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본찰 화산 용주사를 찾아서

2011. 1. 14. 09:51문화유적 답사기/효행본찰 화산 용주사를 찾아서

孝行本刹 花山 龍珠寺를 찾아서

 

병점역에 내려 후문역 앞에서 버스로 환승한 후 융건릉 정류장에 하차한다.

열심히 융건릉 정문에 도착하니 출입문은 닫혀있고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 있다.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무일입니다"라는 알림판이 철문에 걸려 있다.

 

 

 

융건릉(隆健陵)  - 사적 제206호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 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융릉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 1735년~1762년)와 혜경궁 홍 씨로 널리 알려진 헌 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년~1815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 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건릉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21년 후 순조 21년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년 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정문으로 가는 입구에 향나무가 서 있다.

향나무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향나무 (수령 140년)

  (2008년 기준)  /측백나무과

나무 속살에서 강한 향기가 나므로 향나무랍니다.

향을 피우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하여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하였죠

신을 불러오는 매개체로서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향을 피우며, 여러 종교의식에서도 널리 쓰입니다.

속살이 붉은빛을 띤 보라색이므로 흔히 자단(紫檀)이라고도 부릅니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융건릉이 자리한 화산(花山) 기슭을 서성인다.

화산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花山은 "꽃뫼"라도도 한다.

옛날 이곳 화산 아랫마을에 이한백이라는 홀아비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바닷가에 갔다가 물에 빠진 선녀를 구해 주었다.

지상의 꽃을 관리하는 이 선녀는 강풍에 꺾일듯한 절벽의 꽃 한 송이를 구하려다 잘못되어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를 구하여 배를 타고 오는데, 배에 탔던 다른 사람이 그녀를 겁탈하려 하자 그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집으로 데려 왔다. 은혜를 못 잊은 그 선녀는 1년 동안 화산 중턱에 살림을 차리고 살다 일 년 뒤 예쁜 딸을 낳아놓고 하늘로 올라갔다.올라갔다.

이한백은 딸 화심(花心)을 의자 하며 살았는데, 장성 후 구혼자가 많았지만 청혼을 거절하고 병든 아비만을 돌보았는데 수원부사가 수청 들기를 요구하였다. 화심은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그로 인하여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화심의 목이 잘리자 땅에는 피만 남고 몸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새빨간 꽃비가 내렸다. 이 꽃은 옛날 이한백이 선녀를 구해 줄 때머리에 꽂혀있던 그 꽃으로, 아비는 그 꽃송이를 주워 모아 그가 살던 오두막집 옆에 묻었다. 그 꽃무덤이 바로 꽃뫼요, 사람들은 그 꽃무덤이 있던 이산을 花山이라 불렀다 한다.

 

  

화산의 전설로 인하여 화산은 또 다른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정조는 영조 28년(1752.9.22)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불꽃같은 삶을 살고, 문예부흥을 이루고 백성을 사랑한 개혁군주다.

 

정조는 10살 때 아버지가 8일 동안 뒤주 속에 갇혀있다 죽음을 당하는 쓰라린 장면을 목격한다.

그 후 가슴속에 여한을 품게 했던 양주 배봉산의 초라한 아버지 묘소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화성군 화산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

 

아래에 소개되는 일화는 정조가 얼마나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양주땅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긴 정조대왕은 자나 깨나 비명으로 원통하게 숨져간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불현듯 부왕이 그립다거나 전날밤 꿈자리만 고약해도 효성이 지극했던 대왕은 손수 능을 찾아 살핀 후 환경(還京) 길에 꼭 용주사에 들러 능사(陵寺)를 당부하곤 하였다.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대왕은 바쁜 국사를 잠시 물러치고 현륭원을 참배한 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때 문득 송총이 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대왕의 눈에 띄자 순간 대왕의 눈에서는 파란불이 일었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송충이를 잡아둔 정조는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 하느냐" 하고 송총 이를 이빨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대왕의 돌발적인 행동에 함께 갔던 시종들은 모두 당황해하다가 달려들어 송충이를 모두 없애 버렸다.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융건릉(隆建陵) 주변에서는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간절한 효성을 살펴볼 수 있다.

