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골 선림원지와 불바라기약수터를 찾다

2010. 10. 31. 23:36문화유적 답사기/미천골 선림원지와 불바라기 약수터를 찾다

미천골 선림원지와 불바라기 약수터를 찾다

         (2010.10.28)

 

선림원지(禪林院址)

미천골 매표소에서 계곡을 따라 800m를 걸어가니 높은 축대 위로 석탑이 보인다.

석양이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걸려 있다.

석축 옆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을 걸어 오르니 선림원 터다.

폐사지 빈터에는 삼층석탑,  선림원지부도, 석등, 홍각선사탑비가 유물로 남아 이곳 선림원 터을 묵묵히 지키며 바라보고 있다.

절터를 위요하고 있는 산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깊은 가을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

석등이 있는 높은 축대 앞에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삼층석탑 기단부에는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중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기단만 남은 부도에는 아이련 복련이 아름답고 중대석에는 운룡이 날고  기단 하대에는 쌍사자가 서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 있다.

석등 지붕돌의 떨어져 나간 귀꽃의 상처는 천 년 세월을 표현하고 있으며, 아래 받침돌에 돌출한 앙증스러운 귀꽃장식과 미려한 장고형의 기둥돌을 본다. 홍각선사탑비의 이수의 용은 구름 속을 날아오르는 듯하다.

단풍으로 물든 폐사지는 쓸쓸하기는커녕 가을의 향연으로 화려하기만 하고, 유물들은 저마다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 절은 804년에 순응법사가 세운 것으로 보인다. 

월정사에 남아 있다가 한국전쟁 때 월정사와 함께 불타버린 범종이 1948년 바로 이 선림원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범종에 804년 순응법사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림원터에는 이 종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에 월정사로 옮겨졌는데, 그만 변고를 만났던 것이다. 조성 내력과 연대가 새겨져 있던 이 종은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어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었다. 순응법사는 802년 해인사를 세운 인물이다. 그렇다면 선림원은 의상대사가 이끌던 신라 불교 최대의 종파 화엄종에서 지은 절이며, 9세기 중엽 홍각선사(절터에 남아있는 부도의 주인으로, 선사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종의 승려이다)가 대대적인 중수를 하면서 선종 사찰로 전향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화엄종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사실을 말해주는, 그 최초의 사찰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절터에 남아 있는 부도비, 부도, 삼층석탑, 석등을 비롯해 쏟아져 나온 갖가지 기와들이 모두 9세기 후반의 것들이어서, 이때 대대적으로 중수되고 

홍각선사를 비롯한 선종 승려들이 이 선림원에 들어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수도에 전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85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금당터의 주춧돌이나 그 밖의 유물이 집단적으로 온전히 매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900년을 전후한 어떤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되었으며, 그 시대 이후의 유물이 단 한 점도 발굴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선림원은 산록 때문에 강당을 없앤 전형적인 일탑식 가람으로 밝혀졌는데, 금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 정도의 규모로서 그 주춧돌이 

뚜렷이 남아 있다. 한편 금당터의 서북 편에 석등을 앞에 세운 조사당도 있었음이 확인됐다.  조사당터의 동편에는 홍각선사의 부도가 있으며, 조사당은 홍각선사의 영정을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천 계곡에서 들어오는 입구 쪽의 축대에서 승방터도 확인됐다. 부도는 기단만 남아 있고, 부도비의 비는 박살이 나서 150여 자만 수습되어 금석학 자료로 남아 있으며, 석등의 지붕돌 귀꽃은 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부도의 기단에는 긴장미가 뚜렷한 아이련 복련이 남아 있고, 부도비의 거북이와 용은 곧 날아오를 듯 생동감이 넘치며, 석등의 장구형 간석(기둥돌)은 매우 화려하다."   (문화유산답사회)

 

 

선림원지 전경; 왼쪽에 삼층석탑 오른쪽에는 금당지 주춧돌이 보이고 멀리 축대 위로 석등이 보인다

 

 

 

禪林院址에 가서   

이 상 국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 들 네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 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武林으로 돌아가네

 

 

(1) 선림원지삼층석탑 (보물 제444호)

 1948년에 명문(銘文)이 있는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되었던 선림원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석등·홍각선사탑비·석조부도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석조유물들은 대부분 쓰러져 있었으나 모두 복원되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여러 장의 돌로 탑의 토대를 만들고,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8부 중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체감되고 각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있고, 철제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보주(寶柱: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모양의 돌이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 외형상 정제된 비례를 보여주지만 8부 중상의 조각은 섬약하고 석재의 구성도 규율성을 잃고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나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전 기단부에서 소탑(小塔) 60여 기와 동탁(銅鐸) 1개가 발견된 일이 있다. 탑 앞에는 안상(眼象)을 새긴 배례석(拜禮石)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팔부중상

