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느티나무가 지키는居頓寺址

2011. 8. 30. 18:11문화유적 답사기/천년 느티나무가 지키는거돈사지

천년 느티나무가 지키는居頓寺址

 

 묵은 침묵은 하늘을 무수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과
재잘대는 물소리에나뭇가지들이 가볍게 흔들리고
깨어진 기와조각 몇개와
세월이 반은 가져가버린 주춧돌의 흔적.
옛날에는 규모가 잘갖추어진 절이었나 보다.
봄에는 진달래만발하고
가을엔 단풍들이찬란하게 피어
옛날에는 무척아름다운 절이었나 보다.
사계절 한 번도 색 변할리 없는 단청과
법당 벽에는 훌륭하게그려진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져 있었을지도몰라.
바람이 오동나뭇잎을쓸어내는 겨울밤엔
처마의 풍경 소리가하늘을 이고 와서 번뇌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염불 소리는 고향 가듯풀숲으로 다가와서는
흐르는 물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이제
수억겁 고독의 시간을지 내와서도
언제나 푸름을피워내는 푸른 산 둘레를 바라보고 있다.
허물어진 날을 가슴에받아들고
한없이 먼 산을바라보고 있다.
세월이 되어
그 자리에 한 움큼의산이 되어서.

<  박남원의 '절터' >

 

법천사지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옛 절터 거돈사지 가는 길 자작고개에서 앞을 바라보니 풍광이 아름답다.

도로 확장 공사중이어서 붉은 흙길을  덤프 트럭이 오가고 있다.

 

자작고개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광

 

원주시 부론면 정산3리

한계산 기슭 작은 골짜기에 있는 옛 절터.

거돈사지 석축 위로 수령 1,000년의 느티나무가 사천왕처럼 우뚝 서 있다.

거돈사 천년 세월을 바라보며 함께한 이 느티나무는 오늘도 묵묵히 이곳 절터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폐사지를 가보면 어디든 언제나 긴 세월의 무게를 느끼며 영고성쇠 하는 대자연의 이치 앞에 숙연해 지곤 한다.

삼면이 낮은 야산으로 둘러 싸인 너른 절터는 유순한 기운이 흐르고 아늑하기만 하다.

휑한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부서진 불대좌,  원공국사 부도비, 한곳에 모아놓은 조각 난 부재들만 남아 있다.
적막한 절터에 서서 저 멀리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

 

수 억겁 고독의 시간을지내와서도

언제나 푸름을 피워내는 푸른 산 둘레를 바라보고 있다.

허물어진 날을 가슴에 받아 들고

한 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월이 되어

그 자리에 한 움큼의 산이 되어서."

 

 

 

거돈사지의 사천왕 역할을 하는 수령 1,000년의 느티나무   수고 20m, 나무둘레 720cm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 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 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문화재청) 

 

금당터 위의 불대좌와 삼층석탑이 보인다.

 

 

쓰임을 알 수 없는  조각난 부재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居頓寺 圓空國師 勝妙塔碑) - 보물 제78호

 

절터의 동쪽에 위치한 이 탑비는 원공국사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1025년(현종 16년)에 건립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신라 양식을 보이나, 세부적인 기법과 모습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대인 귀부는 꽉 다문 입에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귀가 물고기 비늘같이 되어 있다. 등의 바탕에는 거북등무늬의 육각형에 만(卍) 자와 연꽃무늬를 교대로 넣었다. 등 중앙에는 비석을 받치기 위한 비몸 받침을 만들고 안상을 새겼다. 지붕인 이수는 구름 위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새겨 넣었다. 비석의 글은 최충이 지었고, 글씨는 구양순체로 김거웅이 썼는데, 뛰어난 글씨체로 평가된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넣었다. 이 비의 내용에 따르면 원공국사는 8세에 출가하여 955년(광종 6)에 우월국으로 유학한 뒤 그곳에서 불교를 강의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역대 왕들이 그를 숭상하여 대선사, 왕사 등으로 모셨다.

 

원공국사 승묘탑비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인 이 비는 높이가 245cm, 폭 126cm이며 고려초 조각예술의 높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 모양이며, 양쪽 귀 뒤가 물고기 지느러미같이 되어 있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비문에는 원공국사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원공국사 승묘탑 (圓空國師 勝妙塔) 재현품

 

                          

고려 초의 고승으로 거돈사에서 입적한 원공국사의 부도    원주시에서 재현품을 제작(2006.12.13-2007.11.21)하여 이곳에 설치하였다    진품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居頓寺 圓공國師 勝妙塔) - 보물 제190호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현재 탑은 바닥돌이 없이 바로 기단(基壇)이 시작되고 있다.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부분이 8각으로,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 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 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추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왓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 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탑비의 건립은 ‘태평을축추칠월(太平乙丑秋七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해당하므로 이 사리탑도 그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문화재청)

 

용산 중앙박물관 경내의 '원공국사 승묘탑' 진품 .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승탑 형식을 이어받아 단정하고 균형 잡힌 팔각의 형태에 사천왕,팔부중상 등의 부조상을 새겼다   탑신 정면 문 위에 탑이름을 새긴 점이나 탑신에 꽃띠 장식을 한 것 등은 고려시대에 새롭게 시도된 것이다.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부분이 8각으로,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새겼고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새겼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중앙박물관 경내의 '원공국사 승묘탑' 진품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원공국사 부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금당터와 삼층석탑

 

    

금당터에 위에 놓인 화강석 불대좌

 

                                                          

금당터와 불대좌   멀리  원공국사 부도가 보인다.

 

  거돈사지 삼층석탑(居頓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750호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 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 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인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지붕돌 모서리에는 번뇌와 삿됨을 경계하라는 상징의 소리로 '풍탁(風鐸)'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수령 1,000년의 느티나무의 밑둥과 뿌리가 우람하다.

 

   

1,000년 거돈사 역사와 함께한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