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고달사지를 찾다

2010. 9. 22. 19:09문화유적 답사기/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고달사지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高達寺址를 찾다

2010. 9.20. 월요일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차로 달려 여주에서 성묘를 마치고,  폐사지 고달사지로 향한다.

남한강을 건너 상구리 블루헤런 CC를 지나니 구불구불 내리막길이다.

고달사지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니 주차장이 있고 멀리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인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번지 일원 고달사지는 해발 400~500m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서북쪽 혜목산(현 지명은 우두산) 동쪽 경사면에 있다.

고달사지의 면적은 약 12,000 여 평이다.

 

한 때는 이 일원 사방 30리가 모두 절땅이었다는 거찰 고달사.

지금은 빈터에 석물 몇 점이  천 년 세월 동안 만고풍상을 겪으며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훌륭한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있다.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문화재청)

 

 

수령 400년이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빈 절터를 지키는 사천왕처럼 버티고 서 있다.

고달사지 뒷편 혜목산엔 짙은 안개가 깔려 신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우의를 걸치고 울타리가 쳐진 옆길을 따라 유적지 답사를 위해 천천히 걸어 오른다.

비 오는 날의 유적지 답사는 또 다른 감회가 있다.

 

비가 내려 풀숲에 맺힌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적신다.

검은 돌 높은 계단을 걸어 오르기도 한다.

천 년의 숨결을 느끼고 천 년의 향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가슴은 설레기 시작한다.

 

  

고달사의 사천왕처럼 우뚝 서 있는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

 

 

고달사지 뒷편 혜목산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다.

 

                                     

(1) 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보물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광종 때까지 활동한 원종대사(869-958)의 부도인데,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높이 2.5m이다. 이 부도는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지대석과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놓여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을 중심으로 네마리의 용이 있는데 몸통 사이에는 구름 문양을 가득 새겨 넣었다. 상대석의 아래쪽에도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의 각 면에는 자물쇠 문양과 사천왕상이 교대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의 끝에는 꽃무늬(귀꽃)가 크게 조각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꽃무늬가 조각된 복발 위에 작은 보개와 보주가 놓여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 4면에는  문(門) 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2) 高達寺址浮屠   (국보 제4호 )

 

'고달사지 부도'를 가기 위해 높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고달사지부도

 

                                     

 

 "고달사지 부도"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 광종 대 이후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폐사되고 터만 남아 몇몇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팔 가 원당형의 고달사지 부도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시대의 부도 양식을 보여준다. 이 부도의 하대석에는 팔각의 각 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에는 거북 용 구름이 조각되어 있는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웅장하여 이 부도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상대석에는 연촉이 표현되어 있다. 그 위에 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우주)이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마다 자물쇠 문양(문비)과 사천왕상, 映窓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어졌으며 추녀 끝에 꽃무늬(귀꽃)가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복발과 보개가 올려져 있다. 이 고달사지 부도는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같은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혜진탑(977년 건립추정) 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원당형인 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섬세하고 화려하고 아름답다.

거북을 중심으로 구름 속을 노니는 힘찬 생동감 있는 용의 모습을 보니 '과연 국보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두 마리 용의 꼬리가 힘차게 휘감고 있는 모습, 불꽃 광배가 있는 여의주를 붙잡고 있는 생동감 있는 용의 발, 지붕돌 밑에 새겨진 비천상의 아름다움, 연꽃촉의 우아함, 지붕돌의 귀꽃, 사리를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과 映窓, 탑을 빙빙 돌기도 하고, 서서 홀린 듯 보고  또 본다.

천 년 세월 이곳에서 풍상우로를 겪으며 꿋꿋이 제모습 그대로를 지켜온  소중한 문화재 '고달사지부도'다.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 용두

 

 

  

중대석의 운룡문

 

 

 

 

 

구름 속을 노니는 힘찬 생동감이 느껴지는 용,  두 용꼬리가 힘차게 휘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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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중대(基壇中臺)에는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龍)과 구름모양을 조각하였다

 

                                     

                                                                       

두 마리 용의 꼬리가 힘차게 휘감고 있다.

 

용이 발로 불꽃 광배 여의주를 붙잡고 있다

 

 

 

 

 

 

 

고달사지부도 탑신부 사천왕상과 映窓

 

                                     

                                     

 

지붕돌 밑면의 아름다운 비천상

 

 

  

 

 

옥개석과 상륜부  :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 있다.