 

 

 

 

 

화성시 송산동 화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용주사로 향한다.

 

용주사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이다.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지만, 신라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廉居和尙~ 844)이 창건하였고, 그 이후 법등이 면면이 이어지다 고려 때 잦은 병란으로 절 자체가 소실되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게 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1789년 정조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화산으로 옮겨 현릉원(장조로 추존된 뒤 융릉으로 됨)이라 하고, 이듬해 1790년 용주사를 세워 원찰로 삼았다. 즉 용주사는 능침을 관리하고,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재궁으로 건립되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살아생전에 못다 한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기에 절 이름을 용주사라 하였다."조선사찰사료"에 의하면 용주사의 창건은 1790.2.19에 공사를 시작하여 7개월 만인 9월 말에 완료되었다.

 

 

 

 

 

   

 

 

 

우측 용주사 표지석을 보며 근래에 건립된 사천왕문을 지난다. 매표소를 지나니 조그만 다리 연풍교가 있다."此到門來 莫存知解"라 새겨진 돌이 좌우에 서 있다. 풀이하면, "이 문에 이르러선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는 뜻이다.

 

연풍교에서 삼문각에 이르는 길 양 옆으로 입석이 늘어서 있는데  "下化衆生'  '正覺 天上天下唯我獨尊' ' 歸依' 등등  불법에 관련된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고 나를 찾고 진리를 찾는 간구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하얗게 쌓인 눈 속에 나무들이 침묵하며 서 있다.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 내면으로 내면으로 되새김질하고 있다. 침묵하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나 자신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조지훈의 승무(僧舞) 시비가 눈 속에 서 있다. 시비 뒷면 경위문에는 " 조지훈 님은 1938년 용주사에서 영혼의 고뇌를 춤으로  승화시킨 승무를 참관하고 영감을 얻어 시 승무가 탄생되었다. 이에 승무제가 열리는 용주사에 시비를 세워 조지훈 님의 창작세계와 불교예술의 아름다움을 온 누리에 알리고자 한다."

 

 

 

 

 

승무(僧舞)

조 지 훈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 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뚜라미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효행박불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좌측에는 5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용주사 오 층 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은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고 하며 2층기단 위에 5층 탑신이 있다.

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상층 기단에는 위패형을 조각했다. 1층탑신에는 문짝이 새겨 있다.

 

 

 

 

 

 

효행박물관 소장유물로는 화성능행도,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 화산용주사상량문, 불설부모은중경판, 사곡병풍, 후불탱화, 금동향로, 청동향로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중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揭)는 정조가 직접지은 복을 구하는 글로, "용주사를 현륭원의 재궁으로 세운 소자(정조)는 8만 4천 보연법문의 경의를 썼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삼가 케어를 지음으로써 삼업으로 공양하고 보은의 불공을 드립니다."라는 구절로 부처님의 자비를 빌어 뭇 백성을 깨우치고자 하는 염원과 부처님의 자비를 찬양한 노래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글로 되어 있는데, 정조의 깊은 효심과 불심을 느낄 수 있는 명문장이다. 필사본 2 책인데, 한 권은 가장자리를 청동으로 제본하고 연꽃무늬장식을 달았다.

 

불설부모는 증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은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고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제시한 경전으로 조선시대에 널리 간행되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된 불설부모은중경판은 목판, 동판, 석판의 3종류가 있다. 목판은 용주사가 창건되고 정조가 억울하게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정조의 지시에 의해 1796년 제작하여 용주사에 하사되었다. 동판과 석판은 순조 2년(1802)에 용주사로 하사되었다. 목판은 변상도(變相圖), 한문판, 한글판으로 되어 있고 석판은 한문판, 동판은 변상도이다. 변상도(變相圖)는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당시 도화서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사곡병풍(四曲屛風) 은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하는 4폭 병풍이다. 매화. 모란. 오동. 단풍을 각 폭에 그렸다. 정조대왕이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하사한 것이라 전해진다.

