한 예이므로 가치를 지닌다.
삼막사 남. 녀근석 (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
2개의 자연 암석으로 그 모양이 남녀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 녀근석이라 부른다. 남근석은 높이 1.9m이고 , 여근석은 높이 1.1m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7년(677) 원효가 삼막사를 건립하기 이전부터 이 남. 녀근석은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 순조로운 출산을 하게 되고, 가문의 번영, 무병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등 이름 있는 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과 과일을 차려 놓고 치성을 드린다. 이러한 성기 숭배 풍속은 풍부한 수렵 및 채집의 기원 및 풍농. 풍어. 다산. 무병장수 등의 기원이 한데 얽힌 복합 신앙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은 선사시대 이래 현재까지도 무속신앙, 풍수신앙, 동제, 미륵신앙 등의 전통 속에 어우러져 있다.
삼막사 사적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이 비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경기 관악산맥갑묘행료삼성산하사명 삼막좌유향로봉"과 건립연대를
밝히는 "강희 46년 정해"란 명문이 있어 이 비석의 위치는 경기관악산맥 삼성산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 숙종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막사 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이 탑은 삼막사 승도인 김윤후가 몽고군의 원수인 살이타이(撒禮塔)를 살해, 싸움을 이긴 승적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 기단부는 장대석 4매로 하층기단 하대를 만들고, 하층기단 면석도 역시 장대석 4매로 되었으며 갑석은 2 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상층기단 면석은 4 매석으로 짜여있고, 갑석은 한 귀퉁이가 파실 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정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높이는 2.55m이다.
삼막사 감로정 석조
귀부형과 원통형 2기가 있는데 앞쪽에 甘露井이라 새긴 표석이 있다. 귀부형은 거북모양의 석조와 등껍질 문양이 새겨진 뚜껑이 각각 다른 석재로 되어있다. 석조는 1837년(헌조 17)에 조성된 것으로 4개의 원통형 석재가 석조를 바치고 있으며, 석조 앞쪽에는 목을 움츠린 거북머리가 표현되었다.
원통형 석조는 비교적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50cm 정도이다.
몽고군을 무찌르고 승전을 기념한 삼층석탑 밑의 감로정 석조에는 연실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나뭇결이 선명한 울타리에는 시화가 걸려 있다.
수행승의 고뇌가 읽히어진다.
울었네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칡덩굴처럼 거칠게 얽힌
업.... 인연.... 삶의 무게
감당할 수 없는 회오리바람 같은
외로움 고독 허무의 강습에
힘없이 울었네
힘 부치게 살아온 날들
말할 수 없는 인내로
감춰 두고서 감춰 두고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쓸어안고 쓸어 안고
혼자서 울었네
님이시여
님이시여
나를 잡아 주소서
자유(해탈)를 위하여
달려.... 달려....
가리니
출가 I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生(삶)은 무엇이며
死(죽음)는 무엇인가
찾아서... 찾아서... 찾아서
길 떠나네
아버지.. 어머니..
눈물을 달래며
저린 가슴 여미고
눈시울 적시며
길을 떠나네
나를 찾아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네
삼막사 명왕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0호)
조선 고종 17년(1880)에 건립된 명왕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위시하여 명부의 10대 왕을 모신곳이다.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이 건물은 현재 맞배지붕에 방풍판까지 설치되었으나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개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과 기둥이 만나는 곳에 사용되는 공포는 조선말기의 일반적이 주심포계 형식으로 귀보의 용머리 조각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사용되었다.
범종루에는 석양의 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석양 속에 법고와 범종 그리고 운판 목어가 장엄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둥둥둥 리드미칼 한 법고소리를 마음으로 듣는다.
운 판을 치는 소리, 목어를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삼천대천세계로 메아리 져 울려 퍼지는 범종의 울림을 마음의 귀로 들으며 눈 쌓인 등로를 따라 하산한다.
나뭇가지 사이의 석양이 흰 눈길 위에 긴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나를 찾아
진리를 찾아
걸었던 오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