 

                                    

고달사지부도

 

                                    

'고달사지 부도'에 대한 문화재청의 해설을 옮겨 본다.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이 부도(浮屠)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부도(浮屠) 가운데 손꼽히는 거작으로 상륜부(相輪部)만 완전하지 않을 뿐 각부(各部)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기단중대(基壇中臺)의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龍)과 구름모양을 조각한 솜씨가 힘차고 능숙하며 대담하다. 팔각(八角) 탑신(塔身)의 각면에는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고, 비교적 두꺼운 지붕에는 각 전각마다 높직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신라부도(新羅浮屠)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에서 고려시대(高麗時代) 양식(樣式)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각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58)에 입각한 원종대사(元宗大師)의 혜진탑(慧眞塔)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3.4m이다."

 

                                   

고달사지 부도

 

                                     

 

고달사지 부도 오가는 길

 

                                   

 

 (3) 高達寺 元宗大師 慧眞塔碑 龜趺및 이수(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귀부와 이수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 사지'를 받쳤던 귀부와 碑身石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身石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 근정전 서쪽화랑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 공산 삼랑사에서 융제선사에게 사사하였다.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3세에 입당하여 서주 동성현 적주산에서 자선화상에게 사사하였으며 경명왕 5년(921)에 환국하여 봉림사에 거주하였다. 그 후 광주 천왕사에서 고려 광종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하니 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이라 추시하고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귀부는 거대한 단일석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의 비 좌는 운문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 위에 조출되고 상면 둘레에는 복련문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의 면모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이다.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수 -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문화재청)

 

 
 

이수 용두

 

  

 

이수 각자  '慧目山 高達禪院 國師元宗大師之碑"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 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 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문화재청)

 

 

                                                                                                       

귀부의 머리,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귀부의 꼬리와 귀갑문

 

 

  

이수 옆면에 조각된  두 마리  용이 꼬리를 힘차게 감고 있다.

 

 

 

  

이수 옆면에 조각된  두 마리  용이 꼬리를 힘차게 감고 있다.

 

 

                                    

(4) 고달사지 석불좌(보물 제8호)

 

고달사지 석불좌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석불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덩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명쾌한 4 각대좌의 수작이다. 이 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등 3중으로 겹쳐놓은 이른바 방형대좌이다. 상대는 앙련을 시원하고 뚜렷하게 조각했고, 중애는 4면에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을 음각했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하대는 상대와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으로 새기고 그 아래로 안상도 조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형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로 조화시킨 고려 초기 역작의 석조대좌라 할 수 있다."

  

고달사지 석불좌

 

 

 

중대석에 4면에 음각된 안상

 

 

 

하대석 복련석 괴임과 연화문 아래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상대석  앙현석  괴임과 연화문

 

 

 

 

 

 

(5) 6차 발굴조사가 끝난 후의 폐사지 이모저모

  

일부 귀부만 남은 탑비

 

 

 

석축

 

 

 

 

 

건물 터

 

 

 

석조 수조

 

 

 

폐사지 전경

 

고려초기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중의 하나였던 거찰 고달사

폐허가 된 절터에는 파손된 유물 몇 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세월 풍상우로 을 겪으며 이 자리를 지켜가야 할 것인가.

페허의 절터 저 멀리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을 망연히 바라본다.

 

폐사지(廢寺址)의 저녁

김 은 숙

 

허물어진 세월 깊숙이 품은
지상의 큰 자궁이다

 

절집 몸체 걷어내며 멀찌감치 떨어져
한 시대 무심히 해탈한 듯해도
건넌 듯 아니 건넌 듯 엎드린 그 자리
여기저기 웅크린 시간의 이끼 검푸르다  

 

부산스러운 발자국들 흘러가자
생강나무 사이로 낯익은 바람 굽이치고
무성히 품어오며 우거진 세월
넓혀진 고요 휘젓듯 한참을 누비다가
풀잎 끝 돋을새김으로 휘어지며 앉는데

 

달빛 서늘히 머금고 건너왔는가
불룩한 석탑 훑고 가는 천년의 구름
느릿느릿 비릿한 몸을 푼다

 

둘러선 침묵의 두께 위로
망초꽃 웃음소리 펄럭이고
청띠신선나비 한 마리
초록 경전 속으로 든다

 

 

 고달사지쌍사자석등 (보물 제282호)

 

고달사지쌍사자석등  -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 공원에서>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4면에 둥글넓적한 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아래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올라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쌍사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