 

 

사곡병풍 앞에서 눈길이 오래 멈추어진다. 우리나라 근세의 신필이며, 당시 도화서 최고의 화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초목화 병풍이다. 화법이 정교하고 채색이 담담하다. 오동나무 잎의 정교함과 담담한 채색에서 잔잔한 감동이 여울져 온다. 단풍잎은 또 어떠하고, 모란 매화 어느 화폭도 세밀하지 않은 것이 없고 채색의 담담한 향기가 풍긴다. 오동을 제외하곤 다 암갈색과 푸른색의 괴석이 그려져 있다.

 

삼세불 후불탱화(진본)

당대 최고의 도화서 화원 김홍도과 25인의 화승들이 공동작업 한 합작불화이므로 불화적 요소와 일반 회화적 표현요소가 공존한다.

고려말 초상화법의 수용과 더불어 진전된 기법으로 명암표현 즉 음영법이 두드러짐으로써 조선후기 불화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작품이다. 가늘고 긴 손가락과 고운 발 맵시가 아름답다.

 

홍살문을 지나 양 옆 즐비한 입석을 지나니 자그마한 돌해태가 좌우로 서 있는 삼문각(三門閣)이다. 삼문각 양 옆으론 줄행랑이 길게 달려 있다.

 

 

 

 

 

삼문을 들어서니 5층 석탑 뒤로 천 보루가 웅장하게 서 있다.천보로는 정조가 현륭원에 거동할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천보루 주련(柱聯)에는 부모를 생각하는 시가 걸려 있다.

 

母年一百歲

常憂八十兒              백 살 먹은 어머니가 팔십의 자식을 항상 걱정하시니,

 

欲知恩愛斷

命盡始分離              그 은혜와 사랑은 목숨이 다 해야 비로소 떠나네.

 

空看江山一樣秋        빈 마음으로 강산을 바라보니 한 모양으로 가을이요

 

不待東風自由春        동풍을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절로 있네.

 

自笑一聲天地驚        스스로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라고

 

孤輪獨照江山靜        마음달이 홀로 비추니 강산이 조용하네. 

 

心得同時祖宗旨        마음과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얻으니

 

傳指祖印任午歲        임오년에 조사의 인가를 전해 받았네.

 

총木房中待釋迦        숲 속에서 석가모니를 기다리니

 

眞歸祖師在雪山        진귀조사(문수보살)는 설산에 계시네.

 

 

 

 

 

천 보루의 누각 이름이 안쪽에는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다. 밖에서는 "천보로", 안에서는 "홍제루"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 개로 불려진다.
원래는 천 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 [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누각의 내부중앙에는 번암 채제공이 찬술 한 <용주사상량문>이 목판으로 판각되어 있고, 측면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길이 2.44m의 목어가 잉어 모양으로 비늘, 지느러미 등을 사실적으로 갖추고 살아있는 듯이 걸려있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료(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나유타료와 만수리 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대갓집 사랑채 모습이다.

 

 

 

 

 

 

 

대웅보전 중앙 계단 대우석(大隅錫)에는 비운문(飛雲紋)과 북모양의 막음 돌에 삼태극과 모란문양이 새겨져 멋스러움이 있다.

 

 

 

 

대웅보전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다. 용주사는 현륭원의 건립과 때를 같이 한 왕실의 원찰로 각 부재의 사용이나 문양, 공간배치가 궁궐의 형식과 유사하다. 용주사는 1790년 전체 140여 칸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창건당시의 규모나 형태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정조는 이 절을 자신의 꿈 내용대로 용주사라 이름 짓고 중심전각인 대웅보전의 현판을 직접 쓰기도 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에 들어 삼배하고 가부좌하고 앉는다. 삼존상 뒤로 후불탱화가 보인다. 진품은 효행박물관에 있다.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하였는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 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다.

 

  

용주사 범종 (국보 제120호)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 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를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청)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동종

 

용뉴와 영통

  

연꽃 모양의 유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삼존상 옷자락이 가볍게 휘날리고 있다

 

천의를 휘날리며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비천상

  

부모은중경탑이 보이고 뒤로 호성전이 보인다.

