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普願寺址를 찾다.

2010. 8. 23. 13:04문화유적 답사기/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보원사지

(2)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普願寺址를 찾다

 

서산 마애삼존불을 뒤로하고 보원사지를 향하여 용현계곡을 따라 오른다.

들목 길 오른 편에 방선암이 있다.

 

방선암

 

이 방선암(訪仙岩)은 조선시대 해미현내에 거주하던 선비들이 모여 이곳 마당바위 위에서 詩會를 열었던 곳으로 이것을 기리기 위해 

바위에 訪仙岩이라 새겼다.

방선암을 지나 용현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에는 펜션과 민박 음식점이 많이 있다.

한참을 오르니 길 우측에 보원사지가 나온다.

 

보원사지(普願寺址)

잡초만 무성한 허허로운 빈터에 미끈한 당간지주가 서 있다.

원래의 그 자리에 서서 천년을 지켜온 당간지주다.

그 하나만으로도 위대하게 보인다.

이 일대가 한 때 영화로웠던 대사찰 보원사 당우들이 배욱히 서 있였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빈 터에 잡초만 무성하다.

당간지주, 5층석탑, 석조, 부도탑과 비석들만 잡초가 우거진 빈터 이곳저곳에 덩그럽게 남아  옛 대사찰의 편린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오랜 역사를 웅변해 주는 이러한 석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인지 모를 진한 감동이 가슴에서 우러난다.

여백과 공간이 있어 편안하고, 또한 그 여백과 공간에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행복하다.

무성한 잡초 길은 내린 비로 인하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질퍼덕 거린다.

 

 

서산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

 

 

서산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

지   정   일 : 사적 제316호                                   

지정연월일 : 1987년 7월 18일                                  

소재지 : 서산시 운산면 홍현리 48 외 70필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이 절터에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던 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1967년도에는 벡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 고려초 불교 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이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양식 기반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 석탑(보물 104호), 몽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 102호),975년(광종 26)에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승탑(보물 105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탑비(보물 106호), 사찰에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당간지주(보물 103호)가 있다.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한 백암 사지 등 불교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미끈한 당간지주와 보원사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미끈한 당간지주가 무성한 잡초 위에 말없이 우뚝 서 있다. 

침묵으로 맞이해 주는 당간지주다.

당간지주 뒤 개울 건너, 왼편으로 보원사지 5층석탑과 멀리 법인국사 보승탑과 보승비가 보인다.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쓴 용기인 보물 102호 석조(石槽)가 있다.

 

석조

 

 

절터를 흐르는 개울물이 간밤 호우로 물이 깊어져서 건널 수가 없다.

개울가 둔덕에는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 있다. 

멀리 멀리 돌아 5층 석탑으로 간다.

절터를 흐르는 개울물

 

 

 

안내판 내용을 옮겨 본다.

보원사지 5층석탑(普願寺址 五層石塔)

지    정  별 : 보물 제104호                         소유 : 국유(서산시)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21일                       규모 : 높이 약 9m

위         치 :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        재료 : 화강암

시         대 : 고려시대

통일신라-고려초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다. 목조탑파에서 석조탑파로 변환되는 과정의 형식이며 아래층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8부 중상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기단부에 우주, 탱주를 세웠고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은 것과 옥개석의 물매가 평활하며 끝이 살짝 들어 올려진 것 등이 백제계 양식이다. 또한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지역에 신라 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다. 상륜부에는 긴 찰주만 남아 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 아름다운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련, 용차,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1968년 해체 복원 시 사리 내갑, 외갑, 사리병, 납석소탑등이 출토되어 부여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보원사지 5층석탑(普願寺址 五層石塔)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 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고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문화재청)                                                                                                                         

 

 

하층  기단에 새겨진 사자상

 

  

 

 

 

 

 

 

 

상층 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상

 

 

 

전각 끝이 살짝 들어 올려져 있고, 온화한 체감률의 얇고 넓은 지붕돌이 보인다.

 

고인 물에  반사된 탑신의 그림자

 

 

발굴 조사를 위해 파헤쳐진 절터 고인 물에 반사된 탑신의 그림자가 보인다.

보원사 천년 역사를 간직한 5층 석탑은 오늘도 말없이 우뚝 서 있다.

 

주춧돌 옆 빗물 고인 물에 조용히 탑신을 투영하면서.

 

 

금당터에서  바라본  5층 석탑  모습은 장중하고 미려함이 느껴진다.

 

 

발굴터

 

 

발굴터를 들어가지 못하도록 쳐 놓은 보호막 옆길을 돌아 법인국사 보승탑과 보승비로 향한다.

등산로 이정표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보원사지 뒷산을 넘으면 개심사로 갈 수 있다.

가야산 석문봉 줄기인 상왕산이다.

용현계곡을 따라 임도를 계속 따라가다 갈림길에서 우측 임도로 가면 일락사로 갈 수 있고 또한 석문봉 가야봉을 오를 수 있으며,

좌측 임도로 가면 남연군묘로 갈 수 있다.

 

 

보원국사 보승탑과 보승비 앞에 선다.

 

 

 

 

 

서까래가 표현된 지붕돌과 그 위에 연꽃이 조각된 복발이 보인다

 

 

 

윗받침돌 윗면에 수직으로 새겨진 난간조각이 보이고, 몸돌에 조각된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과 사천왕이 보인다.

 

 

 

기단부 밑돌  안상 안에  조각된 사자상과 윗돌에 조각된  구름 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이 보인다.

 

보물 제105호 국인법사 보승탑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 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 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 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보승국사 탑비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보물 제106호 법인국사 보승탑비

 

보물 제106호 법인국사 보승탑비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문화재청)

 

 

 

천년의 역사를 더듬으며 여백을 걷는다.

발굴로 파헤쳐진 빈터 잡초 위에 우뚝 서 있는 5층석탑을 망연히 바라보기도 하면서.

 

폐사지(廢寺址)에서 

            엄 원 용       
                                         
폐사지에 가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
외로운 주춧돌 하나에 눈을 던지고
천년 거슬러 오라 가면
붉은 두리기둥, 낡은 단청 위로
날렵한 처마 끝이 하늘을 가린다

 

폐사지에 가면 보이는 것도 볼 수 있다
어쩌다 모질게 살아남아
이리저리 차이는 돌덩이 하나 
흙 속에 뒹구는 석등(石燈) 한 조각
면마다 귀마다 아로새긴 때 묻은 님의 손길이
아직도 천년 세월이 새롭다. 
 

폐사지에 가면 또 누구도 만날 수 있다.
새벽 범종 소리 영혼을 흔들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부산하게 어둠을 가르던 사람들,
애증의 굴레에서 몸부림치던 그리운 님들,
없어도 가장 넉넉하고
높아도 가장 겸손함에 고개를 숙인 사람들,
비어 있는 마음들을 들여다보면
나도 어느새 석상이고 싶어 진다.

 

폐사지에 가면 바람도 맞을 수 있다.
덧없이 흐르는 물결 위에
역사란 얼마나 무상하냐
한 때의 영화도 자랑도
천년 느티나무 가지에 스치는 바람
아득한 자취 몇 개 남아있는 허허한
그 빈터에서 지금 나는
비운의 철학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