 

 

 

 

 

 

 

 

 

상층기단 면석의 팔부중상

 

 (2) 선림원지석등  (보물 제445호)

선림원터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등이다.  선림원은 신라의 옛 절로, 이곳에서 출토된 신라범종을 통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했던 순응법사(順應法師)에 의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지금은 이 터가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고 각종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아직까지도 발견되고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 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데, 귀꽃조각과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지붕돌이 일부 탈락되긴 하였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개선사지석등(보물 제111호)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같은 절터 내의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귀꽃 장식이 아름다운 하대석과 미려한 장고형의 간주석

 

  

 

지붕돌의 귀꽃이 반정도 떨어져 나갔다

 

 

 

 

                     

석등

 

 

 

 

  

 

 

(3) 선림원지부도  (보물 제447호)

선림원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가 연 절로, 1948년 절터에서 연대가 804년으로 적힌 신라시대 범종이 나오면서 창건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부도는 일제강점기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基壇部)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부도임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때에 돌로 만든 부도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중간받침돌·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인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기단의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부도로,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 각형의 일반적인 부도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한 부도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부도가 홍각선사의 부도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선림원지 부도

 

 

 

 

 

기단부 하대의복련석과 쌍사자;문의곽

 

기단부 중대석의 운룡문

 

 (4)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  (보물 제446호)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선림원터에 있으며,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龜趺)와 비몸, 비머릿돌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 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비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 각형의 무늬가 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몸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인데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문화재청)

 

현재의 비석은 근래에 새로 제작 복원한 것이다.

 

 

 

 

 

홍각선사탑비

 

   

 

 

 

이수

 

 

 

불바라기 약수터 가는 길

 

 

약수터로 가는 임도

 

큰샘 실폭포

 

 폭포의 주변에 크고 작은 샘들이 모여 폭포를 이루어 샘실폭포라 불리며 여름철 우기에는 암벽 전체가 하나의

 폭포로 쏟아 내리는 물줄기는 장관이다.

 

 

송이버섯 모양의 벌집들이 즐비한 토종굴을 채취하는 개인이 운영하는 밀봉원 재래봉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상직폭포(上直瀑布)

 

상직폭포(上直瀑布)

높이 70m 폭 10m에 이르며, 미천 계곡 입구에서 7.3km에 이르기까지 물고기(메기,산천어 등)가 상직소까지 올라 왔다가 폭포가 길고 수직으로 되어 있어 더 이상 오르지 못하여 상직폭포라 전해 진다.

 

불바라기 약수

미천계곡 입구로 부터 약 12km에 위치한 심산 오지인 불바라기 약수터는 높이 약 30m에 달하는 황룡. 청룡폭포가 있어 주변의 운치가 아름답고, 이 두 폭포 중 청룡폭포 줄기의 중간지점에서 솟아나는 특이한 약수로 철분 및 탄산성분 등을 많이 함유하여 위장병과 피부병 치료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 하여 예부터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불바라기 유래는 고대 양양지방은 철이 풍부한 풍부한 고장으로 유명하며, 이곳 미천 계곡 곳곳에서 철을 이용하여 농기구 등을 제작하던 대장간이 많아 불바닥을 이루었다 하며, 불바닥이 변천하여 불바라기로 전해진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청룡폭포 절벽 가운데서 솟아나는 약수가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바위가 온통 붉은색으로 변하여 불같이 붉은 바닥 즉 

불바닥이 되었다가 불바라기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불바라기 약수는 철분과 탄산성분 등이 함유되어 있어 톡 쏘는 맛이 있다.

 

 임도에서 불바라기 약수터로 들어가는 280m 길이의 계곡은 머루와 다래 덩굴이 우거진 태고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계곡을 오가며 징검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좌우 양편으로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곳에서 떨어지는 청룡폭포와 황룡폭포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청룡폭포

 

황룡폭포

  

 

청룡폭포 상단 바위에서 ;솟아나는 불바라기 약수  -  호수로 연결하여 약수를 마신다.

 

 

                                 

호수로 연결한 불바라기 약수온통 바위가 붉게 물들어 있다. 철분과 탄산성분 등이 함유되어 있어 마시면 톡 쏘는 맛이 있다.

 

 

  

미천골 단풍

 

단풍 드는 날  

도 종 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