 

 

부모은중경탑

 

  

 

호성전 안에 모셔져 있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 씨(정조대왕 어머니),정조대왕, 효의 황후(왕비)의 위패

   

 

 "불설부모은중경"을 옮기며, 부모님의 은덕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사위국의 왕사성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대비구 삼만칠천인과 보살마하살들과 더불어 함께 계시었습니다. 그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마른 뼈 한 무더기를 보시고 오체를 땅에 던지어 마른 뼈에 예배하셨습니다. 이에 아란과 대중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삼계의 대도사이시며 사생의 자부이시라 여러사람들이 귀의하옵거늘 어찌하여 마른 뼈에 예배하시나이까? 부처님이 아란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의 상족 제자이고 출가한지가 오래되었지마는 널리 알지 못하는도다. 이 한무더기의 마른 뼈는 혹시 전생의 부모나 형제의 뼈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예배하였노라. 내가 중생을 보니 비록 사람의 모양은 이루었으나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부모의 은혜와 덕을 알지 못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은혜를 버리고 덕을 배반하며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효도하지 않고 의리가 없느니라. 부모에 대한 효행은 만선의 근본이며 부모야말로 좋은 복전인 것이다. 천지의 귀신을 다 섬긴다해도 부모에 효도함만 못하다. 만약 총명하고 지혜를 가진자가 있어 생사의 피안에 도달하려면 응당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 부모에게 효도로서 섬기는데서 오는 공덕은 일생보처보살이 받는 공덕과 같다. 부모 은혜 갚으려면 한량없는 부모님의 은혜를 알것. 은혜 모르는 사람을 깨우칠것. 죄업을 참회할 것. 삼보에 귀의하고 법다이 살것. 성취한 모든 공덕을 국가 사회에 베풀어서 회향할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 아이를 배어서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

 懷耽守護恩 (회탐수호은)


여러 겁 인연이 중하여 금생에 다시 와서 어미태에 의탁했도다.

한 달이 지나가니 오장이 생겨나고 칠칠일에 여섯 정이 열리도다.

몸뚱이는 태산같이 무겁고 행동거지 할 때마다 몹쓸 질병 겁내도다.

화려한 비단옷은 도무지 안 입으니 단장하던 거울에는 티끌이 묻었도다.

둘째는 해산함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臨産受苦恩 (임산수고은)

 

아이 밴 지 열 달이 지나가니 어려운 해산 날이 닥쳐오도다.

날이면 날마다 중한 병에 걸린 듯이 정신이 혼미하도다.

두려움 고 무서운 심정 어찌 다 헤아릴까.

근심으로 흘린 눈물 옷자락을 다 적시도다,
슬픔을 머금은 채 친족에게 아뢰옵되 이러다가 죽지 않을까 겁날 뿐이외다.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신 은혜

生子忘憂恩 (생자망 우은)

 

자비하신 어머님 그대 낳은 날엔 오장육부 도려내는 심한 고통 겪었으니 마음은 혼미하고 육체는 기절하며 짐승을 잡은 듯이 낭자히 피 흘리도다. 갓난아이 충실하단 말 들으시고 무던히 기뻐하시언만 기쁨이 가신 뒤에 슬픔이 밀려오니 고통스러운 그 심정 가슴을 저미도다

 

넷째는 쓴 것 삼키고 단것은 뱉어 먹여준 은혜
咽苦吐甘恩 (연고토감은)

 

깊고도 무거울사 부모님 은혜려니 사랑하고 귀여워하심 한시도 변함없도다. 자식사랑 깊은 정에 맛 좋은 음식일랑 잡숫지 아니하고 쓴 것을 삼키어도 찡그리지 아니하며 자식의 배부름이 자기 배 부른 듯이 굶주림 사양 아니하시니 자비의 크신 정 애처롭게 깊어만 가도다.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신 은혜
 回乾就濕恩 (회건취습은)

 

어머니 당신 몸은 젖은데 누우시고 애기는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포근한 두 젖으론 기갈을 채워주고 고운 옷자락은 바람 막고 추위 막아 주도다. 사랑의 정성으로 잠조차 설치시고 아기의 재롱으로 무척이나 기뻐하도다. 어린 아기 편케 할 뿐 자신의 편안함은 구하지 않도다.
 

