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시

알 수 없어요

尋牛子 2025. 6. 9. 12:48

알 수 없어요

한용운(韓龍雲)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밀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사자산 법흥사 뒷산 구봉대산 계곡수에는 바람이 불적마다 하얀 꽃잎이 우수수 맑은 물 위에 떨어져 맴돌다가 떠내려 간다.
비 그친 후 울릉도 관음도에서 바라보는 죽도 상공의 뭉실뭉실안 구름 덩이 사이로 보이는 맑고 푸른 하늘
월출산 구정봉 아래의 용암사지 삼층석탑 - 고려 시대 세워진 이끼 낀 부서진 옛 탑에서 오랜 세월의 향기를 느낀다.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돌부리를 울리며 굽이굽이 흐르는 죽계천 - 아홉 구비 절경을 이루어 죽계구곡(竹溪九曲)이라 한다.
울릉도 추산(錐山 :송곳봉)과 공암(孔岩 ; 코끼리바위) 수평선 해넘이

 

 

 

나의 꿈

한 용 운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적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겄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겄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겄습니다. 

 

구룡령 서림리 마을- 새벽 안개가 걷히면서 논물이 넘실거리는 들 풍경이 신선하고 아름답다
꽃머리에서 미끄럼 타고 있는 아침의 맑은 비이슬

 

 

나의 길

한 용 운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내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천년의 숲길