여섯째는 젖먹이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은혜

 乳哺養育恩 (유포양육은)

 

어머니 은덕 대지와 같고 아버지 은혜 하늘과 같도다, 만물을 실어 길러주는 대지와 장시키는 하늘의 공능이 같듯이 부모님 은혜 또한 서로 같도다. 눈이 없거나 손발이 불구라 해도 밉게 여기거나 싫어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식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속에 세월가도다.

 

일곱째는 목욕 세탁 더러움을 씻어주는 은혜

洗濁不淨恩 (세탁부정은)

 

생각건대 옛날의 아름답던 그 얼굴 아리따운 그 모습은 몹시도 고왔도다. 버들입 두 눈썹에 불그레한 두 뺨이야 연꽃인양 하였는데 깊은 정 쏟다 보니 옥같이 곱던 얼굴 잔주름 늘어가고 세탁함에 손발이 다 닳도다. 애틋한 사랑 속에 자비하신 어머님은 얼굴마저 변하셨도다.

 

여덟째는 멀리 떠나가면 근심 걱정하신 은혜

 遠行憶念恩 (원행억념은)

 

죽어 이별 진실로 잊기 어렵고 살아 이별 또한 가슴 아프도다. 자식이 외출하여 먼 곳에 나아가면 어버이의 그 마음도 타향 땅에 함께 있도다. 밤이나 낮이나 자식 향한 마음으로 흘린 눈물 천만 줄기 잔나비 새끼 사랑에 애처로이 울부짖듯 행여나 염려하여 애간장이 끊기도다.

 

아홉째는 자식을 위해서는 모진일 하신 은혜

爲造惡業恩 (위조악업은)

 

어버이 크신 은혜 산처럼 바다같이 깊고 또 높은 거니 진실로 보답키 어렵도다.

자식의 괴로움을 대신 받기 원하시고 아이의 수고함에 어미 마음 편치 않도다.

먼 여행길 떠나가면 그동안에 무사한가 잠자리마저 걱정하도다. 자녀의 잠시

괴로움도 어미 마음 긴 시간 아프도다.

열 번째는 임종 때도 자식 위해 근심하신 은혜

 究竟憐愍恩 (구경연민은)

 

아버지 어머니의 깊고도 지극한 은정 언제나 사랑으로 넘쳐흐르도다.

앉거나 서거나 마음은 그림자처럼 멀리 또 가까이서 항상 서로 따르도다.

백 살 된 고령의 어머니가 팔십먹은 자식 걱정하고 계시니 이러한 깊은 정

어느 땐들 그치리까. 목숨이 다한 날에 비로소 떠날거나.

 

내 항상 보리심을 발하여 법과 계율을 지니고 자비심을 내어 세상을 위하고 중생을 보호하리. 사랑하는 말과 이익되는 일 그것으로서 중생을 교화하고 또 함께 법을 말하여 착한 행 닦게 하리. 진실로 팔풍 오욕에 수미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세상법에 물들지 않아 세상의 길잡이 되리라.         

              

 

 

千佛殿

 

 

대웅보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바람에 쟁그랑 거린다.

 

 

주련을 읽어 본다.

報化非眞了妄緣     보신과 화신은 참이 아닌 허망한 망연이요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은 청정하여 넓고 끝이 없다千江有水千江月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에 달이 비치고萬里無雲萬里天     만리에 구름이 없으니 만리가 하늘이라

 

삼문각을 나선다.

나는 오늘 무엇을 가지고돌아가는지자문해 본다.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에 달이 비치고 만리에 구름이 없으면 만리가 하늘이라" 되뇌며 중얼거려 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대웅보전 앞마당에 연등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천보로 앞 세존사리 5층탑이 그림자를 그리며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